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2. 독전과 비판
  • 비판의 다양한 층위
  • 지식인의 비판
심경호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은 24세 되던 1361년에 제2차 홍건적의 난을 당하여 국난을 우려하는 시를 지었다. 홍건적은 1359년(공민왕 8) 12월에 4만의 군사로 고려를 침략하여 평양을 함락시켰다. 고려는 이듬해 1월 2만 명의 군사로 평양을 공격하여 탈환하였으며 2월에 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모두 몰아내었다. 하지만 1361년 10월에는 10만의 무리가 지금의 자비령 방책을 부수고 개경으로 진군하 자 공민왕은 복주(福州)로 피하였다. 다음해 1월 고려군은 개경에 진공하여 적을 대파하고 홍건적을 압록강 건너로 모두 쫓아냈다. 이 전란으로 고려의 왕권은 약화되고, 이성계의 권력이 신장하였다. 김구용은 「신축년 홍건적(辛丑年紅賊)」에서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하여 백성들이 처자식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사정을 탄식하고 조성 관료들의 무능을 비판하였다.286)김구용, 『학음집(學吟集)』 상, 「신축년홍적(辛丑年紅賊)」.

포악한 놈들이 서울을 함락하니 / 豹虎陷京國

뭇 신하들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네 / 群臣摠不知

황급한 속에 처자를 잃고 / 蒼黃失妻子

허둥대는 사이에 어린애를 버리네 / 顚倒棄嬰兒

전쟁의 화염은 구름을 뚫고 올라가고 / 煙焰衝雲起

산하는 눈에 가득 슬퍼라 / 山河滿目悲

요새지를 지키지 못했으니 / 金湯已未守

도망하여 어디로 가랴 / 奔走欲何之.

김구용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게 된 것을 비통해 하는 한편,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끝날 것을 우려하였다.

역사 현실을 읊은 시들은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이며, 그러한 시들 가운데는 민요적 풍격의 악부체(樂府體)나 풍자적 내용을 담은 신악부체(新樂府體)의 수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색(李穡, 1328∼1396)은 53세 때인 1381년(우왕 6) 늦겨울에 「산중요(山中謠)」를 지어 조정이 왜적의 침략에 대비할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질책하였다.287)이색, 『목은시고(牧隱詩稿)』 권26, 「산중요(山中謠)」. 왜적의 노략에서 살아남은 산촌 노인을 화자로 설정하여 32구의 장시(長詩)를 엮었다. 이색은 왜구가 “처음엔 밤에 해안에 올라, 쥐새끼처럼 담장을 몰래 넘더니, 얼마 뒤엔 뻗대어 물러가지 않아, 대낮에도 들판을 다니다가는, 점차로 관군에게 감히 맞서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와와 시끌하다(其初夜登岸  鼠竊踰牆垣  中焉驕不退  白晝行平原  漸與官軍敢相敵  淸晨鼓南俄黃昏)”라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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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는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으나, 특히 13∼14세기 일본에서 57년 동안의 내란이 계속되면서 약탈의 규모가 커졌다. 즉, 1350년(충정왕 2) 이후 왜구는 100여 척의 선단을 형성하였고, 공민왕 때에는 74∼78회나 침입하였다. 왜구는 고려 선박을 불태우고, 조운을 어렵게 하였으며, 강화도까지 쳐들어왔다. 곧 일찍부터 ‘쥐새끼처럼 담장을 몰래 넘던’ 단계를 벗어나 백주에 횡행하여 관군에 맞서고 있었다. 또 1360년(공민왕 9) 5월에는 양광도 평택·아주(아산)·신평(홍주)·용성(수원)까지 침입하였다. 1381년(우왕 6) 7월에는 부여·정산·운제·고산·유성 등에 침입하였다가 계룡산에서 부녀자들을 살해하였다. 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1350년부터 1392년까지 471∼476회의 왜구 침입이 있었다.

이즈음엔 방비가 허술한 골짝도 / 年來陵谷忽易處

왜적이 날뛰어 삼킬 듯한 기세 / 賊勢猖獗將幷呑

그놈들 벌건 다리로 가파른 벼랑 다녀 / 赤足走上千仞崖

가시나무 바위틈 나는 것이 흡사 원숭이 / 藤棘石角飛猴猿

관군이 배 태우자 더더욱 성깔 내어 / 官軍燒船激其怒

독기 뿜고 불길 내어 다 태울 양이네 / 肆毒烈火如俱焚

규중 여자나 장정을 가릴 것 없이 / 閨中女兒與卒徒

한데 죽어 엎어지니 더 말해 무엇하랴 / 騈首就戮餘何言

나는 요행히 덤불 속에 몸을 숨겨서 / 我幸竄伏榛灌中

목숨 하나 겨우 건졌다만 / 僅保性命無留存

주리고 쓰린 것이 날로 더하니 / 忍飢忍苦日復日

해변 백성들 하소연 많은 걸 이제야 알겠소 / 始知濱海多呼寃

하소연하길 서른하고도 한 해 / 呼寃三十又一年

조정에선 진작부터 백성을 염려했다만 / 廟堂久矣憂黎元

어째서 이 일이 내게도 닥쳤는가 / 奈何今日亦及我

곧바로 궁궐에 고하려 하였으나 / 告焉直欲排天閽

돌이켜 생각하니 이게 내 운명이라 / 反而思之實我命

편타가는 위태하고 형통하단 막히는 법이려니 / 久安必危亨必屯

하늘이야 인간에게 편애함이 없으시니 / 天於人兮無厚薄

늦게라도 은혜를 골고루 주시겠지 / 雖有久速均其恩

태평을 내리심이 조금만 빨리 하시길 / 賜之太平或者近

머리 조아려 하늘에 호소합니다 / 我今稽顙呼乾坤.

고려 관군은 성을 쌓고 군사를 내었으나 왜구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색이 「산중요」를 쓴 1381년 8월에는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이 왜선 500여 척을 진포(鎭浦)에서 격침시키고, 9월에는 이성계가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수었다. 진포 대첩의 소식을 듣고 이색은 시를 지었으며, 운봉 대첩의 소식을 듣고서도 시를 지었다. 하지만 운봉 대첩 때 왜구의 잔당은 지리산으로 숨었다. ‘(해변 백성들이) 하소연하길 서른하고도 한 해’라 한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 1381년(우왕 6)까지가 31년임을 가리킨다. 「산중요」의 화자는 자신의 원통함을 궁궐에 호소하려다가 체념하고 하늘에 기구하는 것으로 그친다. 조정의 관방(關防) 정책을 불신하고 비판한 것이다.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서구도올(西寇檮杌)」은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쓴 5언 186운 1860자의 장편 고시로, 민중의 봉기를 한시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예다.288)심경호, 「한국 한시와 역사」, 『한국 한시의 이해』, 태학사, 2000, 29∼48쪽. 1812년 4월에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뒤 조수삼은 정주(定 州) 현감 이신경(李身敬)의 밑에 가서 공문서 작성을 맡아 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그 시에 붙인 「병서(幷書)」289)조수삼, 『추재집(秋齋集)』, 「서구도올병서(西寇檮杌幷序)」, 임신칠월일 경원 조수삼서(壬申七月日經畹趙秀三序).에서 조수삼은 수령 직책의 관리들에게 인의(仁義)의 정치를 구현하여 민란을 방지하라고 풍간하였다.

난리의 근원을 따져보면 어찌 갑자기 일어난 것이겠는가. 차츰 그렇게 되어 간 것은 좋지 못한 풍속이 있어서요, 사단이 벌어진 것은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요, 일이 일어난 것은 좋지 못한 인물이 있어서이다. 『춘추』를 보면 거기 기록된 난적(亂賊)의 일치고 이처럼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정원(定原)은 서쪽 변경에 있어 풍속은 억세고 토지는 비옥하고 인민은 교만하고 사치하다. 그런데다 심양과 요동에 가까워 화폐가 유통되고 관시(關市)에 통하여 그 풍속이 잘 다투고 교활하여, 이문만 좇아 그릇 하나에 치켜뜨고 근수 조금에 죽이려고 대든다. 그래서 우리 조선 때 차츰 교화되고는 있지만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의 기풍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근년에 여러 해 큰 흉년이 들어, 관아와 민간이 다 고갈되고 부자와 가난뱅이가 모두 곤란하여, 지아비는 처를 팔고 노예는 주인을 약탈하며 아우가 형을 관가에 소송하고 부자가 집안에서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읍정(邑政)을 맡은 이는 부득이 세금을 독촉하고 형벌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자 홍경래와 우군칙(禹君則)은 바깥에서 오고 김이대(金履大)와 최이륜(崔爾倫)은 안에서 호응하여, 성 하나를 점거하여 수개월 동안 버텨 나라 안 군사를 다 동원하고 백만금을 허비한 끝에야 겨우 섬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일 가운데서도 가장 좋지 않은 일이다. ······ 나의 시는 단지 동시대에 살고 그 지역을 다녀보아 내 이목으로 보고 내 울분을 풀어 짐짓 오늘을 탄식하고 읊조린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도올은 신수(神獸) 가운데 악하여 선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시로써 정주 인민을 경계하고 아울러 현감에게 고하여, 위에 있는 자는 선하지 못한 것을 가르치지 말며 아래 있는 자는 선하지 못한 것을 따르지 말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도 올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이 현감은 양심적인 관리다. 그래서 조정에서 평이 난 뒤에 이 고장을 맡겼다고 한다.

조수삼은 인민들이 강박에 못 이겨 도적이 되었고, 그것도 아이들이 무기를 훔쳐 연못가에서 장난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민란의 원인을 교화의 불철저함에서 찾았으며,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백성들의 풍속이 무너졌다고 말하였다. 조수삼은 조정의 공식 견해를 따라 난의 평정에 충절을 다한 인물을 칭송하고 홍경래를 따른 관원들을 비난하였는데, 그 점에서 관군 측 기록인 『진중일기(陣中日記)』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는 봉기군이 군리(軍吏)와 결탁한 원인은 살피지 않았지만, 민중들이 주림을 해소하려고 봉기군에 가담했다고 동정하였다. 한편, 송림동 전투와 3월 20일부터 22일 사이에 일어난 우군칙과 홍총각의 피격, 홍경래의 패주 입성, 북장대의 폭파 작전, 정주성 탈환을 차례로 다루면서 관군 측 인물들을 대부분 비판하였다. 충분을 떨친 제경욱(諸景彧)은 칭송하되, 봉기군의 기습으로 군사를 잃은 윤욱렬(尹郁烈)은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송림동 전투 뒤 관군의 약탈에 대하여 “적은 대빗 같고 관군은 참빗 같아, 거두고 빼앗길 터럭 하나 안 남겼다(賊梳兵如篦, 蒐掠靡遺髮)”라고 읊었다. 조수삼은 봉기군과 관군의 접전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인민들을 다음과 같이 동정하였다.

적괴와 그 일당이 / 渠帥曁黨羽

붙잡히고 섬멸된 것은 마땅한 일 / 殲獲分其秩

정원 사람이라고 어찌 죄 없으랴만 / 定人豈無睾

곤륜산에 불이 나서 옥까지 태우다니 / 昆炎嗟不別

제 지아빈 늙고 눈멀었고 / 我夫老而瞽

제 아이는 어리고 다리 절어 / 我兒幼且蹩

나가려 하여도 적도가 길을 막고 / 欲出賊不出

목숨을 구해도 관군이 살려주지 않았다오 / 欲活兵不活.

조수삼은 홍경래의 난을 민중 봉기로서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민중의 삶에 대하여 동정하고 위정자의 실정(失政)에 분개하였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영평에 은거하던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창생(蒼生)을 은덕으로 포용할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봄날 시름에 잠겨(春愁)」라는 시를 지었다.290)이서구, 『척재집(惕齋集)』, 「춘수(春愁)」.

또 한 해 봄날은 지나가는데 / 又過鶯花節

관서는 아직도 전쟁 중이라니 / 關河尙用兵

전쟁의 먹구름 바다까지 이었고 / 陣雲連海戍

전장에는 봄 농사를 폐하고 말았단다 / 戰地廢春耕

북소리 울리매 유능한 장수를 사모하고 / 鞸鼓思良將

창칼을 치켜들며 의로운 소리 떨치리라 / 戈矛振義聲

어찌 차마 큰 은덕을 잊으랴 / 忍能忘大德

도적도 역시 창생인 것을 / 盜賊亦蒼生.

문인들은 대개 홍경래의 난 장본인들을 ‘도적’이라 규정하여 질타하고 관군의 반란 평정을 찬양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서구는 도적도 창생이므로 은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난의 발발 원인에 대해 깊이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봉기군을 동정한 마음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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