•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2. 독전과 비판
  • 비판의 다양한 층위
  • 민중의 비판
심경호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는 민중은 전쟁의 폭력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위정자의 무능과 실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비판은 완전한 문장이나 작품으로 나타나기보다는 간결한 동요(童謠)와 참요(讖謠)로 표출되었다.

이를테면 공민왕이 1361년 10월에 10만의 홍건적을 피해 복주(福州, 안동)로 파천하였을 때 민중이 불렀다는 민요는 대표적인 예다. 공민왕이 복주에 이르러 영호루(映湖樓)에 행차하였을 때 왕의 모습을 보려고 나온 사람들이 둑을 이루었다. 그때 어떤 이가 탄식하며, “소가 크게 우니 용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파도를 희롱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 그것을 징험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소가 크게 우니 용이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맑은 파도를 희롱한다.” 라고 하는 말은 참요였다.

이 일을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연작 영사 악부(連作詠史樂府)인 『해동악부(海東樂府)』 가운데 「영호루(暎湖樓)」에서 다루었다.284)이학규, 『해동악부(海東樂府)』 (1821, 56편) 공민왕은 1361년 10월에 홍건적을 피하여 임진강을 건너 도솔원(兜率院)에 머물렀을 때도 원송수(元松壽)와 이색(李穡)에게 “이런 경치에는 경들이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어야 하겠군.” 하였다. 전황은 생각하지도 않고 풍월이나 찾은 공민왕의 실덕을 이학규는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어제 임진강은 / 昨日臨津江

풍경이 아름답고 오묘했네 / 風景絶佳妙

궁비(宮婢)와 어자(御子)는 슬퍼 마라 / 宮婢司圉謾悽悲

먼 길에 쇠약한 말은 정말 시의 소재란다 / 路修馬弱眞詩料

애석하다, 원 주사(元奏事)와 이 승선(李承宣)은 / 惜哉元奏事李承宣

황급하여 읊조릴 겨를 없었다니 / 悤悤不暇爲吟嘯

오늘은 복주 방죽 / 今日福州堰

즐거워라! 맑은 파도에 배를 띄웠네 / 樂哉淸波舟

신룡이 바다를 떠나고 소가 크게 운다고 / 神龍離海牛大吼

소매 훔치며 지켜보는 이여, 탄식을 마라 / 觀者反袂莫嗟憂

고맙구나 파두반(破頭潘)과 주원수(朱元帥)여 / 多謝破頭潘朱元帥

그대들 아니라면 어이 여기에 이르렀겠나 / 若非卿輩至此不.

전쟁과 관련하여 민중의 비판 의식을 담은 동요나 참요는 이렇게 정사(正史) 속에 전할 뿐만 아니라 야사(野史)와 문집에도 자주 나타난다.

민중은 횡포를 부리는 무장의 별명을 부르고 그 아래서 종군하기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무장 김진(金鎭)이 경상도 김해에 부임한 뒤 밤낮으로 소주를 마시며 주색잡기에 열중하자 민중들은 그의 무리를 소주도(燒酒徒)라 일컫고, 종군을 기피하였다고 한다. 이학규는 『영남악부(嶺南樂府)』의 「소주도」에서 그 사실을 풍자적으로 거론하였다.285)이학규, 『해동악부』(1808, 8편) : 심경호, 『한시 기행』, 이가서, 2005, 213∼214쪽.

한편, 민중의 비판 의식은 식자 계층의 문자를 빌어 좀 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를 보면 을묘왜변 때, 누군가가 쓴 다음과 같은 시가 남주(南州)의 역(驛) 벽에 걸렸다고 한다.

장흥의 백성은 아비 어미를 잃은 것 같으니 / 長興民若喪考妣

한 공(韓蘊)의 정치가 인술이었음을 알겠네 / 知公韓公政術仁

장흥을 구하지 않다니

광주 목사(李希孫)의 고기를 먹고 싶도다 / 不救欲食光牧肉

퇴각하여 도망하다니

수군절도사(金贇)의 몸을 마땅히 찢어야 하리 / 却走當裂水使身

품계가 뛰어오른 이 부윤(李潤慶)은 정말 대장부다만 / 超資李尹眞丈夫

다른 직으로 옮긴 변 수령(邊協)은 간사한 신하로군 / 遷職邊倅乃詐臣

감사(金澍)는 도모하는 책략에 어두운 듯하고, / 監司奈何昧圖策

방어사(南致勤)는 어이하여 사람 죽이길 좋아하나 / 防禦胡爲嗜殺人

도원수(李浚慶)는 금성(나주)으로 단단히 물러나 앉았고 / 元帥錦城堅退坐

절도사(趙安國)는 도중에서 머뭇머뭇 거리네 / 節度中路故逡巡

공적 있는 양달사(梁達泗)는 어느 곳으로 돌아갔나 / 有功達泗歸何處

아무 생각 없는 유 충정(柳忠貞)을 강진에 맡기다니 / 無意忠貞任康津

성을 버린 홍언성(洪彦誠)은 마땅히 먼저 참수하여야 하고 / 棄城彦誠宜先斬

군진(郡鎭, 진도)을 비운 최린(崔潾)도 죄가 역시 같구나 / 空鎭崔潾罪唯均

봉록을 먹던 당시 사람들이 모두 시위소찬하였기에 / 食祿當時俱尸位

국난에 임한 이날에 도리어 참 모습을 드러내네 / 臨危此日各見眞

이덕견(李德堅)은 항복을 빌었다만 무어 책망할 것 있나 / 德堅乞降何須責

원적(元績, 병마절도사)의 경망함도 꾸짖을 것 없네 / 元績輕躁不足嗔

왜적이 횡행한다만 누가 감히 대적하랴 / 橫行倭賊誰能敵

고을이 분탕질당하여 생민만 괴롭구나 / 邑里焚燒困民生

상벌이 분명치 않으매 공도(公道)가 멸하였나니 / 賞罰不明公道滅

슬프게도 임금께선 설욕하려 해도 방도가 없네 / 惆悵君羞雪無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교전의 결과를 보고 지휘부의 무능을 비판한 이 시는 민중의 비판 의식을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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