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1장 비금속 상품 화폐 시대의 돈
  • 3. 화폐 통용책 좌절의 원인
이헌창

조선 전기까지 주화·지폐 통용책의 부진이나 실패를 낳은 요인은 무엇인가?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도 많다. 그 성과를 결정하는 일반적 요인으로서 화폐 수요 기반인 시장의 수준, 특정 화폐의 사용 습관과 그에 관한 신뢰 및 그 적절한 공급을 들 수 있다. 화폐의 적절한 공급과 그에 대한 신뢰는 정책에 크게 좌우된다.

화폐의 존립을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수요의 존재이다. 시장 거래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물물 교환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상품을 거래의 매개 수단으로 삼게 된다. 화폐의 소재 가치가 명목 가치와 완전히 일치할 때에는, 달리 말해 화폐의 교환 가치에 맞먹는 사용 가치를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을 때에는 그 상품을 화폐로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 금·은이든 쌀이든 옷감이든 화폐로 사용하는 관습이 축적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화폐는 교역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시장 거래의 성장은 대규모 거래나 원격지 거래에 더욱 편리한, 곧 거래 비용을 절감하는 화폐로의 변천을 요구하여 화폐 제도의 발전을 낳았다. 비금속 상품 화폐의 약점으로 인해 시장 거래가 성장하면 금속 화폐가 요청된다. 금속 화폐 중에도 정부가 제품의 표준화를 보장하는 주화가 칭 량 화폐보다 거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주화보다는 지폐가 발행 비용과 운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더욱 유용한 화폐가 먼저 출현하지 않았을까? 금속 가공 기술과 지폐 제작 기술의 진전을 기다려야 했으나, 그런 기술이 나오고 나서도 한참 지난 후에 금속과 지폐가 화폐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화폐로 유통되는 데에 난점이 존재함을 말해 준다.

금속 화폐의 통용을 힘들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공급의 부족을 들 수 있다. 금속 화폐의 공급이 부족하면 그것을 화폐로 사용하는 습관이 발생하기 쉽지 않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금속 화폐의 통용을 늘 제약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둘째, 동은 유기 등의 원료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쌀이나 옷감과 달리 즉각적으로 처분하기 어렵다. 즉, 동전은 사용 가치를 즉각 누릴 수 없다. 금·은은 늘 귀금속으로 수요가 있다는 점에서 동에 비해 이점을 가졌다.

주화의 통용에는 새로운 난관이 발생한다. 만약 이전에 화폐로 사용한 습관이 없는 금속을 주화로 만든다면, 화폐 사용 습관을 변경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정부의 강한 추진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돈을 만드는 당국이 주전 이익을 노려 화폐의 소재 가치를 낮추어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보유자의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부의 신뢰가 없으면 주화가 통용되기 어렵다.

1634년(인조 12) 인조는 천하의 모든 나라가 금속 화폐를 사용하는데 조선에서만 그러하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하고 탄식하였다.43) 『인조실록』 권30, 인조 12년 10월 계사. 사실 조선처럼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가 17세기 전반에도 주화의 통용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려시대에 철전·동전의 통용책은 실패하였으나 은화의 통용책은 제한적 성과를 거두었다.

화폐 통용책이 1678년(숙종 4) 이후 성과를 거둔 반면 그전에 실패한 기본 요인은 시장 성숙도의 차이였다. 1473년(성종 4)에 신숙주(申叔舟)는 “서 울 외에는 상점이 없으므로, 비록 화폐가 있다 해도 쓸모가 없다.”고 진단하고 “화폐를 계속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은 서울과 각 지방에다 상점을 개설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교역하게 하는 일밖에 없다.”는 처방을 제시하였다.44) 『성종실록』 권27, 성종 4년 2월 임신. 김육의 강력한 동전 통용책이 난관에 부딪힌 1654년(효종 5)에 이경여(李敬輿)는 백성에게 잉여 재산이 없어서 교역이 활발하지 못하고 동전이 쓸모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에는 민간이 동전의 통용을 요청하여 1678년 동전 통용이 실현되었다.

시장과 화폐 경제의 매우 완만한 성장은 한국 전근대 경제사의 특징이라 할 만하다. 왜 시장이 완만히 성장하였을까? 첫째, 한국은 반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외 교역은 기복이 심하여 대부분의 시기 동안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둘째, 집권 국가 체제가 발전하여 재정, 곧 국가적 재분배 체제를 통해 물자 유통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는데, 현물 재정은 시장을 통한 물자 유통을 대체하여 위축시켰다. 특히 집권 국가 체제를 정비한 조선은 재정 통합을 진전시키고 토산물을 공물로 납부하는 조세 비중을 높임으로써 현물 재정을 더욱 강화하였다. 대외 교역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현물 재정 위주로 재정을 통합한 크지 않은 나라에서 시장이 역동적으로 발전하기는 어렵다. 쌀과 옷감이 조세 등 국가에 대한 지불 수단의 주종으로 됨에 따라, 화폐로서 강고한 지위를 획득하여 금속 화폐가 뿌리 내리기 더욱 힘들었다. 그에 반해 분권적인 사회의 경제적 통합에는 국가적 물자 유통보다 시장 교환이 더 큰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 화폐 경제의 성장이 빨랐다. 일본이 한국보다 화폐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중요한 원인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45) 구로다 아키노부, 정혜중 옮김, 『화폐 시스템의 세계사』, 논형, 2005, p.151. 일본에서는 11세기 중엽 이래 송전(宋錢)이 활발히 유통된 배경에는 장원(莊園)·공령제(公領制)가 중앙 권문(權門)과 지방 소령(所領)을 연결하는 교통을 활성화하였기 때문이다(荒野泰典·石井井民·村井章介, 「時代區分論」,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Ⅰ, p.28).

그렇다고 해도 조선 전기 이전에는 시장 수준이 낮아서 화폐 통용책이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보고 싶지는 않다. 17세기 중엽 유형원은 “지금 추포로 교역함을 보면 다른 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동전이 반드시 유통될 것임을 알게 되어 의심치 않”았는데,46) 유형원, 『반계수록』 권8, 전제후록고설 하, 전화. 이미 996년에 고려 정부가 철전의 원활 한 유통에 추포가 장애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추포는 실로 풀어 재활용할 수 있지만, 옷감을 만들어 다시 푸는 노동력이 허비되고, 부패하기 쉽고 작게 잘라 화폐로 사용되므로 실로 재활용하더라도 사용 가치가 손상되었다. 이처럼 사용 가치로서 약점을 가지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추포가 통용되는데 철전·동전이 유통되지 않는 것은 화폐 사용 습관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액권으로서의 철전·동전은 쌀·삼베라는 우수한 기능을 가진 비금속 화폐와 경합해야 했다.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직전에 비변사는 동전이 통용되지 못하는 주된 원인으로 원료가 생산되지 않는 점과 추포가 거래에 편리한 점을 들었다. 따라서 정책을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잘 추진하였더라면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에 동전이 통용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 해도 시장이 미약한 가운데 추포를 포함한 포화를 대체하면서 철전·동전을 사용하는 습관을 정착시키는 데에는 강력한 정책 의지가 필요하였다. 쌀·삼베·무명이라는 물품 화폐를 사용하는 관행이 뿌리 깊었고, 추포의 사용에서 드러나듯이 물품 화폐 경제는 성숙한 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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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숙종대의 동전들-해동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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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숙종대의 동전들-해동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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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년 처음 주조한 철전은 1002년에 포기되었다. 성종은 철전의 사용을 시도한 이듬해(997)에 사망하였는데, 성종이 좀 더 오래 재위하였더라면 목종처럼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세기가 지난 뒤 숙종의 강력한 동전 통용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보면, 그래도 철전의 운명을 낙관할 수는 없다. 목종의 정책 전환은 석연치 않으나 전후 사정을 보면, 민간이 포화를 선호하여 철전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언공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는 구제도를 항구적으로 사용함이 낫다는 논리로 동전 통용책을 비판하였고, 목종은 근본인 농업에 힘쓰는 정신으로 그 비판을 받 아들였다. 성종 때에 강화된 유학 사상이 화폐 통용책의 편익을 낮게 평가하고 비용을 높게 평가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민(安民) 이념은 화폐의 사용 습관을 존중하는 정책 지향을 낳았던 것이다. 숙종의 적극적 상업관은 강력한 화폐 통용책을 낳았던 반면, 목종의 농업을 중시하는 관념은 화폐 통용책의 추진력을 약화시켰다. 숙종·예종은 성종·목종보다 훨씬 강력하게 주화 통용책을 추진하였다. 1106년(예종 원년)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신하들이 숙종의 동전 통용책이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요나라가 동전을 사용한 것을 빌미로 하여 신하들은 거란의 풍습을 쓰지 말라는 태조의 유훈(遺訓)을 들어 동전 통용책을 비판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숙종이 동전을 통용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백성들이 가난하여 활발하게 통용시킬 수가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16세기 이전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반 백성이 화폐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소액권의 통용을 제약하는 기본 요인이었다. 시장이 성숙하지 못한 가운데 쌀과 삼베, 그중 추포를 대체하면서 철전·동전을 사용하는 습관으로 전환하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숙종·예종의 동전 통용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숙종 때에 만든 동전이 통용되지 못한 반면 은병의 통용이 지속된 것은 왜일까? 고액 거래와 원격지 거래에서는 은화가 쌀·삼베에 비해 화폐로서 우월하였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김삼수는 고려의 화폐 유통이 부진한 이유를 이중 경제 구조에서 찾았다.47) 김삼수, 「고려시대의 경제사상 화폐신용자본 및 이자·이윤사상」, 『논문집』 13, 숙명여대, 1973. 도시·사원령(寺院領)·국제 무역으로 이루어진 상층부에서는 금속 화폐와 중국전이 유통되었으나, 하층부에서는 쌀·삼베 중심의 비금속 화폐가 유통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은화 유통이 부진한 이유를 국제 무역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 무역이 활발하지 못하고 그것도 조공 무역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아, 무역에서 화폐를 사용할 여지가 적었다.

은화 유통은 활발하지는 않더라도 12세기에 성장하는 추세였으므로, 고려 말에 가장 익숙한 금속 화폐가 은화였다. 그 때문에 1356년의 논의에서 은화를 본위화로 사용하자는 견해가 대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은화를 주화로 삼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은 공급이 부족한 것이 주된 장애 요인이었다. 은은 많이 생산되지 않았고, 수입품의 결제물이나 공물로 다량 유출되었다. 금속 화폐의 주된 소재인 금·은·동의 공급이 늘 충분하지 않은 것은 한국에서 금속 화폐의 통용에 중대한 애로 요인이었다. 1391년 도평의사사는 은·동이 생산되지 않아 동전과 은화를 통용하기 어려우므로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주화가 꼭 필요하면 금속을 수입할 수도 있고 금속 함량을 줄인 화폐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유일한 요인일 수가 없다. 다른 중요한 요인은 명나라가 금·은을 세공(歲貢)으로 바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정부가 국내에서 금·은이 산출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공물 중에서 금·은 공물의 면제를 요청하여 1429년에 허락을 받은 상황에서 은화를 통화로 사용하는 방책을 꺼낼 수가 없었다. 1408년(태종 8)에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금·은은 본국에 나는 것이 아니니 함부로 허비하지 마소서.” 하고 아뢰니, 태종은 기꺼이 받아들여서 은화 사용을 금지하였던 것이다.48)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60, 재용고(財用考)7.

조선 정부가 1401년부터 70여 년 동안 저화 등의 통용을 지속적으로 강행하다 실패한 것은 화폐 통용책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였다.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가 유통된 적이 있었다. 지폐는 소재 가치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므로, 정부가 태환 등의 방식으로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통용되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근대 국가의 성립 이전에는 지폐 등 불환화폐가 장기간 존속한 유일한 사례가 남송대·원대의 중국이었다.49) Richard Von Glan, 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20. 그런데도 고려에서 지폐가 통용될 수 있던 기본 원인은 보초의 신용을 원나라가 보증하였기 때문이다. 중국 수입품의 결제 수단으로 보초가 원활히 기능하는 한, 신용이 보증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조선 정부의 지폐 통용책은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조선이 발행한 저화는 보초와 달리 대외 교역에 사용할 수 없었다. 소재 가치가 없는 저화에 대한 민간의 불신이 높은데, 정부는 그 신용을 제도로 보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시장 거래가 성숙하지도 활성화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저화의 통용책은 더욱 힘들었다. 고려 후기에도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는데, 조선 왕조로 전환되는 국면에 시장 거래는 더욱 위축되었다. 첫째,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인 명나라가 조공 체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사무역을 일절 금지하고자 하여 무역이 위축되었다. 둘째, 지방의 정기시가 소멸된 데에서 드러나듯이 내부 교역도 위축되었다. 조선 초기 집권화의 진전은 전국적인 재정통합을 진전시키고, 이러한 재정적인 물자 흐름, 곧 국가적 재분배의 강화는 시장을 구축(驅逐)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집권 국가 체제가 일찍 성립하여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한 것은 한국사의 중요한 특징인데, 집권 국가의 무역 통제와 조공 체제로의 편입은 외부 교역의 위축을 낳았다. 이것은 시장 발전, 나아가 화폐 경제 발전의 심한 기복과 완만성을 낳았다. 한국사는 세 차례 ‘외부 교역의 위축 → 시장 위축 → 화폐 경제의 위축’이란 과정을 경험하였다. 삼국의 정립기에 소국들의 개방적 외부 교역 체계가 와해되었는데, 시장의 제1차 후퇴기에 금속 화폐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 사무역(私貿易)이 위축되었는데, 제2차 후퇴기에 철전 유통책이 실패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무역에 대한 강한 금압책이 추진되었는데, 제3차 후퇴기에는 저화·동전 유통책이 실패하였던 것이다.

만약 저화 통용책을 추진하지 않고 동전 통용책을 세심하게 추진하였더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며, 저화 통용책의 실패라는 심각한 장애요인이 있더라도 시장이 성숙하였더라면 동전이 유통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15세기는 동전이 아니라 저화가 주된 화폐 소재로 선택되었던가? 첫째, 지폐는 원 간섭기에 사용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동전 통용책은 고려 숙종 때 짧은 기간 동안 시도되다가 중단되어 유통 경험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동전 사용 습관이 생기기 힘들었다. 1356년 정부의 화폐 논의에서 동전을 오랫동안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통용하게 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비방할 것이라고 하여 동전 통용을 추진하지 않았다. 둘째, 동전 공급의 부족이 중요한 애로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동전의 원료인 동철 생산이 부족하여 대일 무역에 크게 의존하였는데, 원활히 공급되지 않았다.

저화 통용책이 좌절되자 1423년부터 동전 통용책이 추진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실패로 귀결되었다. 저화를 보유한 사람은 우선 가치의 폭락으로 손실을 입었고, 통용을 중단한 뒤에는 남은 것을 보상받지 못하여 손해를 보았다. 이로 인하여 정부의 화폐 통용책에 대한 신뢰는 크게 손상되었다. 동전 통용책이 좌절된 후에 저화 통용책이 계속 추진되었으나, 화폐 통용책이 실패를 거듭할수록 신뢰는 더욱 낮아졌다. 동전 통용책을 가장 강력히 추진한 김육이 1652년 추포를 금지하자 민간의 불만이 많아 그것을 동전과 병행하였더니, “속담에 고려의 정령(政令)이 3일을 못 넘긴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민간이 동전 통용책을 더욱 불신하였다. 세종 때에 동전은 가치가 크게 하락한 시점에서도 소재 가치 정도의 명목 가치를 유지하였는데, 그로 보건대 동전 통용책이 불가능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시장의 미성숙, 동전 사용 습관의 부재, 유력한 비금속 화폐의 존속, 그리고 동전 원료의 부족이란 장애 요인 외에도 저화 통용책의 실패가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시장의 미발달이 주화 통용책의 좌절을 낳은 한 요인인데, 주화가 통용되지 못한 것은 시장 경제의 발전을 제약하였다. 이것은 1678년 동전의 보급이 시장 경제를 성장시킨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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