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2. 화폐 정책과 화폐 사상
  • 조선 전기 지폐·주화 통용책의 좌절
이헌창

고려시대에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주화·지폐 통용책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17세기 중엽까지 실패를 거듭하였다. 한국만큼 정부의 화폐 통용 정책이 여러 번 좌절을 겪은 나라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27) 조선 전기 화폐통용책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는 이종영, 『조선 전기 사회경제사 연구』, 혜안, 2003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의 건국을 목전에 둔 1391년(공양왕 3)에 화폐 제도의 수립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민간에서는 5승포가 화폐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나아가 2∼3승의 추포도 화폐로 기능하였는데, 추포는 내구성이 약하고 옷감으로 사용하기 어렵고 물가 등귀를 낳은 문제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둘째, 공민왕 시절부터 화폐와 같은 이권은 국가가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대두하였는데, 새로 건국한 조선은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이러한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에 입각하여 화폐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고려 후기에 위정자들이 가장 통용하고 싶었던 화폐는 은화였다. 은화는 200년 이상 국내에 유통되었던 데다가 국제 화폐로도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화가 줄어들어 화폐로 기능하기 어렵게 되었다. 은화 다음 으로 선호된 화폐는 지폐, 곧 저화였다. 저화는 송·원나라에서 통용된 바 있을 뿐만 아니라 원 간섭기에는 국내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화는 저렴하게 원활히 공급될 수 있었다. 1391년 동전의 주조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은과 마찬가지로 동도 공급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고려시대에 동전의 통용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민간이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1391년 저화를 발행하고 5승포와 함께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시도는 이듬해에 중단되었다.

14세기 중엽 은화·지폐가 통용되지 않게 된 이후에 처음으로 화폐 통용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군주는 조선의 태종이었다. 1401년(태종 원년)에 하륜(河崙)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폐 기관으로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이듬해 정월에 저화를 발행하여 통용시켰다. 저화 1장=5승포 1필=쌀 2말로 공정 가격을 정하고 5승포의 사용을 일절 금지하였다. 정부가 이러한 강력한 저화 통용책을 추진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태종 때에 이권재상론이 전면에 부상하였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가 통용되지 못하고서는 인민은 이권이 군주에게 있는 것은 알지 못하므로, 태종은 이권을 행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저화의 발행을 추진하였다. 명나라 태조가 저화의 통용을 추진한 것도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저화의 태환 보증책(兌換保證策)을 마련하였으나, 지역적으로 제한되고 일시적으로 추진되었을 따름이다. 시장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당시에 민간이 저화를 불신한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엄중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저화의 가치는 줄곧 하락하여, 1402년 9월에는 저화 1장으로 쌀 1말도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서울의 빈민, 하급 관료, 군인 등이 식량을 마련하기 어려워 곤경에 빠졌다. 이에 정부는 5승포 금지령을 내린 지 약 2개월 만인 9월에 철회하였다. 5승포의 사용이 허용되자 저화는 전혀 통용되지 않게 되었고, 1403년 9월에 서섬서를 폐지하였다. 민간이 소유하고 있던 폐지된 저화를 정부가 마땅히 변상 해야 하나,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저화 제도의 폐지가 논의될 즈음에 태종은 나라에 이롭게 하려다가 백성의 원망만 샀다며 생전에 다시 저화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1410년(태종 10)에 다시 저화 통용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번에도 5승포 금지령과 아울러 저화 1장=쌀 1말, 30장=무명 1필로 공정 가격을 정하였다. 서울과 개성에 화매소(和賣所)를 세워 간헐적으로 태환을 보증하고자 하였다. 지방에 저화를 보냈으나 태환을 보증하는 곳은 없었다. 민간이 저화를 불신하자, 정부는 일부 조세 등을 저화로 납부할 수 있게 하고 녹봉과 포상금을 저화로 지급하였다. 화폐를 정부 지불 수단으로 인정하는 방안은 이후 화폐 통용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저화 유통이 원활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는 자에 대한 형벌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1411년에는 시중에 5승포가 있는지 수색도 하였는데 민심만 소란하게 하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저화 가격이 폭락하여 저화로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자, 1412년에는 도시 영세민을 위해 소액의 미곡 거래에는 저화 사용을 허용하였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은 저화가 사용되지 않고 쌀과 삼베만 거래 수단으로 기능하여, 1415년에는 지방에서도 포화의 사용을 허용하였고, 곧이어 서울에서도 그것이 묵인되었다. 그와 동시에 화폐로 통용되는 옷감에 대해 30분의 1 상당액의 저화로 착세(着稅)를 징수하였다. 그러면서 소액 착세의 징수와 소액 거래의 편의를 위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였지만, 동전이 통용되면 저화가 쓸모없어진다는 반대가 강하였다. 이러한 우려대로 동전을 발행하기도 전에 저화 가치가 폭락하여 동전 발행 정책을 포기하고 저화 제도를 계속 시행하였다. 1415년과 1416년에 연이어 심각한 가뭄이 들어 저화로 납부하는 세금을 감면하고 포화로 대납하는 조치를 취하자, 국가 지불 수단으로서 용도가 축소된 저화의 가치는 더욱 하락하여 1장에 쌀 2되에 불과하였다. 대흉년이 든 1422년 말에는 저화 3장으로 쌀 1되를 살 정도로 가치가 폭락하였다. 민간에서 저 화를 기피하자 강압적인 통용을 추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1422년에 동전 사용론이 제기되었으나, 저화 제도는 태종의 성헌(成憲)이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1423년 더욱 심각한 흉년이 닥치자, 세종은 포화 교역을 인정하고 나아가 동전을 겸용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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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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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년 이래의 철전 통용책과 1097년 이래의 동전 통용책이 실패한 이후 정부는 한동안 그 정책을 다시 추진할 수 없었다. 동전 원료의 부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저화 통용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 보완책 또는 대안으로 동전 발행론이 부상하였다. 1423년(세종 5)의 동전 발행 결정은 실행되어 당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본으로 삼은 조선통보(朝鮮通寶)를 1423년부터 이듬해까지 12,537관(貫)을 주조하여 1424년부터 통용하였다. 원래 저화 1장을 동전 2푼으로 교환 비율을 정했던 것 같으나, 집권층의 예상대로 동전 발행 후에 저화가 전혀 통용되지 않자, 정부는 저화 1장을 동전 1푼으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서울 부자들의 견해도 수렴하여 동전 1푼의 공정 시세를 쌀 1되로 정하였다. 그런데 동전의 소재 가치로 보면 쌀 1되는 동전 9.7푼 정도여서 명목 가치와의 괴리가 심하였다. 저화와 달리 동전을 즐겨 사용할 것이라는 위정자의 예상과 달리 민간이 동전의 사용도 기피하여 1425년 5월 동전 3푼으로 쌀 1되를 살 수 있었다. 6월부터는 소액 거래에서 허용된 포화의 사용마저 일절 금지하였는데, 특히 영세민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동전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였다. 결국 정부는 동전의 가치를 시장에 맡기고 소액 거래에서의 포화 사용을 다시 허용하였다. 그러면서 이전의 저화 통용책에서처럼 정부의 각종 수납에 동전을 사용하는 정책을 마련하였으나, 동전 발행량이 적어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동전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는데도 동전 외의 돈으로 교역하는 것을 엄금하는 정책은 원성을 크게 낳아 1426년 포화의 사용을 허용하였다. 그 후 정부가 저장한 쌀 등을 시세대로 동전으로 구입하는 정책을 추진하였 으나, 동전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여 1427년 1월에는 쌀 1되가 동전 7∼8푼, 9월에는 12∼13푼이었다. 명목 가치가 소재 가치 이하로 떨어지면서 동전은 일본으로 밀수출되거나 유기 등의 재료로 쓰였고, 그 때문에 동전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동전은 소재 가치 정도의 명목 가치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세종은 1438년 국내에서 원료가 생산되는 철전을 만들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민심에 따라 5승포를 사용하게 하는 주장에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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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폐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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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이 소재 가치 이하로 평가되자 밀수출과 유기 제조로 사라져 유통량이 결핍하였다. 동전 통용책이 재정적 손실만 초래하자, 1445년 정부는 저화제를 부활하고 동전의 발행을 중단하면서 공정 시세를 저화 1장=동전 50푼=쌀 1말로 정하였다. 동전은 점차 소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저화는 기피되고 마침내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1458년에는 포화의 사용을 허용하였다. 저화 제도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부국강병책을 추구한 세조는 1464년에 철전의 일종인 전폐(箭幣)의 발행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화살촉 모양의 전폐는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태종·세종·세조에 이어 성종 때에도 1472년(성종 3)부터 저화 통용책이 다시 강구되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저화 가치가 폭락하자 1473년에 신저화를 발행하여 구저화를 회수하였고 신화의 발행을 가능한 억제하였다. 저화가 희소해지자 1489년경에는 저화 가치가 공정 시세를 상회하기도 하였으나, 정부는 저화를 발행하지 않았다. 1512년(중종 7)에 호조 판서 장순손(張順孫)은 “저화 제도가 『경국대전』에 실려 있지만 근래 폐지되어 전혀 쓰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저화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계산 단위로서 활용되었음은 노비와 토지의 매매 문서에서 엿볼 수 있다.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보급되기 이 전의 경지나 노비의 매매 문서에는 법전에 규정된 정가 지불 방식대로 무명 몇 필 또는 저화 몇 장을 가격으로 기재한 다음 실제로 지불된 곡물·옷감·가축 등을 제시한 경우가 많다. 중심적인 화폐인 무명으로 값을 정하는 사례가 일반적인데, 노비 매매에서는 저화로 값을 정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경주의 양동 손씨(良洞孫氏)는 1626년에도 노비 1명을 저화 3,000장과 무명 34필로 값을 정한 다음 소 1마리, 말 1마리 및 양질의 표준 무명 14필을 지급한 노비 매매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28) 이수건 편저, 『경북지방 고문서 집성』, 영남대출판부, 1981.

15세기는 세종 때의 21년간을 제외하고 저화제의 추진으로 일관하였다. 그에 반해 17세기에는 동전의 추진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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