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1. 다양한 돈들의 부침
  • 비금속 상품 화폐의 성장
이헌창

삼국시대에는 금속 화폐의 유통이 위축된 반면, 비금속 상품 화폐가 성장하였으나 그 과정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료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유물로 확인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때에 수도의 물가가 베(布) 한 필에 벼 30석 혹은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대(聖代)라고 하였다.4)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2, 태공춘추공(太公春秋公). 여기서 주된 화폐는 쌀이 아니라 베였다. 일반 베는 삼베이고 고급 베는 모시인데, 삼베가 주로 화폐로 기능하였다. 요사이라면 쌀 한 가마에 돈 몇 만 원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동전이 보급된 조선 후기까지도 돈의 기본 단위인 1전 또는 1냥에 쌀 몇 말 몇 되라는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돈의 구매력을 나타내면서 물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물가 표현 방식과 다르지만, 주된 화폐인 베가 가치 척도였고, 주식인 쌀이 대표 물가인 셈이다. 벼 또는 쌀은 베 다음으로 중요한 화폐였다. 베·쌀 등의 비금속 화폐는 외부 교역의 화폐로 기능하기 어려워 전적으로 내부 교역용이었다.

옷감으로 쓰기 어려울 정도로 조악한 삼베인 추포(麤布)가 교환 수단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비금속 화폐의 성장을 잘 드러낸다. 고려 성종은 996년 철전(鐵錢)을 주조하였고, 그를 계승한 목종이 1002년 철전의 원활한 통용을 위해 추포를 금지하였다.5) 『고려사』 권79, 식화(食貨)2, 화폐조. 이것은 추포가 철전의 보급을 위협할 정도로 교환 수단으로 널리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014년 삼사(三司)에서 물가가 등귀하여 추포 1필 값이 쌀 8말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건대,6) 『고려사』 권79, 식화2, 시고조(市估條). 10세기 이전부터 추포는 가치 척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 후에도 위정자들이 저화(楮貨)·동전을 통용하고자 할 때면 그 보급의 중요한 장애물로 추포를 들고 그것을 금지하곤 하였다. 추포의 금지는 화폐 통용책을 저해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391년(공양왕 3)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보고에도 드러나듯이, 정부는 옷감으로 사용하기 어렵고 내구력이 약하여 빨리 망가지고 물가의 등귀를 낳는 추포의 단점을 고려하였다. 이러한 수차례 금령에도 불구하고 추포는 동전이 보급되기 직전인 17세기 전반까지 화폐로 널리 기능하였다.

비금속 상품 화폐의 성장을 낳은 기본 요인은 내부 교역의 성장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내부 교역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뚜렷한 실체를 드러내었다.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인 신라의 수도에서는 490년 처음 상설 시장이 열려서 사방의 물화가 유통되었으며 509년에 동시(東市)가 개설되었고 695년에는 다시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열렸다. 대도시, 나아가 교통의 요지에서는 상인이나 일반 인민이 모여들어 교역한 다음 흩어지는 저자가 열렸다. 행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기도 했는데, 「정읍사(井邑詞)」는 행상을 떠난 남편의 신변을 걱정하는 아내의 애틋한 심정을 담고 있다.

쌀과 삼베는 생산이 증대하고 조세 부과의 대상으로 중시됨에 따라, 화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였다. 삼국·통일 신라에서 수취한 현물 조세의 주종은 쌀과 삼베였다. 가내 수공업은 19세기까지 공업 생산의 지배적 형태였고, 그 중심을 이룬 것은 직조(織造) 수공업이었다. 삼국시대 전기에 이미 바디, 북 등의 직조 도구를 사용하여 삼베나 비단을 짜는 기술은 널리 퍼져 있었다. 직조 수공업이 성장함에 따라, 삼국은 삼베·비단·명주실을 조세 부과의 대상물로 삼았다. 삼베는 고려시대까지 옷을 만들어 입는 주된 재료였다.

12세기 전후에는 주(州)와 현(縣)의 관아(官衙) 부근에서 한낮에 시장이 열렸는데, 그곳에서의 화폐 사용 실태를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습속에 상설 점포가 없고 다만 한낮에 정기시(定期市)가 열려 남녀노소, 관리, 공기(工伎)들이 각기 소유한 바로써 교역한다. 화폐(泉貨) 제도가 없어 오로지 모시와 은병(銀甁)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고, 일상용품 중 사소 한 물품으로 모시 1필이나 은병 1냥에 못 미치는 것은 쌀로 소량을 계산하여 치른다. 그런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습속에 안주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7) 『고려도경(高麗圖經)』 권3, 무역(貿易).

서긍이 화폐 제도가 없다고 본 것은 송나라처럼 주화인 동전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은병이 사용된 이후로는 가장 고액 거래의 매개 수단은 은화, 그 다음은 모시, 가장 소액은 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주된 거래 수단은 삼베였다. 14세기에 직물로 만든 포화(布貨)가 더욱 성장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삼베에 의한 조세 납부가 확대되고, 삼베가 재정 비축물로서 부족해진 은화를 대체하여 갔던 점을 들 수 있다.8) 須川英德, 「朝鮮前期の貨幣發行とその論理」, 『錢貨―前近代日本の貨幣と國家』, 靑木書店, 2001, pp.193∼194.

1356년(공민왕 5) 고려 정부의 논의에서 은화를 본위화로, 5승포(五升布)를 보조화로 써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부의 관점이고 민간에서는 오히려 포화가 화폐로 더욱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403년(태종 3) 사헌부(司憲府)에서 닥나무 종이로 만든 저화를 화폐로 사용하기를 청하면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삼베가 중심적 화폐였다고 보고 추포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오직 우리나라가 멀리 바다 모퉁이에 있어서 스스로 토산물로 화폐를 삼아서, 삼국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삼베를 화폐로 삼아 5승포를 썼다. 처음에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고, 물건을 살 수 있어, 포화의 소재 가치가 명목 가치와 다르지 않아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간사한 행위가 날로 늘어서, 삼베가 5승에서 3승으로 변하니, 여자가 포화를 짜기 쉬워 시세가 헐해졌다.9)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8월 을해.

1승은 80가닥이니, 5승포는 실 400가닥으로 폭 8촌을 짠 삼베를 말한다. 3승 이하의 포를 추포라고 불렀다. 15세기 전반에 무명이 널리 보급되 어 삼베를 대신하여 주된 옷감으로 등장하면서, 물품 화폐의 주종도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었다. 1428년경에는 삼베가 포화의 주종을 이루었지만, 1445년경에는 모든 거래의 가격은 무명으로 결정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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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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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와 무명은 교환의 매개 수단과 가치 척도로 원활히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무명을 많이 가진 부자도 5만 필을 넘지 않았는데, 연산군 재위 시절(1495∼1506) 최고 재력가인 재상 윤필상(尹弼商)과 상인 심금손(沈金孫)은 각각 무명 5만 필을 쌓아 두었다 한다.10) 조신(曺伸), 『수문쇄록(謏聞瑣錄)』

1527년에는 서울의 부유한 상인 등이 각각 무명 2만 5천 필을 출자하고 동업을 하면서 행상을 부리고 밀무역에 종사하다 적발되었던 것을 보면, 무명은 자본으로 전화될 수 있었다.

직물을 법정 화폐로 삼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1356년의 화폐 논의에서 은화를 본위화로, 관인(官印)을 찍은 5승포를 보조화로 삼자는 논의가 대두하였다. 조선 초기에 저화와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정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정부는 1459년 주포(紬布, 비단)·면포·정포(正布)의 사용을 허가하였다. 1460년에 완성, 공포된 『경국대전』 호전(戶典) 국폐조(國幣條)에는 포·저화를 국폐로 통용한다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표준적인 포화는 폭 8촌(37.4㎝), 길이 35척(16.35m)인 5승면포였다. 정포 1필=상포(常布) 2필=저화 20장이고, 저화 1장=쌀 1되라는 공정 가격도 기재되었다. 국폐인 포·저화에는 5%의 세금을 거두고 관인을 찍기로 하였는데, 생업에 바쁜 백성들이 포화에 관인을 받지 못해 처벌을 받는 일이 많아 관인을 찍 는 조치는 1462년 폐지되었다.11) 이 때 각 지방 관청에 배부된 ‘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이라는 관인의 도장이 18세기에 남아 있었음을 『이재란고(頤齋亂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비금속 화폐 경제가 성장하였다. 포화가 영세민의 소규모 거래 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1470년대부터 그 승척(升尺)의 감소가 나타났다. 승수(乘數)가 감소하여 5승포 대신에 3·4승포가 통용되고 심지어 2승포까지 출현하였다. 척수도 35척에서 30척으로, 나중에는 20척으로 줄었다. 승수와 척수에 따라 포화의 교환 가치가 비례적으로 정해졌다. 특히 2승포는 교환 수단 외에는 풀어서 실로 활용하지 않는 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추포였다.12) 1650년 동전 통용책의 추진을 위해 추포를 금지하면서 그것을 다시 옷감으로 짜기를 명하였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효종 원년 7월 30일). 그래서 조선 정부는 그 통용을 금지한 적도 있지만, 영세민에게 줄 타격을 우려하여 통용을 묵인하였다. 16세기 서울에는 2승포를 자른 단포(端布)를 가지고 식량을 구입하는 영세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다.13) 송재선, 「16세기 면포(綿布)의 화폐 기능」, 『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6. 유형원은 17세기 전반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1·2승 포화가 유통됨을 언급하였다. 추포는 지방의 농민에 의해서도 이용되었지만,14) 홍우원(洪宇遠), 『남파선생문집(南坡先生文集)』 권7, 소(疏) 응지봉사(應旨封事). 서울 등 상업이 번창한 지역에서 특히 활발히 유통되었다.

포화가 가치 척도인 만큼, 포화의 조악화는 물가의 등귀를 낳는 것으로 우려되었다. 서울·경기 지역 면포 1필당 쌀값이 1450년 이전에는 5두였는데, 1481년 이후 3두이고, 1524년 이후 2두이다가, 1545년 이후 1승으로 폭락하였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락하였다. 이것은 상대 가격의 변화에도 기인하지만, 주로는 포화의 조악화, 달리 보면 추포의 가치 척도 기능 강화에 기인하였다.15) 이정수, 『16세기 물가 변동과 민(民)의 동향』,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1997.

칼 멩거(Karl Menger)는 제값을 받고 손쉽게 팔 수 있는 상품이 화폐가 되며, 그 점에서 귀금속이 가장 우월하다고 보았다.16) K. Menger, On the Origin of Money, Economic Journal, June 1892. 이러한 이점인 ‘saleableness’는 화폐의 발생기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근대 한국의 내부 교역에서 쌀·삼베·무명의 이러한 이점은 금속보다 우월하였다. 게다가 이것들은 주된 옷감과 식량인 데다가 조세 부과의 대상이기도 해서 그 자체로 사용 가치가 높았던 점에서 금속 화폐가 가지지 못한 결정적인 이점을 지녔다. 쌀보다는 삼베가 내구성과 분할에서 이점이 더욱 크고, 삼베보다는 무명의 내구성에서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비금속 물품 화폐로는 무명, 삼베, 쌀의 차례로 선호되었다. 무명과 삼베는 승수에 따라 가치를 신축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무명·삼베가 화폐로 유용하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가 금속 화폐로 그것을 대체하려는 정책이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지폐와 금속 화폐의 통용을 추진할 때마다 추포를 금지하였고, 때로는 포화 전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쌀과 옷감은 비금속 상품 화폐로 활용되었으나 비단이 옷감으로 된 화폐의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에서는 비단이 고액 거래 수단으로 쓰였지만, 화폐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한국에서 원격지·고액 거래가 두 나라에 비해 덜 활성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추포가 활발히 유통된 것 같지는 않다. 추포가 7세기 이상 활발히 유통된 것은 한국 화폐사의 중요한 특성이다. 이것은 물품 화폐가 특히 성행하고, 그 사용 습관이 뿌리 깊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 왜 이러한 비금속 상품 화폐가 금속 화폐로 대체되었을까? 정부가 금속 화폐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멩거도 지적하였듯이, 화폐는 사회적 제도의 산물이며 국가가 법을 통해 만들 수 있지 않다. 쌀과 옷감은 내구성이 약하여 저장하기 어렵고, 특히 휴대와 운반이 힘들어 대규모·원격지 거래에 불편하다. 거래 규모가 커지고 원격지 거래가 성장할수록 비금속 화폐의 불편이 더욱 커져 결국 금속 화폐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국가가 주화 제도를 통해 충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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