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2. 화폐 정책과 화폐 사상
  • 왜 정부는 화폐를 발행하였던가
이헌창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여 통용하려는 동기는 부민이국론(富民利國論)과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으로 집약된다. 전자는 화폐의 효능을 설명하는 사상이며, 후자는 화폐 관리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화폐는 백성과 나라를 동시에 부유하게 하는 이로운 물건이므로 필요하며, 이러한 이권은 국가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 고대에서 원류를 가지며 『관자(管子)』에 이미 나오고 있다. 부민이국론은 유가적 성격을, 이권재상론은 법가적 성격을 가진다. 유교와 법가 사상은 중화 세계의 통치 이념으로 절충을 이루었듯이, 화폐 사상에서도 절충을 이루어왔다.

부민이국론과 이권재상론 중에 더욱 근본적인 것은 전자였다. 고려 중기에 주화 통용책을 천명하여 화폐 발행 사상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는 1102년 숙종의 교서에서부터 이것이 드러난다.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데(富民利國)에 동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서·북의 송나라과 요나라에서는 동전을 사용한 지 이 미 오래나 우리나라에서만 아직 실행하지 않고 있다.29)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이곡이 1347년의 책문에서 “근래 재정이 점차 고갈되고 민생이 점차 곤궁해지는 것은 은화가 폐지된 때문이 아닌가.”라고 한 것도 돈을 부민이국의 수단으로 본 것이었다. 화폐 통용책의 동기가 백성과 나라에 모두 이롭기 때문이라는 것은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공통적이었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식화 2, 화폐조 첫머리에다 “화폐 제도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우선할 일이니, 그로써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하고 백성의 재력(民力)을 여유 있게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효종 때에 동전 통용책을 강력히 추진한 김육(金堉)은 그 동기를 “옛 성인이 만든 법제를 천하가 통행하는데 우리 동방에만 쓰이지 않고 있으므로, 그 법을 시행하여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裕國便民)”라고 밝혔다.30) 김육(金堉), 『잠곡유고(潛谷遺稿)』 권6, 「청령호병조동의행전사차(請令戶兵曹同議行錢事箚)」. 김육과 같은 시대에 동전 통용책을 역설한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그것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고 여유롭게 한다(國富民裕, 富國便民)고 인식하였다.31) 유형원(柳馨遠), 『반계수록(磻溪隨錄)』 권4, 전제후록 하(田制後錄下) 전폐(錢幣) ; 권8, 전제후록고설 하(田制後錄攷說下) 전화(錢貨).

화폐 통용책이 나라와 백성에 모두 이롭다는 확신은 고려 숙종의 교서에도 나타나듯이 중국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화폐 사용에 관한 현실 관찰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록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었다. 후자에는 유학자가 현실을 이해하는 관념인 경세관이 담겨 있었다. 예종 때에 화폐 통용책을 반대한 사람들은 야만적이라 인식한 요나라가 사용한다는 논거를 제시한 반면, 예종은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그것을 물리쳤다. 화폐가 선진 문물이라는 인식은 화폐 통용책의 중요한 논거였던 것이다.

그러면 화폐 통용책의 추진자들은 백성과 나라에 유용한 화폐의 기능을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보았던가? 고려의 숙종은 “평양에서는 민간 풍습이 상업에 힘쓰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잃으니 유수관(留守官)은 화천 별감(貨泉別監) 2명을 내신, 임명하고 날마다 시장을 감독하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교역의 이익을 얻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32) 『고려사』 권79, 식화2, 화폐조. 즉, 화폐의 가장 기본 기능인 교환 수단으로 강점을 가진 주화를 통용하여 상거래의 활성화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숙종은 다른 왕들보다 적극적인 상업관을 가졌고, 이것이 적극적 주화 통용책의 낳은 한 배경을 이루었다. 고려 성종의 주화 통용책도 상업 중시관의 뒷받침을 받았다. 상거래가 활성화되면 백성이 부유해지고, 그러면 나라에도 이로운 점에서, 부민을 통한 부국의 도모라는 유학의 기본 정신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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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진영
대각국사 의천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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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제도에 대한 숙종의 뛰어난 인식은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힘입었을 것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구법(求法) 활동을 하고 돌아온 후에 중형(仲兄)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에게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동전을 주조하기를 건의하면서 이점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다섯 번째의 지면은 없어졌는데, 나머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금속 화폐인 쌀보다 운반 비용이 절감된다. 둘째, 백성에게 하늘과 같은 식량을 절약하여 빈민을 구제할 수 있다. 셋째, 쌀을 화폐로 사용하면 품질과 중량을 속이는 행위가 빈발하나, 동전의 사용은 그러한 사기를 막을 수 있다. 넷째, 동전은 운반에 편리하고 풍흉에 따라 공급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쌀과 포보다 국가 지불 수단으로도 우월하니,33) 일반적으로 국가가 주화를 발행하는 동기는 민간 거래의 활성화뿐만 아니라 조세 징수와 지출 관리의 효율화에도 있다. 조세로 징수되고 세출로 활용되는 화폐의 기능을 국가 지불 수단이라고도 한다. 녹봉의 반을 동전으로 지급하자. 다섯째, 동전은 저장 수단으로도 우월하다.34) 의천(義天),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12. 조선시대 말까지도 비금속 화폐에 비한 금속 화폐의 이점을 이처럼 종합적으로 잘 설명한 글은 찾기 힘들다. 의천의 사상은 송나라의 발달한 화폐 경제와 화폐 사상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의천은 국가 지불 수단으로서의 이점도 중시하였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숙종의 교서에서는 그 점이 잘 확인되지 않는다.

1391년 방사량(房士良)은 화폐가 교환의 편의를 도모하는 매개 수단임을 명확히 지적하고 쉽게 마모되는 추포 대신에 내구성이 강한 금속 화폐를 지폐와 더불어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건의하였다. 그해 도평의사사의 건의에는 추포가 내구성 문제뿐만 아니라 운반의 불편, 물가 등귀의 폐단을 낳는다고 지적하였다.

1356년의 논의는 이권재상론을 천명한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권재상론이란 사주(私鑄)를 금지하고 화폐 발행권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이다. 이권재상론의 강조는 국가가 발행하거나 공인하지 않는 화폐의 금지를 낳았다. 고려 성종·목종 때부터 추포를 금지하면서 주화를 만들었으니, 사실상 이권재상론이 어느 정도 관철된 셈이었다. 1356년의 논의에서는 은화의 민간 주조(私鑄)가 이권재상론에 어긋나므로 관청에서 은화를 만들어 표식을 하여 본위화로 유통시키고, 보조화로 유통할 5승포에도 도장을 찍자고 하였다. 이권재상론이 강조된 조선 초에는 화폐 통용책을 추진하면서 포화 전반을 금지하였다. 주화인 동전을 화폐로 사용한 조선 후기에 국가는 화권재상론(貨權在上論)을 중앙 정부가 동전 주조를 독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여, 동전 주조권을 중앙 정부, 그 중에도 호조에 집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조선 초에 부상한 이권재상론은 화폐 제조 이익을 통한 재정 확충책과 결부되어 있었다. 1391년 도평의사사는 저화 발행을 건의하면서 그 수익으로 군사비와 자연 재해의 대처 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태종 때에 하륜은 나라에 소용되는 물화를 저화로 사들이고 백성이 나라에 바치는 세금을 미곡으로 받으면 나라가 부유해질 것이라며 저화제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태종은 화폐란 무용한 물건을 유용한 물건으로 바꿀 수 있는 이익의 원천으로 보았다. 세종대에 동전을 발행하면서 소재 가치와 크게 괴리된 공정 시세를 정하였다. 조선 초에 정부는 무명에 도장을 찍어 법화로 사용하려고 할 때에도 화폐 발행 이익을 의식하여 10% 세를 거두고자 하였다.

이권재상론을 제기한 동기는 화폐 제조 이익의 장악뿐만 아니라 국가 지불 수단이자 경제의 혈맥인 화폐를 통해 재정, 곧 국가적 재분배 체제를 정비하려는 것이었다.35) 이권을 이종영(『조선 전기 사회경제사 연구』, 혜안, 2003, p.138)은 국가의 물자 조달과 상업 이익의 지배로 보았고, 須川英德(「朝鮮時代の貨幣」, 『越境する貨幣』, 靑木書店, 1999, p.90)은 시장 가치의 창출, 가격 조작 및 물류(物流)의 장악으로 보았다. 화폐는 조세 징수, 정부 지출, 재정의 파악과 기획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 제조권의 장악은 분권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여 국가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 국가적 재분배 체제의 정비는 바로 통치력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에는 친원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보초나 사주 은화가 아닌 국가가 주조를 독점한 화폐를 통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에 이권재상론에 입각하여 주화와 지폐를 발행, 통용하려고 했던 것은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1403년 사헌부는 저화 제도의 시행을 요청하면서, 국가가 발행한 화폐를 사용해야 이권이 군주에게 있음을 백성이 알게 된다고 하였다.36)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8월 을해.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권재상론이 부상하여 가장 활발히 거론된 까닭은 국가 통치력의 강화가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이었다.37) 숙종대에는 화폐의 효능 중에 ‘부민’이 먼저 기재되었으나 이권재상론이 부상한 후부터는 ‘부국’이 앞으로 나왔다.

소재 가치와 명목 가치의 괴리가 큰 화폐를 통용할 수 있을수록 이권재상, 나아가 왕권을 더욱 뚜렷이 과시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국가 기강의 견고함을 보여 주며, 주전 수입을 통해 재정의 증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1756년 영조의 전교(傳敎)는 “무릇 화권(貨權)은 성세(盛世)에는 위에 있고 쇠세(衰世)에는 아래에 있으니, 만약 기강이 굳건하면 모래를 돈으로 삼기를 명하더라도 인민이 따를 것이다.”고 하였다.38) 『탁지지(度支志)』 외편(外篇) 권2, 시전(市廛) 전교(傳敎) 영조 32년 10월. 그렇다면 이권재상론은 지폐의 통용과 특히 깊은 관련을 가진다. 태종이 소재 가치가 거의 없는 저화를 통용하고자 한 것은 왕권 과시책으로 보인다. 1403년 사헌부는 명나라가 지폐 제도만은 원나라를 계승한 것은 이권재상의 취지를 계승하였다며 주목하였다.39)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8월 을해. 원 간섭기에 소재 가치가 거의 없는 지폐를 통용해 본 경험이 공민왕 때에 이권재상론이 대두한 배경으로 보인다. 1391년부터 지폐인 저화를 통용하고자 하면서 이권재상론이 부상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부가 동전을 통용하고자 했을 때에는 주전 이익을 중요한 동기로 삼지는 않았다. 동의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동전 주조로부터 이익을 얻기 어려웠다. 원료가 비싸져도 동전을 저화처럼 무용한 물건으로 보는 위정자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교환 가치는 비싸도 사용 가치가 적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아담 스미스(Adam, Smith)처럼 사용 가치가 낮지만 교환 가치가 높은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역설을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화폐의 이권은 상업 이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따라서 억상관(抑商觀)이 강할수록 상업 이익을 국가가 관장하고 통제하려는 이권재상론이 더욱 강조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이권재상론이 부상한 것은 억상론의 강화와 관련이 있다. 당시 신흥 사대부층은 권세가의 상업 활동이 국가 기강을 약화시킨다고 보았으므로, 이권재상에 의한 민간 상업의 규제는 집권화를 강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려 숙종 때에는 상업중시론이 이권재상론을 잠복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억상 관념이 특히 강한 영조가 이권재상론을 특히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에 동전을 화폐로 삼고자 하고 점차 억상관이 완화되면서, 이권재상의 동기는 약화되고 부국이민의 취지에서 동전 통용책을 추진하려는 동기가 더욱 부상하였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백성과 더불어 이익 다툼(與民爭利)을 경계하는 맹자의 주장을 충실히 수용하여 국가가 상업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경계하였지만,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고자 한 것은 그 이권의 막중하고도 특수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들은 돈이란 원래 아무런 쓸모가 없으나 유용한 재화와 바꿀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불로 소득의 원천을 민간에 넘길 수 없었다. 게다가 “돈이란 위에서 천하의 이익을 조절하고 재화가 막힌 것을 구제하는 수단이다.”고 인식하였으므로 국가가 관장해야만 했다. 즉, 화폐는 국가 지불 수단이 되고 나아가 경제의 혈맥인 만큼, 국가가 그 발행을 장악하여 주전 이익으로 국가의 중요한 임무인 기근 대책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간에 방임하면, 물품 화폐가 성행하여 의식(衣食)의 자원이 부족해지고 무용한 추포가 만들어져 자원의 낭비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인식되었다. 유형원은 이권재상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국가가 천하의 이익을 관장하는 것이지 독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40) 유형원, 『반계수록』 권4, 전제후록 하 전폐 ; 권8, 전제후록고설 하 전화. 이권재상론은 실제로는 인민의 복지에 반할 수 있다. 소재 가치와 명목 가치가 괴리된 화폐의 발행은 조세를 징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까지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나오지 않았다. 경제 지식이 부족하고 군주제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민주적 정치체제를 지향하기 이전에는 이권재상론에 숨겨진 갈등적인 요소가 충분히 인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권재상론은 대내적으로 국가가 화폐 발행권을 관장하거나 사주(私鑄)를 금지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였는데, 그에 파생된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화폐 자주권을 수호하는 의미도 가졌다. 그래서 중국 화폐의 수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그것이 일시 허용되더라도 국가가 장악하였다. 민간이 화폐를 자유롭게 수입한다면, 이권재상의 내실이 없는 것이다. 공민왕이 원나라 보초를 폐지한 것은 원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1742년(영조 18) 박문수(朴文秀)가 동전이 부족하니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다수의 대신과 영조는 화권(貨權)이 둘이 되고 심지어 그들에 넘어가는 폐단을 들어 금지하였다. 1792년(정조 16)에는 정조가 중국 돈 수입을 허락하자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는 화폐 주권에 침해된다며 반대하였다.41) 『영조실록』 권55, 영조 18년 6월 신유 ; 『정조실록』 권36, 정조 16년 10월 갑신. 조선시대에 김육이 화폐 통용책을 시도하면서 중국 화폐를 수입한 적이 있었고, 당백전(當百錢) 폐지로 화폐 공급이 부족한 1868년에 중국 화폐를 수입하였으나, 이러한 일은 예외적이었다.42) 원유한, 「이조 후기 청전(淸錢)의 수입·유통에 대하여」, 『사학연구』 21,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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