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4. 전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전쟁 체험의 내면화와 전쟁 관련 논의의 변화
심경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가운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남원의 양생이란 노총각이 전란으로 죽은 원혼과 혼약을 맺는 이야기다. 양생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만복사의 동쪽 방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밤 부처와 저포 놀이를 하여 자신이 이기면 배우자를 점지해 달라고 청한다. 그 뒤 만복사에 불공을 드리러 온 한 여인을 만나 그녀의 거처로 가서 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그 여인은 2년 전 왜관에서 난을 만나 죽은 처녀의 혼령이었다. 양생은 그 혼령과 더불어 보련사로 가서 제삿밥을 먹고 절 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으나 이튿날 그 처자와 영원히 이별하고 말았다.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380년 무렵 최무선(崔茂宣) 장군의 화공(火攻)에 패배한 왜구들이 호남에 흩어져 노략질을 일삼을 때다. 이 소설 속의 남녀는 전란 때문에 애정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전쟁은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을 파괴하고 애정 실현 의지를 방해하는 악으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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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초상
김시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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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한글 소설 「정광주피란록(鄭廣州避亂錄)」은 예술적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독특하여 주목된다.314)이채연, 「정광주피란록(鄭廣州避亂錄)의 임란 수용 양상」, 『수련 어문 논집』 23, 수련 어문학회, 1997.

이 소설의 주인공 정생(鄭生)은 꿈과 이인(異人)의 가르침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리란 것을 알지만 조정에 알리지 않고 오직 자기 가족의 재액을 막고자 하였다. 정생은 함흥 판관을 비롯해 몇 군데의 고을 수령을 맡아서 10년 동안 피란 생활에 대비한 재산을 모은 다음 가족을 이끌고 백학동에 은둔하 였다. 그러다가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播遷)하자, 정생은 그곳으로 날아가 음식을 드린다. 평양성 탈환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로 들어가자 정생은 이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날아갔다.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위해 10만의 양병을 모집하여 출정식을 하고 있었는데, 정생은 술과 음식에 독약을 뿌려 왜군 2만을 죽인다. 정생은 가족과 함께 환도하여 강원 감사가 되었고, 아들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는 보신주의와 방관주의의 관점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전화를 피할 수 있는 예견력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소설이 나왔을 것이다.

한편, 전쟁에 관련된 인물의 평가는 설화나 시가, 소설 속에서 고정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 당사자와의 친소 관계, 당색(黨色) 여부에 따라 변형되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은 특히 여러 설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거론되었다.315)김정녀, 「신립 전설의 문학적 형상화와 환상적 현실 인식」, 『어문 논집』 48, 민족 어문학회, 2003.

신립은 병력의 부족, 전쟁 준비의 미흡, 지배 체제의 모순 등으로 인해 패전하였다. 하지만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책략 없고 무모한 장수였다고 비판하였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1785년에 신립의 역사적 사실을 「조령(鳥嶺)」이란 시로 회상하였는데, 이 시에서 그는 신립이 천연의 요새인 새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탄금대에서 무모하게 배수진을 쳐서 패배를 자초하였다고 단죄하였다. 한편, 그보다 앞서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였다는 사실만 전하면서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金汝沕)과 그 하인의 충성심을 이야기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 뒤 『대동기문(大東奇聞)』, 『기문총화(奇聞叢話)』, 『계서야담(溪西野談)』, 『청구야담(靑邱野談)』 등의 야담집도 유몽인과 유사한 관점에서 신립 설화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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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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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 설화에도 신립의 탄금대 전투를 다룬 것이 많다.316)『한국 구비 문학 대계』에 19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한국 민속 종합 보고서 : 충청북도편』에 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 문화재 연구소 민속 예능 연구실 편, 『한국 민속 종합 보고서 : 충청북도편』, 문화 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1976). 신립 전설은 탄금대와 충주 지역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분포하였다. 그 설화에 따르면 신립이 패전한 이유는 원귀가 해코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립은 여행 중 산속의 한 과부 집에 머물었다가 밤에 괴물과 대적하여 괴물의 소원을 들어주고 과부를 살려 주었다. 다음날 여자가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지만 신립이 청을 거절하자, 여자는 지붕 위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타 죽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신립이 조령에 진을 쳤을 때 그 여자의 귀신이 나타나서 탄금대로 진을 옮기라고 한다. 탄금대로 진을 옮긴 신립은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결국 패해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문헌 설화 집 『양은천미(揚隱闡微)』에 실려 있는 「충장공 신립이 덕을 버려 음보를 받다(申忠壯棄德被陰報)」와 주제가 같다.317)정명기·이신성 공역, 『양은천미(揚隱闡微)』, 보고사, 2000, 160∼168쪽. 『양은천미』의 편찬 연대에 대해서 이신성은 자료집에 수록된 이야기의 내용을 토대로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1907년에서 고종이 승하한 1919년 사이로 추정하였다.

민중은 신립의 패전 원인을 신립 개인의 인간적 결함에서 찾아 원귀 작란설(寃鬼作亂說)을 만들어내었다. 전쟁이 실패한 원인을 개인적인 문제로 전환해서 패배의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318)설성경, 「임진왜란 체험의 설화화 양상」, 『임진왜란과 한국 문학』, 민음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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