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3. 전쟁의 기록과 소설적 변용
  • 시가에 나타난 전쟁의 상흔
심경호

국문이나 한문으로 적은 시가 가운데는 전쟁의 상흔을 추체험(追體驗)한 것들이 많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임진왜란 때 군영에서 탈주한 악공을 소재로 삼아 전쟁의 상흔을 살폈다. 「문 밖에 구걸하는 자가 왔는데 풀피리를 잘 불어 그 소리가 아주 구슬펐다. 물어보니 병영의 악공이었는데 난리를 피해 도망했다고 한다(門外有行乞者 善吹草笛 其聲甚悽楚 問之乃兵營樂生之逃亂者也)」는 제목의 칠언 율시다.304)이산해, 『아계유고(鵝溪遺稿)』 권2, 「문외유행걸자 선취초적 기성심애초 문지내병영악생지도란자야(門外有行乞者善吹草笛其聲甚悽楚問之乃兵營樂生之逃亂者也)」.

지난날엔 장군 휘하 악대에서 / 元戎幕下舊梨園

갈피리 절묘하게 불었었지 / 學得蘆茄妙絶群

바다의 달이 뜰 때 서너 곡 불어 / 數調弄殘滄海月

한 가락 뽑아 울릉도 구름도 쓸었다나 / 一聲吹破蔚陵雲

중국 강남 장정들 어느 때나 돌아갈까 / 江南帝子無歸日

파촉 땅 젊은이는 마음만 울컥울컥 / 巴蜀王孫欲斷魂

속없이 전장에서 곡조 타지 말게 / 莫向沙場閑捻曲

우리 군대 싸움 앞서 흐느낄까 염려되니 / 恐敎臨陣泣三軍.

이산해는 꾀죄죄한 행색에 피리를 입에 문 탈주 군악병을 시에 묘사하였다. 그 악공이 군악대서 갈피리를 불면 마치 계림의 만파식적(萬波息笛)처럼 왜군을 다 쓸어낼 기세였을 텐데 이제는 우리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구슬픈 피리를 불고 있다고 하였다. 중국 군사들이 어느 때나 고향에 돌아갈까 하면서 울컥거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실은 힘들고 지친 우리 군사들의 모습을 포개 보였다. 대비와 가탁을 통하여 전쟁의 참혹함을 형상화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 한 인간이 겪은 기구한 삶을 읊은 최성대(崔成大, 1691∼1761)의 「이화암노승행(梨花庵老僧行)」이 있다.305)황수연, 『두기(杜機) 최성대(崔成大)의 민요풍(民謠風) 한시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이 시는 최성대가 1714년에 충청도의 이화암에서 만난 한 노승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를 듣고 1744년(53세 무렵)에 이르러 노승을 작품 화자로 삼아 지은 장편 서사시다.

노승은 평범한 아전 집안 출신이었는데,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무용(武勇)으로 안정된 지위에까지 올랐다가 10여 년 후에 속량(贖良)을 바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아전이 되어 조운(漕運)을 하다가 경강 기녀의 꾐에 빠져 쌀을 모두 날리고 말았고, 그 죄를 면하려고 승려가 되었다. 시의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걸에서 먼 고향 산천을 길 따라 가 / 跋履道里山川逖

살던 마을 다시 찾았으나 반나마 폐허였소 / 重尋閭井半丘墟

육친까지 다 죽고 고향 인심은 사나운데다 / 六親死盡鄕風惡

오랑캐 습관 고치기 어려워서 / 慣住蠻夷難習悛

억지로 아전살이 해보았으나 즐겁지 않습디다 / 强隨鴈鶩非心樂

고을에서 공문 받아 봄바람에 조운선 띄워 / 春風領漕受郡牒

쌀 실은 배 돛을 이어 경강에 대었는데 / 白粲連檣京口泊

나루터 기녀는 사람 마음 방탕하게 하여 / 津頭遊女蕩人心

교태 섞인 노래에 천 섬 곡식 다 흩었소 / 一曲嬌歌散千斛

죄 지었으니 구덩이에 떨어질게 뻔한 일 / 自知作蘖落坑穽

어느 곳에 몸을 숨겨 모진 형벌 면하리오 / 何處藏身免金木

궁한 원숭이 화를 피해 산속 깊이 숨듯 / 窮猿避禍入山深

게으른 용 번개 두려워 도망치듯 / 懶龍逃誅畏電迫

깊은 밤 가야산 높은 암자 문 두드려 / 夜叩伽倻絶頂庵

비수로 위협하여 삭발해달랬다오 / 刦以利匕求髡削

잠깐 사이에 일개 승려가 되어 / 斯順化作一和尙

목에는 염주 걸고 몸에는 승복 입었고 / 頭掛串珠身緇服

자취 감추길 설잠(김시습)을 흉내 내어 / 埋蹤已學雪嶽岑

변형을 하였으니 누가 알아보겠소 / 變形誰識靈隱駱.

이 시 속의 노승은 전쟁 때문에 일생의 운명이 뒤틀린 존재다. 심양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를 완전히 병들게 했으며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말았다. 그는 현실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형벌을 모면하려고 불교에 투탁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뒤에 여러 문인들이 전쟁의 상흔과 마음의 고통을 시로 표현하였다.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이 지은 「병자호란 뒤에 박중구(이름 長遠)를 만나(亂後逢仲久)」도 한 예다.306)김득신, 『백곡집(栢谷集)』 책3, 「난후봉중구(亂後逢仲久)」.

뉘 알았으랴,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 誰知此會有

우연히 각기 목숨을 부지하고서 / 偶爾各偸生

낯익은 얼굴이라 볼수록 즐거운데 / 舊面看仍喜

새로 지은 시는 들어보니 더욱 놀랍다 / 新詩聽更驚

대낮에 들판에는 늘 통곡 소리 들리고 / 晝常聞野哭

꿈에도 오랑캐를 피하는구나 / 夢亦避胡兵

중석(仲錫, 이름 張晋) 친구가 유명을 달리했으니 / 錫友幽明隔

어찌 홀로 서글픈 마음 참을 수 있으랴. / 那堪獨悵情

난리 통에 헤어졌다가 지인을 만나서 기쁘지만 대낮의 들판에서 날 통곡 소리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랑캐에게 쫓기는 꿈을 꿀 정도다. 전란이 끝난 오랜 뒤에도 공포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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