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2. 동전의 통용
  • 17세기의 동전 통용책
이헌창

조선 정부는 왜 은화를 화폐로 사용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동전을 주조하려 하였던가? 첫째, 17세기 중엽 이후 시장의 빠른 성장에 따른 화폐수요의 증대를 은화와 추포만으로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였다. 은화는 일본에서 유입되었지만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상평통보의 발행 직전에는 공급 부족이 심각하게 인식되었다. 둘째, 유교 이념을 신봉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고액 거래에 편리한 은화보다 서민의 소액 거래에 편리한 동전을 선호하였다. 정약용(丁若庸)은 동전이 귀한 귀금속·보석과 헐한 직물·곡물을 절충하여 빈부 간에 잘 통용될 수 있는 이상적인 화폐로 보았는데,57)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제9권, 시문집(詩文集) 문전폐(問錢幣).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 위정자·학자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조선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전 본위제를 채택한 것은 국가가 인민을 균등하게 다루고 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제민(齊民) 지배의 정치 이념과 위민(爲民)의 유교 이념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17세기 초부터 동전 통용책, 곧 행전책(行錢策)이 활발히 시도되었다. 그 직접적 배경으로는 은화의 통용, 전란에 따른 재원의 부족 등을 생각할 수 있다. 1603년(선조 36) 호조에서 주전사목(鑄錢事目)까지 마련하였으나, 동원 원료인 동철의 부족으로 주조하지 못하였다. 1625년 동전이 60만 개 주조되고 국가 지불 수단으로 삼는 방안도 추진되었으나, 주전량의 부족 등으로 행전책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중단되었다. 1633년 행전책이 다시 추진되고 더욱 세심한 정책이 마련되었으나, 역시 부진한 가운데 병자호란을 만나 중단되었다.58) 인조 때 행전책의 추진부터 숙종 때 전황의 발생까지 화폐의 정책과 상황은 송찬식, 「조선 후기 행전론(行錢論)」, 『한국사상대계』 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76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논문은 송찬식,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의 연구』, 일조각, 1997에도 수록되어 있다. 17세기 전반에 동전 유통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동전 유통을 위한 여건은 성숙하여 갔다. 1634년경 개성에서는 “크게는 토지와 가옥 및 노비로부터, 작게는 땔감·채소·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전으로 사고 있었으며, 부근의 강화(江華)·교동(喬桐)·풍덕(豊德)·연안(延安)·배천(白川) 사람도 동전을 사용하는 품이 아이도 장에서 물건을 매매함에 속지 않을 만큼 되어 있었다.”고5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59, 전화조(錢貨條). 한다. 이에 힘입어 최명길(崔鳴吉), 김육 등은 동전의 유통을 개성으로부터 전국적·점진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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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초상
김육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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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은 효종의 절대적 신임을 토대로 강력하게 행전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1650년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자신의 노자로 동전 15만 개를 사서 먼저 시범적으로 사용하고 통용할 만하거든 즉시 동전을 주조하여 계속 통용하자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는 동전을 국가 지불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전의 정책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자신이 추진하여 성과를 거둔 대동법(大同法)의 세금 일부를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여, 대동법과 행전법을 결부하여 효율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1653년부터 평안도에 행전 별장(行錢別將)을 파견하여 행전을 독려하였는데, 그들의 강압적 추진과 모리 행위에 대한 비판이 이듬해에 고조되었다. 1655년 말에는 은화 1냥=동전 6냥=쌀 1섬으로 동전의 가치를 은화에다 연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1656년 효종은 “김육의 고집스럽고 막힌 병통은 죽은 뒤에야 그만둘 터이므로 마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행전책을 중단시켰다.60) 『효종실록』 권17, 효종 7년 9월 경오 ; 10월 정축. 1654년 이경여(李敬輿)는 “우리나라는 백성이 가난하고 농가에서는 잉여 재산이 없어서 농지를 갈아서 먹고 베를 짜고 입어서, 비록 공상(工商)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어도 공산물과 농산물을 서로 교역하여 겨우 자급하지만 오히려 굶주리고 떠돌며 걸식하는 백성이 있으니, 무슨 여유 재산을 축적하여 동전을 취하여 저축하겠읍니까.”라고 하여 금속 화폐의 통용을 반대하였다.61) 『효종실록』 권12, 효종 5년 6월 무인.

물론 시장 기반이 약한 것이 애로 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행전책에 대한 민간의 누적된 불신과 엘리트층의 비협조가 없었더라면 행전을 실현할 정도의 시장 기반은 김육의 시절에 조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행전책의 연이은 실패와 그에 따른 보상책의 부재로 행전책에 대한 누적된 불신은 매우 강하였다. 그리고 행전책에 대해 엘리트층은 비협조적이고 심지어 강하게 비판하였다. 1652년 행전을 위해 추포를 금지하자 민간의 불만이 많아 그것을 동전과 병행하였더니, “속담에 고려의 정령(政令)이 삼 일을 못 넘긴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백성들이 행전책을 더욱 불신하였다. 이에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은 김육이 행전책을 서두르기만 한다고 비판하였다.62)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 4월 임인.

김육의 행전책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다. 행전책을 중단한 후에 주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동전의 민간 유통이 금지되지는 않는 가운데 상품 유통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동전의 통용이 지속되었다. 개성과 그 주변에서는 김육이 행전책을 실시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동전이 통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울산 지방에서는 김육의 행전책이 중단된 이후 동전이 활발하게 통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울산 지방의 사족들이 구강 서원(鷗江書院)의 설립을 위해 1659년에는 벼 151석과 돈 1,080냥을, 1664년에는 벼 150석과 돈 730냥을, 1666년에는 벼 231석과 돈 1,840냥을 모았다. 1659 년에는 벼를 팔아 돈 940냥을 마련하였고, 돈 233냥으로 담배를 구입해 두었다. 1660년에는 소금 170석을 296.27냥에 사서 1661년 782냥에 팔았다. 곡물은 모두 돈으로 만들어 두었고, 1663년에는 노비를 돈을 주고 구입하였고, 1666년에는 상선(商船) 9척으로부터 북어 8,337동과 소금 275석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구강 서원이 돈으로 곡물을 팔고 각종 경비를 지출하고 북어·소금·담배를 거래하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63) 이수환, 『조선 후기 서원 연구』, 일조각, 2001, pp.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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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도의 장시
무장현도의 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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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동전 통용책이 실패를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그 실현을 위한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첫째, 임란왜란 이후 은화의 활발한 유통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화폐 경제의 일정한 성숙을 보여 주며, 다른 금속 화폐인 동전의 사용 습관이 형성되는 데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둘째, 김육이 행전책을 추진할 때에는 동전량의 부족이 장애 요인이었는데,64) 『효종실록』 권15, 효종 6년 12월 계해. 이후 일본 동의 수입이 크게 늘어 행전책을 지원하였다. 셋째, 행전책의 가장 강력한 후원은 시장의 성장이었다. 17세기는 일본 은의 대량 유입으로 강화도 조약(1896) 이전에 무역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 농촌 정기시인 장시(場市)의 활발한 생성이 보여 주듯이, 17세기에는 내부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였다. 조선 건국 초에 550만 내외이던 인구가 1800년경 1,650만 명 내외로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인구 증가가 조선시대 시장의 성장을 낳은 기본 힘이었다. 정부 수용 물자를 현물 대신에 쌀·직물로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조달하게 하는 대동법이 17세 기에 확산된 것도 시장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장의 성장은 추포를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행전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극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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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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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직전에 비변사는 “물화가 유통하지 못하고 이원(利源)이 점차 경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65) 『비변사등록』 34책, 숙종 4년 윤3월 24일. 영의정 허적(許積)은 “은의 공급로(供給路)는 협소한데 그 용처는 넓어서…… 물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人情)이 모두 행전을 원한다.”고 하였다.66) 『비변사등록』 34책, 숙종 4년 1월 24일. 이렇게 성숙된 여건 아래 1678년(숙종 4)부터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좀 더 세심한 통용책을 추진한 결과, 동전은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동전의 가치를 쌀·무명·은화에 결부하여 안정시키려 하고 세금의 일부를 동전으로 납부하게 하고 봉급의 일부를 동전으로 지급하는 등 김육의 정책은 이후에 계승되었다. 지방 관청을 포함한 다양한 기관이 주전을 하도록 하여 동전의 공급량을 늘리고 지방에 널리 유통되게 하되, 김육의 시절처럼 지방의 통용을 강행하지 말고 원하는 곳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67) 『비변사등록』 35책, 숙종 5년 4월 9일. 그리고 동전 통용책을 추진할 때 전세(田稅)의 반을 동전으로 납부하게 하여 돈을 확보하지 못한 백성들이 원망한 점을 감안하여, 백성의 형편을 참작하여 동전을 점진적으로 국가 지불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68) 『비변사등록』 34책, 숙종 4년 1월 24일.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화폐 정책에 대한 민간의 누적된 불신을 극복하면서 외부 교역과 무관한 돈인 동전이 보급된 것은 한국 화폐사의 한 특징이며 조선시대 경제 발전의 성과이다. 조선은 유럽·중국·일본에 비해 금속 화폐의 유통에서는 늦었으나, 농촌에 금속 화폐가 보급된 시점을 비교하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16세기 이전 유라시아 대륙의 소농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비금속 화폐가 일상 거래 수단이었고, 이후 금속 화폐가 농 촌에 보급되었다.69) 구로다 아키노부, 정혜중 옮김, 『화폐 시스템의 세계사』, 논형, 2005, p.60, p.160.

국가 정책도 동전의 통용을 촉진하였다. 국가는 동전을 시전에 무이자로 대출하거나 녹봉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조세로 거둘 쌀을 운반하기 곤란한 산간 지방에서나, 면화의 흉작을 당한 해에 무명으로 거두는 세금을 동전으로 대신 납부하는 것을 허용한 정책은 농촌 지역의 화폐 경제화를 촉진하였다. 그 결과 재정 수입에서 동전 납부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법정 조세의 동전 납부 추세는 정체하였다. 대동법으로 수취하는 무명의 절반을 동전으로 납부하는 방식은 19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고, 경지세의 동전 납부율은 19세기 중엽에도 25% 정도에 머물렀다. 그런데 법제적인 수취 체계와 무관하게 농민의 화폐 부담은 증가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이서배(吏胥輩) 등이 상인과 결탁하고 동전으로 조세를 징수하여 서울로 운송하고 미곡이나 면포를 구입하여 납부하는 대전방납(代錢防納)이 확산되었다. 나아가 수령이 주체가 되어 방납 관행을 현실화하고 다양한 조세 부담을 동전으로 환산하여 합산한 도결가(都結價)를 정하여 징수하고 쌀·무명을 구입, 상납하게 되었다. 도결은 19세기 전반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농민이 돈으로 조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상품화하는 생산물이 증대하는 만큼 시장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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