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2. 동전의 통용
  • 동전의 보급
이헌창

상평통보 1개=닢(葉)은 1푼(文)이고, 10푼이 1전(錢), 10전이 1냥(兩)이다. 1695년과 1696년에 대흉작이 들자 진휼 대책으로 대량의 주전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동전 가치가 폭락하여 1698년 이래 30여 년간 주전이 중단되었다. 1678∼1697년간 관에서 주조한 동전은 약 450만 냥이며, 불법적인 사주, 동전의 파손 등을 고려하였을 때, 동전의 유통량은 18세기 초에 500만 냥을 넘었을 것이다. 18세기 초에 동전 총량으로 쌀 생산량의 8%에 가까운 130만 석 정도를 살 수 있었고, 그것은 자급분을 포함한 국내 총생산의 2% 정도로 추정된다.

초기에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만 통용하던 동전은 주조량의 증대와 더불어 통용 지역이 점차 넓어졌다. 동전을 이용한 경지 거래가 1680년대에는 제한적이었지만 1690년대에는 경기도 각지는 물론 충청도 등지로, 170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토지 등의 매매 문서를 통하여 동전 유통의 지역적 확산을 추적해 보자. 특히 풍부한 경지 매매 문서를 보유한 구례 문화유씨가를 보면, 동전 거래는 1698년 처음 1건 나오며, 1701∼1708년간에는 동전과 비금속 상품 화폐를 병행하여 토지를 구입하는 사례가 많은데, 1703년 이전까지는 비금속 화폐를 이용한 거래가 우세하지만, 1704∼1705년간에는 양자가 대등하였고, 1706년부터 동전 거래가 우세해지고, 1710년대에는 거의 동전 거래였다. 구례 오미동에서는 동전의 침투가 늦고 비금속 상품 화폐와 동전이 오래 병용한 편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동전이 짧은 기간에 토지·노비의 중심적 거래 수단이라는 지위를 확보하였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농촌에서도 1695∼1697년간 대량의 주전이 이루어진 후 10년 이내에 동전이 토지·노비의 중심적 거래 수단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토지·노비의 매매 문서를 보면 동전은 비금속 상품 화폐를 강력히 구축하였다. 동전의 통용 범위는 계속 확대되어 1720∼1730년대 에 북으로는 회령, 서쪽으로는 의주, 남으로 동래·제주도에 이르렀다. 도시 시장에서는 18세기 초에 이미 동전이 교환을 위한 필수적인 매개물이 되었다.

소액 거래에 편리한 동전은 은화와 달리 추포를 전면적으로 구축하여갔고, 추포와 달리 다른 비금속 화폐를 강력히 구축하였다. 추포는 1680년대부터 서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동전의 유통이 전국적 범위로 확장된 17세기 말 내지 18세기 초에는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였을 것이다.

동전은 먼저 소액 거래부터, 나아가 고액 거래에서 은화를 압도하였다. 은화는 17세기 후반에 서울 등 상업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중심적인 통화로 기능하였으나, 1695∼1697년간 대량 주전이 이루어지고 동전이 전국적으로 통용된 후에 동전은 은화로부터 기축 통화의 지위를 확고히 탈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30년대 이후 은의 유입이 급감하면서 은화량은 격감하였다.

전답·노비와 같은 고가품의 거래에서도 은화는 점차 동전에 압도당하였다. “옛적에 집과 전답의 매매는 모두 은으로 하였는데, 지금(1735)에는 은이 없어져 집값이 1,000냥이라도 동전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한다.77)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11년 12월 5일. 1742년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도)에서는 쌀·동전·무명만 사용하고 은화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상업적으로 더욱 활발하고 중국 무역이 이루어지던 경기·황해·평안도에서는 당시에도 은화가 유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영의정의 보고에 의하면, 동전은 국내에만 통용하지만 은화는 만국에 유행하는데, 은화를 행용하지 않은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며, 은이 사화(死貨)로 되어 저장의 중요한 수단인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은화가 국내 통화로서 기능을 중단한 후에도 국제 통화로서의 역할은 계속하였다.

고액 거래에서도 동전이 은화를 압도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동전이 화폐로서의 신인을 확고히 획득한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은화량이 감소함에 따라, 화폐로서 은화의 기능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앞 단락의 인용에 의하면 은이 없어져 고액 거래도 동전으로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816년 경수궁(慶壽宮) 저택의 가격이 황은(黃銀) 660냥인데 동전 1,782냥을 대신하여 보냈다. 19세기 초 서울에서는 저택의 시세를 은으로 정하고, 부족한 은화 대신에 동전을 지급하였던 것이다.

칼 멩거는 화폐가 사회 제도로서 국가의 법과 강제에 의해 정착될 수는 없지만, 국가가 화폐 제도를 발전시킨다고 보았는데,78) K. Menger, On the Origin of Money, Economic Journal, June 1892, p.255. 이 가설은 한국사에 부합한다. 15∼17세기 조선 국가는 지폐·동전 통용책을 추진하였으나 좌절하였고, 결국 사회적 요구에 힘입어 1678년 이래의 동전 통용책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 국가는 안정된 가치의 주화인 상평통보의 보급 정책으로 화폐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안정된 가치의 고액권을 발행하지 못하여 화폐 경제의 성숙을 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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