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2. 동전의 통용
  • 국가의 동전 주조 사업 관리
이헌창

조선 정부는 화폐 발행이란 중요한 이권이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이권재상론(또는 화권재상론)에 입각하여 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사주(私鑄)와 같은 민간의 화폐 발행을 금지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권재상론은 고려시대에 이미 부상하였는데, 그 원칙은 조선 후기에도 달라지지 않아서 1625년 행전의 논리를 제공한 김신국(金藎國)은 돈이란 ‘인사(人事)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군주의 권한(權柄)’이라 하였다.70) 김신국(金藎國), 『후추선생전(後豬先生傳)』 권1, 잡저(雜著).

이러한 화폐 관리 원칙을 조선 후기에는 완화한 적이 있어서, 민간의 사주가 허용되고 중국 돈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1623년 사주를 허용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1633년 호조는 동전을 충분하게 주조할 수 없다고 하여 중국의 동전을 수입하자고 제의하였으며, 1635년 최명길은 사주를 금지하면 행전책이 실패할 터이니 일시적으로 허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효종 때에 동전 통용책이 적극 추진되면서 중국 돈의 수입과 사주가 모두 이루어졌다. 김육은 1650년 중국 동전 15만 개를 사와 시범적으로 통용하였고, 1651년에는 사주도 허용되었다. 민간의 자유로운 사주는 허용되었다 해도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범위에서 행하여졌다. 1695년 경비 조달을 위한 동전의 주조를 허락받은 강원도 감영은 부유한 상인에게 사주를 허락하고 세금을 거둘 방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전 주조 도급제(都給制)가 1850년경부터 활발히 논의되어 공·사 모두 이롭다는 판단 아래 1864년 이전에 실행되었다.71) 원유한, 『조선 후기 화폐사 연구』, 한국연구원, 1975, pp.82∼83.

17세기에 사주와 중국 동전 수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실현되기도 한 것은 동전의 통용을 지상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동전 통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적정량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사주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에 최명길이 사주의 허용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권재상론을 완화하면서까지 행전책을 추진한 것은 왜일까? 화폐가 백성과 나라에 모두 이롭다는, 화폐 발행의 기본 동기인 부민이국론(富民利國論)이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1625년 이권재상론을 내세우면서 행전책을 제안한 김신국은 돈을 통해 부민을 실현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김육은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한(裕國便民)’ 목적 아래 행전책을 추진하였다. 1656년 효종은 김육의 주도로 행전책을 10년간 시행하였는데 조금도 효과가 없으니 중단해야겠다고 하면서 “당초 돈을 사용하게 한 것은 오로지 재화의 유통을 위해서였다.”고 하였다.72) 『효종실록』 권17, 효종 7년 9월 경오. 효종의 주요한 행전 동기는 고려 숙종의 그 것과 같았던 것이다. 부민이국론이 부상한 배경으로는 16세기 이후 시장과 해외 무역의 성장으로 상업을 억압하려는 관념이 완화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억상 관념의 완화에 따른 부민이국론의 부상은 이권재상론의 유연한 적용을 낳았던 것이다.

이권재상론이 완화되었다 해도 사주의 허용과 중국 동전의 수입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 까닭은 국가가 주전 이익을 장악하고 경제 순환을 관장하기 위해서였다. 주전 이익은 1679년과 1731년은 50%로 높았으나, 18세기 후반 감소하여 1807·1814·1825년은 10% 정도였고, 1830∼1857년간에는 20∼27%에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73) 원유한, 앞의 책, p.110. 여기에는 동전을 통용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이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동전의 주조·통용에 따른 정부 수입은 많지 않았다. 주전 이익이 상당할 때 국가는 흉년에 진휼 자금(賑恤資金)을 조달한다는 명분으로 동전을 주조하기도 하였다.

주전 이익을 결정하는 최대의 요인은 원료 가격, 그중에도 동의 가격이었다. 동은 주로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은 1냥으로 매입할 수 있는 동이 1706년에 8.3근, 1720년대에 1.5근, 18세기 말에 1.2근, 19세기 초에 1근으로 감소하였으며, 가격 상승에 수반하여 동전 1문의 중량은 줄어들었다. 1678년 상평통보가 처음 주조되었을 때, 하나의 무게는 2전중(錢重), 즉 7.5g이었다. 『속대전(續大典)』 국폐조(國弊條)에 의하면, 동전 1개의 무게는 2전 5분, 곧 9.4g이었다. 그 후 동의 값이 올라감에 따라 동전 무게가 줄어들어 1742년 7.5g, 1752년 6.4g, 1757년 4.5g으로 줄어들었다.74) 원유한, 앞의 책, pp.110∼111, p.124. 영·정조대에는 숙종대에 비하여 동의 가격이 비싸고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여 동전의 중량이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전 이익률은 낮았고 하락하는 추세였다. 1820년대부터 일본에서 수입하는 동이 늘어나고 갑산 동광의 채굴이 활발해짐에 따라, 원료의 공급난이 해소되고 주전 이익률도 높아졌다. 조선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양질의 무거운 동전을 제조하였고, 당백전 발행 이전까지는 주전 이익을 위해 화폐를 남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통화 가 치가 안정되었던 것이다.

확대보기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주전소 약칭이 있는 상평통보
팝업창 닫기

정부가 주전을 독점한 것은 단지 이익을 챙길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고, 사주가 동전 품질을 악화시킬 것을 우려한 데에도 기인하였다. 1635년 최명길의 사주 허용 주장에 대해 인조는 동전의 품질이 균일해지지 않아 민간의 신뢰를 잃는다며 우려하였다. 인조의 우려는 근거가 있어서, 1864년 이전에 동전 주조 도급제를 허용한 결과 열악한 동전이 넘쳐 물가가 등귀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17세기에는 정부가 동전의 통용과 보급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중앙 관청, 군영(軍營), 지방 관청에 동전 주조를 허용하고 심지어 사주를 허용한 적도 있었다. 여러 관청에 의한 동전 주조는 원료 가격의 등귀, 동전 품질의 불균일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1683년에 각 관청의 무분별한 주전으로 인하여 동전 1개의 중량이 2전에 미달하여, 동전 가치가 하락하기도 하였다. 1699년에는 각 관청이 철물이 부족하면 연철(鉛鐵)을 섞어, 손으로 비비면 부서질 정도로 취약한 동전이 많았다.

그래서 동전의 통용과 보급이 실현된 후에는 재정을 담당하는 중앙 관청이 동전 주조 사업을 전담하여 관리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이권재상론의 구체화로 볼 수 있다. 1693년(숙종 19)에 국가의 중요한 보화인 동전의 주조를 호조와 상평청이 전담하기로 하였으나, 이듬해에 이 원칙이 무너졌다. 1750년(영조 26)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호조가 전담하기로 하였는데, 순조 때에는 이 원칙이 다시 무너졌다. 호조가 국가 재정을 총괄하지 못하여 각 관청이 독자적인 재정 권한을 가진 상태에서, 호조가 동전 주조를 전담하는 일이 갈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75) 원유한, 앞의 책, pp.66∼70.

유형원이 지적하였듯이, 동전의 명목 가치가 제조 비용보다 현저히 높은 경우, 달리 말해 주전 이익이 많은 경우에는 사주가 발생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동전을 녹여 금속으로 활용하는 훼주(毁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동전의 명목 가치와 소재 금속의 가치를 일치시켜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주와 훼주는 동전의 명목 가치가 소재 금속의 가치로부터 괴리되는 것을 막아 주는 기능을 하였다.

동전의 명목 가치가 소재 금속의 가치보다 낮은 때는 예외적이었다. 행전의 초기 국면이라 동전에 대한 민간의 신인(信認)이 낮은 숙종 때에 훼주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동전이 민간의 신인을 획득한 뒤로는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주는 주전 이익률이 높을수록 더욱 활발하기 마련이었다. 정부는 사주에 대한 엄한 금령을 내렸다. 숙종 때에는 주전 이익률이 높아서 사주가 활발하였다. 당시 위정자들은 사주의 성행으로 동전의 가치가 하락한다고 생각하였고, 1697년에는 사주가 늘어남에 따라 동래 왜관의 동철 수입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함에 따라 사주가 더욱 성행하였다. 사주는 1695∼1697년간의 대대적인 주전으로 동전의 가치가 하락하자 덜해졌으나, 1710년대부터 동전의 공급이 충분하지 못해 가치가 높아지는 전황(錢荒) 현상이 나타나면서 활발해졌다. 1820년대부터 동의 공급이 원활해지고 주전 이익률이 상승하면서 사주가 더욱 활발해졌다.

갑산 동광이 위치한 함경도 지방에서 사주가 특히 활발하여, 1840년에는 함경도 서북진(西北鎭)의 진교(鎭校) 염처옥(廉處玉)이 여러 해 동안 군기감관(軍器監官)으로 있으면서 각종 군기와 동총(銅銃)을 도둑질하여 도당(徒 黨)을 모아 사사로이 동전을 만들다 발각되었으며, 1841년에는 길주목(吉州牧)에서 사주에 연루된 장인(匠人), 조역인(助役人) 등이 처벌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1846년에는 명주부(明川府)에서 조직적으로 사주하던 죄인이 처벌을 받았다.

원료의 공급이 원활하던 숙종 때에 주조된 동전은 무게가 2전이어서 윤곽이 돈후하고 내구성이 강하였는데, 원료의 공급난이 심각한 영조 때에 주조된 동전은 무게가 1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연철을 많이 사용하여 겨우 4∼5년이 지나면 부서지는 것이 많았다. 동의 가격이 비싸지고 조달에 애로가 커져서, 소재 금속량이 하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조 때에는 내구성이 약한 동전이 많이 주조되었다. 정조는 1778년에 동전이 작고 박약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하여 옛 동전 중에 두껍고 큰 것을 본으로 삼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동의 공급이 여전히 원활하지 못하여 정조의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785∼1786년에 논의된 바에 의하면, 근래 주전 이익이 없는데도 새 돈은 작고 박약하여 10년이 지나지 않아 부서져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많아, 백년 후에는 신전(新錢)이 남지 않겠다는 우려마저 제기되었다. 1820년대부터는 동의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가격도 헐해졌으므로, 동전의 형체가 견고해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동전의 중량이 줄어들자, 초기의 중량이 무거운 동전을 다시 주조하여 주전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영조 때에 돈의 형체가 “점차 줄어들어 새 돈 1냥 3전으로써 옛 돈 1냥을 당하니, 옛 돈을 녹여 새 돈으로 만들어 수량이 많아짐만 취하고 모양이 작아짐은 돌보지 않았다.” 한다.76) 황윤석(黃胤錫), 『이재난고(頤齋亂藁)』 병술(1766) 6월 11일조. 1775년 어영청은 약 45만 냥의 주전을 완료한 후에 13만 냥을 구전(舊錢)으로 상환하여 10%의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새 돈을 각 관청이 비축한 옛 돈으로 바꾸어 정부 물자를 마련하였는데, 1828년에는 각처의 옛 돈이 고갈되 기도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