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3. 전쟁의 기록과 소설적 변용
  • 전쟁을 계기로 한 이질적 체험의 기록과 상상
심경호

전쟁은 이질적 체험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매우 확장된 인식을 담은 소설이 출현하였다.

『최척전(崔陟傳)』은 조위한(趙緯韓, 1559∼1623)이 1621년에 지은 한문 소설로 『기우록(奇遇錄)』이라고도 한다. 이 소설은 전란으로 남녀가 이별을 하고 다시 우연한 해후를 하게 되는 과정을 줄거리로 하였는데, 남녀의 유리담(遊離談)은 공간적으로 매우 확장된 이질적 체험을 담고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을 사랑하여 약혼을 하지만, 최척이 전장에 나가게 되자 옥영의 부모는 이웃의 양생을 사위로 맞으려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전장을 벗어나 달려와서 두 사람이 드디어 혼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유재란으로 남원이 함락되자 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최척은 명나라 장군 여유문(余有文)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최척은 항주의 친구 송우(宋佑)와 함께 상선을 타고 안남(安南, 베트남)을 내왕하게 되었는데, 왜국의 상선을 따라 안남에 온 아내 옥영을 우연히 재회하여 다시 중국의 항주로 돌아와 살며 아들 몽선을 낳는다. 몽선이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전한 진위경의 딸 홍도를 아내로 맞고, 이듬해 최척은 명나라 군사로 출전하였다가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다. 포로수용소에서는 강홍립을 따라 조선에서 출전했다가 역시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맏아들 몽선이 있었다. 부자는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고향으로 향하다가 몽선의 장인 진위경을 만난다. 옥영 역시 몽선, 홍도와 더불어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와 일가가 다시 해후해서 단란한 삶을 누리게 된다.

『최척전』의 여주인공 옥영은 강화에서 배를 타고 나주로 피란하였고, 왜적의 포로가 된 뒤에는 장사하는 주인을 따라 배로 민 땅과 유구 지방을 다녔다. 최척은 절강에서 여유문이 죽자 송우를 따라 오월(吳越)로 다니며 비단이나 차를 팔기 위해 상선을 타고 안남을 왕래하였다. 당시 왜국의 상인들이 막부(幕府) 권력과는 별개로 광범한 지역을 상권으로 설정하여 상업 여행을 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부부가 회동한 뒤에도 최척은 다시 명군을 따라 요양에 출전하였다가 포로수용소에서 아들 몽선을 만나 남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항주에 남아 있던 옥영은 배로 그곳을 떠나 무인도에 표박(漂迫)하였다가 순천을 거쳐 남원으로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소설은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수록된 「홍도(紅桃)」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홍도」에는 정유재란으로 헤어졌던 부부가 중국의 절강(浙江)에서 재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유재란의 남원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패한 뒤 남편 정생은 명나라 장수 양원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고, 부인은 왜적에게 잡혀 일본에 가 있다가 상선을 타고 절강에 이른다. 그러다가 정생의 퉁소 소리를 들은 부인이 남편을 알아보고 다시 결합한다. 그 후 정생은 다시 유정을 따라 만주족 군사와의 전쟁에 나갔다가 남원으로 돌아오게 되고, 홍도는 절강에서 바닷길로 가거도를 지나 순천을 거쳐 남원에 이르는 항로를 밟았다고 한다.

또 『어우야담』에 보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던 노인(魯認)과 유여굉(柳汝宏)의 설화가 있다. 이들은 일본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면서 은전을 저축한 다음 배를 사서 탈출할 기회를 엿본다. 마침내 유여굉 등은 대마도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고 노인은 남만(南蠻) 상선을 타고 가다가 중원의 복건에 이르러 초 땅으로 들어가 동정호 악양루에서 놀고 소상강 황릉묘를 지나 소주와 항주의 승경을 보고 황하·양자강으로부터 제·한을 지나 연경에 도달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을 만나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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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일기』
『금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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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魯認, 1566∼1622)의 기록은 오늘날 『금계일기(錦溪日記)』로 남아 전한다. 이 일기는 1599년 2월 22일부터 그해 6월 27일까지의 부분만이 남아 있으나, 노인의 문집 『금계집(錦溪集)』(후대의 석인본)에는 빠진 앞뒤 부분이 남아 있다. 노인은 1597년(선조 30)에 권율(權慄)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8월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간 뒤 1599년(선조 32)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피로(被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이해 3월 일본을 탈출하여 복건 지방에 기착한 다음 다시 장주·흥화 등을 경유, 복건에 도착하여 군문에 본국으로의 송환을 탄원한다. 그 후 7월 복건을 탈출하여 북경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12월에 경성에 귀환하였다.

노인의 이야기는 작자 미상의 한글 소설 『남윤전(南胤傳)』에 일정한 영향을 준 듯하다. 남윤은 단천 부사 이경희(李景熙)의 딸과 혼인을 하는데, 초야를 지낸 이튿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남윤은 포로가 되어서 왜국으로 끌려간다. 남윤은 왜왕의 사위가 될 것을 거절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나, 공주와 하늘이 정한 인연임을 알게 되어 부부의 연을 맺는다. 공주의 덕택으로 왜국을 탈출하여 돌아오는 뱃길에서 공주는 갑자기 투신을 하고, 남윤은 고된 항해를 거쳐 겨우 산동 땅에 내린다. 이후 중국 천자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이조 판서에 오른다.

『남윤전』에 나오듯 소설 속 주인공이 해외 체험을 하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여러 사람들이 외국 체험을 하게 된 사실들을 반영한다. 전쟁이 새로운 체험의 계기를 만들어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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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벽전」
「조완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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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섬(慶暹)의 『표해록(漂海錄)』, 이수광의 『지봉집(芝峰集)』과 『지봉유설』, 정사신(鄭士信)의 『매창집(梅窓集)』, 안정복(安鼎福)의 『목천현지(木川縣志)』, 이지항(李志恒)의 『표주록(漂舟錄)』에 보면, 포로로 잡혀갔던 조완벽(趙完璧)의 이야기가 나온다. 경섬은 1607년 포로 쇄환사(捕虜刷還使)의 부사로 정사 여우길(呂祐吉)을 따라 일본을 방문하여 1,418명을 쇄환하여 왔는데, 그 속에 조완벽이란 인물이 있었다. 조완벽은 일본에 잡혀간 뒤에 노예로 팔려 일본 상선을 타고 동남아 일대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였고, 안남에서는 여러 문사들과 교유하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수광이 지은 「조완벽전」에는 항해 도중에 대룡·청룡(고래)을 만난 이야기, 원양선(遠洋船)에 양식으로 수백 마리의 닭을 싣고 가는 이야기, 머리를 풀고 맨발로 다니는 안남인의 생활 습속 등 당시로서는 기이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은 『염헌집(恬軒集)』에 수록된 「동래양부하전(東萊梁敷河傳)」에서 자기가 57년간 가속으로 데리고 있던 양부하가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체험을 흥미롭게 기록하였다.310)임상원(任相元), 『염헌집(恬軒集)』, 「동래양부하전(東萊梁敷河傳)」. 양부하는 글자를 모를 정도로 무식하여 그의 일생을 임상원이 대신 기술한다고 하였다. 양부하는 12살 때 일본으로 잡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내졌는데, 도요토미는 역관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게 하였다. 양부하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維敬)이 도요토미와 독대할 때 환약을 주어 도요토미를 죽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 뒤 도요토미의 부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대치하다가, 모리의 부하인 대마도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배신하여 도쿠가와가 승리하였다. 양부하는 대마도주의 도움으로 마 침내 부산에 도착하였고, 그 뒤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임상원의 종복으로 살았다고 한다.

임상원은 양부하가 알려 준 일본의 실상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도요토미의 죽음이나 도쿠가와의 집권 과정 등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서군의 영수는 본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였고, 동군이 이긴 것은 모리 데루모토의 친족인 고바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배반하였기 때문이었다. 시마즈는 많은 조선인들을 자신의 영지로 잡아가는 등 조선에 가혹한 짓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배반자로 낙인 찍어 역사적인 악인으로 부각시키려 한 듯하다. 이 「동래양부하전」은 『간양록』 같은 실기에 바탕을 두면서도 상상을 가미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피로인의 삶을 흥미로운 이질적 체험으로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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