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1. 다양한 돈들의 부침
  • 고려시대 은화·지폐의 제한적 유통
이헌창

한반도에서 정부가 화폐를 최초로 발행한 시점은 언제일까? 고조선이 일화전과 명화전을 주조하였다는 학설이 있고, 『해동역사』는 신라에 두 종류의 무문전이 있었다 했는데,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996년(성종 15)에 철전을 주조하여 유통시키려 하였던 사실은 『고려사』에 나오므로, 이때를 주화가 발행된 최초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확대보기
고려시대 최초의 철전-앞면
고려시대 최초의 철전-앞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고려시대 최초의 철전-뒷면
고려시대 최초의 철전-뒷면
팝업창 닫기

중국 주변에서 그 화폐 제도를 모방한 나라 가운데 일본은 700년 이전, 베트남은 970년에 처음 주화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700년 이전에 주조된 부본전(富本錢)이 발굴되었고, 708년 이후에는 본격적 통화로서 화동개진(和同開珍)부터 시작하여 황조십이전(皇朝十二錢)이 차례로 주조되었다. 일본은 7세기 초부터 중국의 율령 제도를 도입하여 8세기에 율령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월남은 935년에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다. 이들보다 국가 건설이 훨씬 앞서고 중국 제도의 도입에 더욱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던 한국이 중국 주화 제도의 도입을 가장 늦게 시도하였다면, 그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이전에 주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기에, 기록으로 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려사』는 996년(성종 15) 처음으로 철전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둥글고 네모 구멍이 난 조그만 동전은 기원전 4세기 중국에서 출현하여 그 주변 지역에서도 모방되었는데, 철전은 둥근 모양에다 줄로 꿸 수 있었던 점에서 같은 디자인이었다. 둥근 것은 하늘을, 네모는 땅을 상징하였다. 당시 금·은 이외의 금속을 모두 철로 호칭하는 관행이 있으므로, 이것이 동전일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고분에서 철을 소재로 한 주화가 출토되었으므로, 이것은 문자 그대로 철전으로 보인다.17) 최호진, 『한국화폐소사』, 서문당, 1974, p.23. 철전은 원활히 통용되지 않았다. 997년 왕위에 오른 목종은 철전 유통의 활성화를 위해 추포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자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이 상소를 올려 “추포의 사용을 금지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하시니 이것은 나라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한갓 백성들의 원망만 불러일으킬 따름입니다.”고 비판하였다. 이 충고 에 따라 목종은 1002년 근본인 농업을 중시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돈 통용을 막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그래서 차(茶)·술·음식을 파는 상점들에서 매매하는 데는 이전같이 철전을 쓰게 하고 그 이외에 백성들이 자기네끼리 매매하는 데에는 토산물을 자유롭게 쓰도록 하였다.18)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고려 정부가 법적 강제력을 제거한 철전은 오래지 않아 유통계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이 1020년에 주·현(州·縣)의 노인과 병자들에게 술·음식·포화를 나누어준 것을 보면, 고려 정부는 이미 철전이 아니라 삼베를 화폐로 인식하고 있었다.

숙종은 1097년에 주화를 발행할 방침을 정하고 주전관(鑄錢官)을 설치하였다. 1101년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국민들이 동전을 사용하는 이익의 유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아뢰었으나, 동전은 활발하게 통용되지는 않았다.19)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그래서 1102년에 해동통보(海東通寶)라 새겨진 동전 15,000관(1貫은 동전 1,000개)을 관료와 군인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인 개성에 점포를 설치하여 그 통용을 촉진하기로 하였다. 1104년에는 주·현들에 명령하여 술과 음식을 파는 상점을 열어 지방민들에게 동전의 유용성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1106년(예종 원년)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신하들이 숙종 때의 동전 통용책이 잘못이라고 하였다. 1112년 예종은 그에 반박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통용책을 지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동전 통용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송나라 사신인 서긍은 “고려에서 다른 재화는 모두 물물 교환을 하지만 시장에서 약(藥)만 동전으로 거래한다.”고 하였다.20) 『고려도경』 권16, 약국(藥局).

1101년에 숙종의 조서에 의하면 금은은 국가의 보배인데 간사한 백성이 동과 섞어 도주(盜鑄)를 하니 나라의 지형을 본뜬 은병(銀甁)을 만들고 표인(標印)을 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21)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조선시대에 도주란 불법적인 주화 제조를 의미하였다. 이 기사로 보건대, 은병을 만들기 전부터 칭량 화폐인 은화가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은병은 중량이 1근이고 은과 동을 5 대 1로 배합하여 만들었는데, 민간에서는 활구(闊口)라고 불렀다. 은병은 통화로 정착하여 서긍의 관찰에 의하면, 주·현에서 은병은 유통되지만 동전은 유통되지 않았다.

확대보기
중국 전래 동전-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
중국 전래 동전-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당나라의 건원중보(乾元重寶)
당나라의 건원중보(乾元重寶)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송나라의 순화원보(淳化元寶)
송나라의 순화원보(淳化元寶)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송나라의 지화통보(至和通寶)
송나라의 지화통보(至和通寶)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송나라의 치평원보(治平元寶)
송나라의 치평원보(治平元寶)
팝업창 닫기

각지에 산재한 고려시대 고분에서 당나라와 송나라의 동전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동전도 발굴되었다. 고려의 동전보다 중국, 특히 송나라의 동전이 훨씬 많았다.22) 최맹식, 「고려 동전의 효용성에 대하여―유적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중재장충식박사화갑기념논총』 상 역사편, 1992. 송나라가 1199년 고려와 일본에 동전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것을 보면 송나라 동전(宋錢)이 고려에 얼마나 많이 유입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356년의 논의에서 동전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화폐로 정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면 고려 정부가 주조한 동전뿐만 아니라 송나라 동전도 화폐로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송나라 동전은 탑 건립의 공양물(供養物), 무덤의 부장물(副葬物) 등으로 사용하였다. 고려 정부는 송나라 정부가 선물한 동전을 모두 창고에 저장하였다가 때때로 꺼내 관료에게 보여 주면서 즐겼다고 서긍이 기록하였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은화를 발행한 뒤로는 청나라 말기까지 은화를 주조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고려 정부가 은화를 주조한 사실은 흥미롭다. 소액 주화인 동전은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였으나, 은화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은병 사용의 두 가지 문제점을 인식하였다. 첫째, 은병의 중량이 1근(600g)이나 되어, 가치가 너무 높았다. 1282년에는 물가 안정을 위해 은병 1개의 쌀값을 개성에서는 15∼16석, 지방에서는 18∼19석으로 기준을 삼고 경시서(京市署)에서 풍흉에 따라 조정한다는 방을 내붙였다. 이듬해에는 쌀 20석에 해당하던 은병의 시세를 10석으로 개정하자, 상인들이 거래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전대로 되돌렸다. 물가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결정하였던 것이다. 1356년 화폐에 대한 정부의 논의에서 은병 하나 의 값이 베 100여 필이나 되어 백성의 매매에 불편하니 또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정리되었다.

이처럼 은병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쇄은(碎銀)이 화폐로 지정되어 사용되었다. 쇄은은 무게를 달아 가치가 평가되는 칭량 화폐였다. 그런데 동을 섞어 품질이 나빠진 쇄은이 나타나자, 1287년에는 통용을 금지하였다. 그래도 쇄은 통화의 생명은 끝나지 않아서, 1356년 정부의 논의에서 쇄은으로 은병의 무게와 대비하여 화폐로 삼았다. 가치 척도는 은병이지만, 쇄은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1331년부터 소은병(小銀甁)을 주조하여 유통시켰는데, 그 시세는 5승포 15필에 해당하였다.

확대보기
쇄은
쇄은
팝업창 닫기

둘째, 은병을 포함한 은화는 동을 섞은 위조품을 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은병이 처음 주조된 숙종 연간에 이미 위조가 계속 성행하여 은병의 가치가 하락하였다. 은병에 함유된 구리량이 갈수록 많아짐에 따라 값이 떨어져 1328년 상품병(上品甁)은 베 10필, 첩병(貼甁)은 베 8∼9필로 시세를 정하였으나, 사람들이 그마저 따르지 않았다. 1356년 정부의 논의에 의하면, 소은병의 위조도 성행하여 은병인지 동병(銅甁)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품질이 조악해졌다.

확대보기
소은병
소은병
팝업창 닫기

쇄은과 소은병이라는 소액 은화의 출현은 은화 유통의 성장을 보여 준다. 은 함량의 감소와 위조의 성행은 은화의 공급 부족뿐만 아니라 수요 증가를 반영하기도 한다.

주조되지 않은 은과 금도 화폐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96년 중찬(中贊) 홍자번(洪子藩)은 “재정 지출에는 금·은이 중요하나 산출하는 곳이 없으니 관청 각 부서의 행역(行役)과 새 로 임명된 고을 관장들의 행역으로 거두어들이는 물건들 가운데 3분의 2를 금·은으로 받아 재정을 보충하자.”고 제안하였다.23) 전병무, 「고려 공민왕대 은화주조론(銀貨鑄造論)의 대두와 그 성격」, 『북악사론(北岳史論)』 6, 1999, p.98. 금·은이 국가 지불 수단으로 활용되면 화폐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려사절요』에는 12세기 후반에 은 35근과 은 12근으로 집을 사고판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의하면 소사잠(小絲蠶) 비단 1필의 시세는 은 10냥으로 정해져 있었다. 1362년 11월에 쌀 4말의 값이 포 1필에 해당하였는데 금·은의 값은 떨어져서 어떤 때에는 금 1정(錠)이 쌀로는 5석, 6석에 상당하기도 했던 바, 중앙과 지방에서 모두 그러한 형편이었다.

1101년 은병이 주조되기 전부터 고려 말까지 은화는 지속적으로 유통되었고, 12세기에 은화의 유통은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앞서 서긍의 글에도 드러나듯이, 그것은 고액 거래용으로서 주·현 이상의 도시에 국한되어 유통되었고, 원격지 유통에 주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지배층을 포함한 부유층만이 사용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도시 규모가 작았고 은을 매개로 하는 국제 무역이 활성화되지 않았으므로 은화의 유통 기반은 협소하였음이 틀림없다.

은 공급의 부족은 은화의 유통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어왔다. 은이 송나라의 비단, 유목 국가의 말 등 수입품의 대가로 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14세기에는 국내의 은 생산이 위축되었다. 은이 부족한 이슬람 세계가 송·원나라로부터 은을 활발히 수입하는데, 그 여파로 중국은 고려의 은을 흡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 간섭기에는 은화의 유통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존재하였다. 공물 약탈 및 원나라 지폐인 보초(寶鈔)가 수입 대가로 지불되어 은의 양이 크게 줄어들었다. 은화의 소액화와 위조 성행은 은의 공급 부족을 반영할 터이다. 이러한 가운데 보초가 은화 유통을 대신하게 되었다.

1347년에 화폐 부족은 과거 문제로 출제되었다. 이곡(李穀)은 책문(策文)에서 고려 화폐 제도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확대보기
공민왕릉
공민왕릉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에는 옛날에 동전 통용법은 없고 오직 은화(銀幣)만 사용하였다. 제도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라, 은화가 날로 가벼워져 지금은 폐지되어 통용되지 않는다. 근래 재정이 점차 고갈되고 민생이 점차 곤궁해지는 것은 은화가 폐지된 때문이 아닌가.24)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권1, 책문(策文).

1356년 정부의 논의는 칭량 화폐로 은화가 유통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간관(諫官)은 “지금 은 1냥의 가치가 삼베 8필이니, 관에서 은화를 주조하여 표지(標識)를 하고 무게의 경중에 따라 옷감과 곡물의 표준 가격을 정하면, 은병보다 주조하기 쉬우면서 유통하는 데에 덜 힘들고 동전보다 운반하기가 가벼우면서 이익이 많이 나므로 모두에게 편리합니다.”라 하여, 은화를 주조하여 화폐로 삼자고 아뢰었다.25)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이 건의가 채택되었는지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공민왕릉에서 동국통보(東國通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라는 우리식 표현의 은화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주전되었다는 견해가 있다.26) 전병무, 앞의 글, p.98. 그런데 기록에서 추적되지 않는 것을 보면 주조되었다 해도 다량 주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화 는 조선 왕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유통이 두절된 것으로 보이나 조선 전기까지 국제 무역을 위한 기본 결제 수단인 국제 화폐로 기능하였다.

송대에 지폐가 발명되었고, 원대에는 그것이 유일한 화폐로 인정받았다. 원 간섭기 고려에는 보초가 원나라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국내에 들어와 통용되었다. 원나라는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는 보초를 신속히 보급하였다. 보초는 1270년대부터 고려에 유입되었다. 1287년 원나라로부터 황제의 조서와 더불어 보초가 와서 통용되었는데, 지원(至元)보초와 중통(中統)보초를 1 대 5의 비율로 하여 자모(子母)로 삼았다. 모는 본위 화폐를, 자는 보조 화폐를 가리킨다. 보초는 약 10만 정이 유입되었다 한다. 은으로 구입되기도 했고, 원나라 황제가 하사하기도 했고, 원나라가 불교 행사 등의 비용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확대보기
지원보초
지원보초
팝업창 닫기

유입된 보초의 상당량은 원나라와 교역하는 데에 결제물로 사용되었다.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할 때에 보초를 가져와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水軍)에 나누어주었다. 보초는 왕의 중요한 하사품이었다. 보초는 민간에도 산포되어 개인이 그것으로 지출을 하고 절에 시주하기도 하였고, 절을 단장하는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다. 전근대에 중국만이 안정된 불환 지폐를 발행하였는데, 그 밖에 지폐가 제한적이나마 상당한 기간 유통된 곳은 고려 외에 찾기가 어렵다.

이때 보초가 민간에 거의 유통되지 않았더라면, 1391년 이후에 저화를 화폐로 채택하는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간에 매우 원활하게 유통되었더라면, 원의 간섭이 끝났다고 해서 쉽사리 소멸되지는 않았을 터이고, 1391년 이래의 저화 통용책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지 는 않았을 것이다. 보초는 원나라의 보증 때문에 유통될 수 있었고 국내 거래에는 이전의 은화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상층부에서 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원나라는 1277년부터 동전 통용을 금지하면서 지폐만 사용하자, 대량의 동전이 유출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자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 동전이 보급되고, 그럼으로써 시장이 발달하였다. 그런데 원 간섭하의 고려에는 동전 대신 지폐가 들어왔다. 원 간섭기의 은화 유출과 보초 유통은 이후 은화 유통의 두절과 조선 초 지폐 유통책의 강행을 초래함으로써 화폐 발달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전근대에 중국 외에 조선보다 지폐 통용책을 활발히 추진한 나라를 찾기는 어려운데, 그 실패는 화폐 통용책에 무거운 부담을 안겼다.

1356년(공민왕 5)에 은화와 관인을 찍은 삼베를 화폐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지폐를 포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원나라에서 지폐는 1350년경 이후 신용을 상실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고려에서도 지폐의 유통이 위축되었을 것이다. 둘째,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추구한 공민왕대에 신용을 상실한 원나라 지폐를 사용하지 않는 방침이 쉽게 도출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이유로 원나라의 간섭이 끝나는 공민왕대에 보초가 국내 유통계에서 사라졌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