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7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 제5장 전쟁의 기억과 반성
  • 4. 전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영웅 사관의 형성
심경호

전쟁의 경험은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마음을 낳는다. 또한 그 경험이 몇 세대에 걸쳐 유전하면서 영웅 사관을 형성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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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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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坵, 1211∼1278)는 「철주를 지나면서(過鐵州)」324)김구, 『지포집(止浦集)』 권1, 「과철주(過鐵州)」. 이 시는 작자가 스스로 단 주(注)에 고종(高宗)이라는 묘호를 사용하였으니, 고종 이후에 지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에서 대몽고 전쟁을 겪은 뒤 민족 영웅이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 시는 1231년(고종 18)에 몽고의 살례탑(撒禮塔)이 함신진(咸新鎭)을 빼앗으려고 철주를 공격하였을 때 수령 이원정(李元禎)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자 창고에 불을 지르고 처자도 불 속에 들게 한 다음 자결한 사실을 소재로 하였다. 이 역사 사실은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회고와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김구의 시만큼 반침략 정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민족 영웅의 출현을 갈망한 시는 흔하지 않다.325)심경호, 「한시와 역사」, 『한국 한시의 이해』, 태학사, 2000, 17∼18쪽 ; 심경호, 『한시 기행』, 이가서, 2005, 60∼62쪽.

지난날 모진 외적이 국경을 침략하여 / 當年怒寇闌塞門

사십여 고을이 들불 붙듯이 차례로 무너질 때 / 四十餘城如燎原

산 등진 외로운 성 적의 유린 막았으니 / 依山孤堞當虜蹂

무수한 적군이 입맛 다셔 삼킬 듯이 덤볐어도 / 萬軍鼓吻期一呑

얼굴 맑은 선비가 이 성을 지켜 / 白面書生守此城

나라에 몸 바치길 터럭보다 가벼이 했었네 / 許國身比鴻毛輕

어질고 신망 있어 민심을 다잡아 / 早推仁信結人心

장사들 환호하길 하늘땅 뒤집을 기세 / 壯士懽呼天地傾

맞싸운 보름 동안 해골 주워 밥솥하고 / 相持半月折骸炊

밤낮을 싸워서 용사들도 지치고 말았다 / 晝戰夜守龍虎疲

힘이 부쳤지만 여유를 보이자고 / 勢窮力屈猶示閑

누대에서 관현 울려 그 소리도 구슬프더니 / 樓上管絃聲更悲

돌연 창고에서 불길이 일어나 / 官倉一夕紅焰發

처자와 더불어 선뜻 제 몸 태웠도다 / 甘與妻孥就火滅

의롭고 장한 혼백 어디로 간 것일까 / 忠魂壯魄向何之

고을 이름만 부질없이 철(鐵)이라 하다니 / 千古州名空記鐵.

마지막에서 ‘부질없이(空)’라는 허사(虛詞)에는 이원정 같은 영웅이 분투하였는데도 여전히 몽고의 간섭을 받고 있는 현실을 통분해 하는 심경이 드러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연작 영사 악부인 『해동악부(海東樂府)』를 지으면서 민족 영웅의 사적을 여럿 다루었다. 그 가운데 강감찬의 공적을 심약팔영체(沈約八詠體)로 노래한 「금화팔지가(金花八枝歌)」가 있다.326)이익, 『성호전집(星湖全集)』 권1, 「해동악부(海東樂府)」, 「금화팔지가(金花八枝歌)」. 각 연은 강감찬이 거란을 치고 개선하자 현종이 그를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여 금화팔지를 꽂아주기까지의 일을 4단 구성으로 읊었다. 그 중심연은 다음의 4개 연인데, 거기에 각각 2·3·4·2연씩을 첨가하였다.

봉황이 단혈서 나니 / 鳳凰出丹穴

문채 나고 위엄 있어라 / 旣文且威武

나쁜 새가 발톱과 부리로 못살게 굴며 / 爰有惡鳥爪嘴厲暴

고갯마루 숲에 제 무리를 모았지 / 呼群引醜盤嶺之藪

큰 깃발 날리며 행진해 오니 / 班師振族大旗還

온 백성 다투어 춤추었다네 / 萬姓歡呼爭鼓舞

아침엔 병거(兵車)에 말을 점검하고 / 朝典午於笠轂

저녁엔 재상부에 정사를 보았도다 / 暮調鼎於相府.

안정복은 이익의 악부에서 빠진 것을 보충하여 악부체 5장을 짓는다고 하였으나,327)안정복, 『순암집』 권1, 「관동사유감효악부체오장」. 역사관은 이익과 달랐다. 이익은 역사의 흐름을 예악의 성쇠와 연관시켜 일원적으로 체계화하였지만, 안정복은 전쟁사를 기술하여 역사 발전이 세력들 사이의 대립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드러내었다. 안정복은 악부체 5장 가운데 「옹산성장가(甕山城將歌)」에서 삼국을 정통(正統)이 없는 시기로 보는 고대 사관을 드러내었다. 또한 한(漢)나라와 고조선의 전쟁(「成己歌」), 신라와 백제의 전쟁(「甕山城將歌」),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泉城行」),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弩士行」), 신라와 일본의 전쟁(「白馬塚行」)을 재해석하였다. 「천성행(泉城行)」은 나당(羅唐) 전쟁 때 설인귀와 싸워 이긴 문훈(文訓)의 일을 소재로 삼아 당나라와 맞서 싸운 신라의 국세를 칭송하였다.328)안정복, 『순암집』 권1, 「관동사유감효악부체오장」, 「천성행(泉城行)」.

설인귀 / 薛仁貴

당나라 명장 / 唐名將

한 번 싸워 요동을 취하고 / 一戰取遼東

두 번 싸워 평양을 공격하니 / 再戰擊平壤

승전하는 형세를 당할 수 없었다 / 戰勝攻取勢莫當

요하 동쪽에는 견고한 성루 없거늘 / 遼河以東無堅壘

어찌 천성에서 한 번 싸움에 패하였던가 / 如何泉城一戰走

쥐 같은 문훈의 재주는 비할 바 없었으니 / 如鼠文訓之才無與比

문훈의 재주만 비할 바 없었던 게 아냐 / 不特文訓之才無與比

이 시기에 신라의 기운이 일어날 참이었다 / 此時新羅應運起

군주 현명하고 신하 어질어 비할 나위 없었거늘 / 主賢臣良無可竝

당 황제가 분노하여 군대를 내었나니 / 唐皇忿兵故乃興

자고로 망국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고 / 自古亡國必有釁

그런 뒤에 적을 이길 재능을 떨치는 법 / 然後敵人奮才能

진(秦)의 호해가 실덕하자 항적이 용맹을 부렸고 / 胡亥失德項籍勇

오(吳)의 부차가 황음하자 범려가 지혜를 발휘했다 / 夫差思荒范蠡智

내 말이 노망 아니라 정말로 이러하니 / 我言非耄信如此

아아 후세의 군주는 이 말을 명심하시라 / 嗚呼後辟當念記.

안정복은 국난의 시기에 호걸(豪傑)이 더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호걸이 출현하지 않도록 국가의 안녕질서를 공고히 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과거의 전쟁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보편적 현상과 대비시키면서 감계의 언어를 덧붙인 것이다.

홍양호는 민족사의 사실이나 각 지방의 구비 전승을 소재로 삼아 시를 즐겨 지었는데, 그 가운데는 영웅의 사적을 칭송한 것이 많다.329)진재교, 『이계 홍양호 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9. 「적도가(赤島歌)」나 「괘궁검(掛弓劍)」은 태조 이성계의 왜적 격퇴 사실을 찬미하였다. 청천강에서는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을 예찬하여 「살수를 건너면서 느낀 점이 있어(渡薩水有感)」를 지었다. 용만(龍灣,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에서는 임경업 장군의 애국적 활동을 회상하고 「새벽에 용만을 출발하여 정오에 백마산성에서 점심을 먹고 임경업 장군의 영당에 배알하고 즉흥적으로 짓다(曉發龍灣午炊于白馬山城拜林將軍慶業影堂口占)」를 남기거나, 양만춘의 안시성 승리를 회고하여 「백마산성에 올라 요동과 계주 지역을 바라보면서(登白馬山城望遼薊)」를 지었다. 낭자점(娘子店)이란 곳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대패하여 길마저 잃어버렸다는 구비 전승 을 듣고, 「계명사가(鷄鳴寺歌)」를 지어 당 태종을 초라한 패장의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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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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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임명대첩가(臨溟大捷歌)」, 「시중대(侍中臺)」, 「함평관(咸平關)」 등에서는 북방의 영토 분쟁과 관련하여 큰 공적을 세운 인물들을 다루었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최영유(崔永濡)가 1361년 홍건적의 난을 만나 암벽에 혈서를 쓰고 못에 관인을 던지고 자결하였다는 전설을 토대로 「투인담(投印潭)」을 지었다. 경기도 이천의 쌍령(雙嶺)을 지날 때는 병자호란 때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애국 인물들의 사적을 회상하고 「쌍령의 옛 전장을 지나면서(過雙嶺古戰場)」를 지었다.

홍양호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에 이르는 동안의 역대 명장들을 대상으로 삼아 1794년(정조 18)에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을 편찬하였다. 그 서문에서 홍양호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무력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거늘, 조선시대에 와서는 한번 임진왜란을 당하자 한꺼번에 팔로(八路)가 와해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오랑캐의 말굽 아래 강토가 유린되어 불과 수십 일 안에 국가의 운명을 구걸하기에 이르렀다.”고 개탄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조국을 수호한 양장용졸(良將勇卒)의 분전 사실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홍경래도 후대에 이르러서는 민중적인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즉, 1861년에 나온 작자 미상의 한글 소설 『신미록』은 홍경래를 적도(賊盜)로 보던 관변 측의 시각과 달리 홍경래군의 사적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하였고, 가산 군수 정씨와 기생 연홍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였다. 그 뒤 홍경래의 이야기는 한글 소설과 한문 소설로 거듭 허구화되었다. 한문본으로는 현상 윤(玄相允, 1893∼?)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홍경래전」과 정교(鄭喬, 1856∼1925)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홍경래전」330)이우성·임형택, 『이조 한문 단편』 하, 일조각, 1982, 119쪽.이 있다. 한글본으로는 1917년 신문관본 「홍경래실기」, 연대 미상의 세창서관본 「홍경래실기」가 있다. 「홍경래실기」에 이르러 홍경래는 영웅으로 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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