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3. 전쟁의 기록과 소설적 변용
  • 전후 소설의 발달과 심리적 치유
심경호

현대에도 그러하듯, 과거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역사 기록을 정리하고, 문물을 복구함으로써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문학은 그러한 치유에 적극적으로 봉사해 왔다. 특히, 전쟁의 역사적 체험은 소설로 수용되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임진록(壬辰錄)』은 한문본과 한글본의 이본이 20여종이나 되는데, 각각 전승 설화를 소설로 구성하면서 다양한 서술 시각을 갖추었다.307)조동일, 「임진록」, 『한국 고전 소설 작품론』, 집문당, 1990 ; 소재영 교주, 『임진록』,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3 ; 소재영·장경남 편, 『임진왜란 사료 총서』 문학 10책, 국립 진주 박물관, 아세아문화사, 2000. 한글본은 완판본(完板本)과 경판본(京板本) 이외에 필사본이 많고, 『흑룡일기(黑龍日記)』라는 제목으로 된 것도 있다. 이 『임진록』은 임진왜란을 승전의 역사로 해석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역사적 사건을 모두 허구적으로 꾸미고 상당수의 등장인물을 가공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러면서 민중들은 결사 항전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가기에만 급급하였다는 사실을 밝혔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육지와 바다에서 왜군을 무찔러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으며, 전후에 사명당(四溟堂)이 왜국에 건너가 항복을 받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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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임진록』
필사본 『임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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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전란을 겪으면서 비판 의식을 지니게 된 민중이 민족과 강토를 수호한 민족 정기를 고취시키고, 당파 싸움으로 외적의 침략 앞에 무너지고 말았던 집권층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다만 한문본은 병사 4만을 이끌고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대주의적 색채가 짙다.

한편, 『임진록』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김응서와 강홍엽을 파견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두 사람은 일본에 쳐들어가지만 매복 전술에 속아 패한다. 김응서의 무술이 뛰어난 것을 보고 왜왕은 화친을 제의하고 공주를 아내로 준다. 그런데 강홍엽이 반심을 품자 김응서는 강홍엽의 목을 베고 자결한다. 김응서의 애마가 주인 머리를 물고 바다를 건너 조선에 돌아와 그의 아내에게 목을 바친다는 이야기다. 완전히 허구이지만 민족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였던 민중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과 보상 심리는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이 지은 『육미당기(六美堂記)』 같은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한문 필사본과 한글본이 전하며, 『옥소기(玉簫記)』·『보타전기(普陀傳奇)』 등의 이본이 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신라 소성왕의 태자 김소선은 퉁소를 잘 불 고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는데, 부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해 보타산에 자죽순을 구하러 갔다가 두 눈을 잃는다. 그런데 유구왕(琉球王) 백문현이 소선을 구출하여, 인품을 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키기로 한다. 백문현이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자 소선은 방황하다가 퉁소 솜씨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어 옥성 공주와 가까워진다. 고국에서 기르던 기러기가 날아와 어머니의 편지를 전하자 소선은 기뻐 눈을 뜨고 부마가 된다. 한편, 백문현의 딸 백 소저는 남장을 하고 한림학사가 된 뒤 적지에 감금되어 있는 소선을 구출한다. 소선은 백 소저를 둘째 부인으로 맞고 귀국하여, 침범한 왜병을 무찌르고 왜국을 토벌하여 왜왕의 항복을 받는다. 소선은 그 뒤 왕위에 올라 처 세 명 첩 세 명과 함께 영화를 누리다가 승천한다. 전체 내용은 『적성의전(赤聖義傳)』이나 『구운몽(九雲夢)』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되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이 중국의 부마가 되었으나 다시 고국에 돌아와 왜국을 토벌한다는 내용을 삽입하여 두었다.308)이본 가운데 국문본 「김태자전(金太子傳)」은 왜왕의 항복을 받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어 일제의 한일 병합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세기 이후에 나온 작자 미상의 『이윤구전(李尹求傳)』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한글 소설인데, 주인공이 왜왕의 항복을 받는 장면이 들어 있다. 곧, 주인공 이윤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가 배가 난파하여 표류하고, 잉태 중인 부인 최씨는 겁탈당할 위기에 빠지지만 몸종 귀선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귀선은 물에 빠졌다가 용왕의 도움을 받고, 최부인은 쌍둥이를 낳고 갖은 고생을 하며 절에서 지낸다. 이윤구는 타국에서 지내다 용왕이 보낸 귀선과 만난다. 이윤구는 왜적의 침입을 알고 용왕이 보내 준 부채·보검·말을 가지고 출전한다. 그러나 위기에 몰리게 되자 최 부인의 몸에서 난 쌍둥이와 귀선의 몸에서 난 쌍둥이가 와서 구출한다. 이로써 부자가 합심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높은 벼슬에 오른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여러 군담 소설(軍談小說)도 반외세 의식과 반성의 정신을 담았다. 『박씨부인전(朴氏夫人傳)』과 『임경업전(林慶業傳)』은 대표적인 예다. 조선 인조 때 박 처사는 딸을 둘 두었는데, 둘째 딸의 배필로 병조 판서 이득춘의 아들 이시백을 맞는다. 이시백은 박 씨가 박색(薄色)이라서 대면조차 하지 않았는데, 박 씨는 시아버지에게 청하여 후원에 피화당(避禍堂)을 짓고 시비 계화와 지내면서 신이한 도술로 남편을 장원 급제시킨다. 박 씨는 3년 뒤 액운을 벗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어 부부가 화목하게 잘 살게 된다. 그 뒤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박 씨는 뛰어난 기상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 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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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초상
임경업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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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가장 문제의 인물은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이었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차단시켰다. 그 뒤 청나라가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조선에 병력 동원을 요청했을 때 수군장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친명배금파인 그는 명나라와 내통해 명나라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1640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1642년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어 청나라로 압송 도중 금천군(金川郡)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해서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하여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청나라 공격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다. 1646년 정명수(鄭命壽)·김자점(金自點) 등이 결탁하여 본국으로 송환시켜 인조의 친국(親鞫)을 받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를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연루시키고, 모국을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장살(杖殺)하였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 소설 『임경업전』은 바로 임경업의 일생을 작 품화한 것이다. 소설 속의 임경업은 명나라의 청병대장이 되어 호국(胡國)을 가달로부터 구하는 전투에 참여한다. 이후 강성해 진 호국은 조선을 침략한 뒤 명나라를 치려고 조선에 출병을 요구했는데, 조정에서는 김자점의 간계로 임경업을 파견한다. 임경업은 명나라와 내통하여 호국을 치려하다가 실패하고 호군에 잡힌다. 그러나 호왕은 임경업의 위엄과 충의에 감복하여 그와 세자 일행을 조선으로 송환시킨다. 임경업이 돌아오자 간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 한 김자점이 그를 암살하는데, 인조는 꿈속에서 임경업의 현신을 보고 그의 충의를 포상하는 한편 김자점을 처형한다. 소설의 내용은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사리사욕을 일삼던 집권층에 대한 민중의 비판과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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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본 『임장군전』
한글본 『임장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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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주생전(周生傳)』, 『최척전(崔陟傳)』, 『남윤전(南允傳)』, 『위경천전(韋敬天傳)』, 『이한림전(李翰林傳)』은 개인의 기구한 인생을 소설로 구성하였다.309)박태상, 『조선조 애정 소설 연구』, 태학사, 1996, 297∼351쪽. 곧 이 소설들은 전란으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재회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주생전』의 남녀 주인공 주생과 선화는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전쟁 때문에 이별의 고통을 겪는다. 『위경천전』, 『최척전』, 『이한림전』의 주인공들은 전란으로 가족과 이별하게 된다. 이 소설들의 등장인물들은 전란으로 헤어진 정인이나 가족을 찾음으로써 정신적 상처를 치유받는다. 곧 일반 민중이 전란으로 겪은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최척전』은 특히 전란에 따른 인간 의식의 황폐화와 가족의 이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임진왜란의 참화를 소설적으로 허구화한 작품 가운데 『달천몽유록(達 川夢遊錄)』과 『피생명몽록(皮生冥夢錄)』은 주인공이 꿈속에서 원혼을 만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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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몽유록』
『달천몽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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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몽유록』은 윤계선(尹繼善, 1577∼1604)이 지은 한문 소설로, 임진왜란이 끝난 지 2년째 되는 1600년(선조 33)에 자기 자신이 몽유자가 되어 전란에 희생된 수많은 군사들의 원통한 영혼들을 달래고자 한 내용이다. 주인공 파담자(波潭者)는 호서 지방을 암행하라는 어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가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1546∼1592)이 크게 패한 바 있는 충주 달천에 이르렀다. 죽은 군사들의 백골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전란의 처참함을 시 3수로 읊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이름 없는 병사의 원혼들이 몰려와 한탄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신립과 원균에게 묻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충절을 지킨 장수들의 공적을 평가했다. 파담자는 꿈에서 깨어나 제사를 지내서 원한을 풀어 주었다.

『피생명몽록』은 작가를 알 수 없으나, 북한에 있는 1626년 필사 기록의 『화몽집(花夢集)』에 들어 있다고 하므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오래지 않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피달(皮達)은 길을 떠나 원적산(圓寂山) 아래에 이르러 노승을 만나게 되고, 임진왜란 당시 서울의 많은 백성들이 피란길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난 뒤 원외(員外) 벼슬을 하는 이극신(李克信)이라는 자가 부친의 뼈를 거두어 후히 장사 지낸 사실도 들었다. 피달은 고개를 넘어 마을에서 묵었는데, 꿈에 이헌(李憲)이 나타나 원통함을 하소연한다. 자기 맏아들인 이극신은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아비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낼 생각을 하지 않기에 자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거듭 이야기해도 듣지 않다가, 세상 사람의 비난을 막기 위해 아비의 뼈를 거두어 장사 지낸다고 나섰다가 다른 사람의 뼈를 잘못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역리(驛吏)였던 김검손(金儉孫)이 나타나, 이극신이 자신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낸 것은 삼생(三生)의 인연에 맞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자기와 이헌의 처는 전생에 고려시대 종의 신분으로 사랑을 나누다가 주인에게 장살(杖殺)당했는데, 이극신은 그때 자기가 낳은 아들의 환생이므로, 이극신이 자신을 장사 지낸 것은 삼생의 인연에 비추어 마땅하다고 하였다. 피달은 전생의 인연보다 차생의 인연이 중함을 들어 설득한다. 김검손과 이헌은 함께 이극신의 사람됨이 탐학함을 비난한다. 피달이 장자(莊子)가 말한 삶과 죽음의 이치로 이헌을 일깨우는데, 절의 종소리와 들의 닭 울음소리에 놀라 깨니 꿈이었다. 이 소설은 중세적 신분 모순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러면서 전란으로 인해 인간의 삶이 더욱 모순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였다.

병자호란의 참화를 원혼의 넋두리를 통해 표현한 소설로는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 있다. 『강도몽유록』의 몽유자 청허 선사(淸虛禪師)는 강도의 연미정을 찾았다가, 병자호란 당시 강도성이 함락될 때 자결하거나 죽임을 당한 여인들의 원혼들을 만나 그들의 넋두리를 하나하나 듣게 된다. 당시 자결한 부인으로는 김류·이성구(李聖求)·김경징(金慶徵)·정백창(鄭百昌)·여이징(呂爾徵)·김반(金槃)·이소한(李昭漢)·한흥일(韓興一)·홍명일(洪命一)·이일상(李一相)·이상규(李尙圭)·정선흥(鄭善興)의 아내와 서평 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첩 모자와 연릉 부원군 이호민(李好閔)의 첩과 정효성(鄭孝誠)의 첩 등이다. 이 밖에 절개를 지켜 죽은 부인은 매우 많았다. 김진표(金震標)는 자기 아내를 독촉하여 자결하게 하였고, 김류의 부인과 김경징의 아내는 며느리가 죽는 것을 보고 따라서 자결하였다. 이 소설은 원혼들의 넋두리를 통해서 병자호란 때 중임을 맡고 있었으면서도 무능하여 강도의 참화를 초래한 자신의 남편이나 자식을 질타한다. 어떤 원혼은 참화의 원인이 강도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진로를 차단하지 못한 도원수 김자점, 의주 부윤 임경업, 유도 대장(留都大將) 심기원 등에게도 있다고 꾸짖었다. 이렇게 원혼들은 자기 자신의 비극을 하소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정 관료와 무장들의 실책을 비판한다. 『강도몽유록』은 원혼들의 넋두리를 통해 병자호란의 원인을 반추하고 참상의 상흔을 치유해 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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