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3. 화폐와 경제 생활
  • 화폐 경제의 성장
이헌창

상평통보의 발행 이후 동전은 빠르게 통용 범위를 확산하고 경제 생활에서의 역할을 증대하여, 화폐계를 평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장을 성장시켰다. 이렇게 화폐 경제가 성장하였지만, 19세기까지는 자급자족의 영역이 지배적이었고 무명과 쌀의 화폐 기능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다. 19세기에도 농가 생산물의 상품화율은 20∼30%로 추정된다. 아직 시장 경제가 미성숙하고 동전의 공급이 풍부하지 않는 19세기 전반 이전에는, 제값을 받고 손쉽게 팔 수 있고 옷감과 식량으로 늘 수요되고 있고 조세 부과의 대상인 쌀과 무명은 여전히 화폐로서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인플레이션이 격심하면 쌀은 화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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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경제는 시장의 세계, 재정 곧 재분배의 세계, 호혜의 세계에서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 시장에서는 화폐 경제의 성장이 가장 괄목할 만하고 동전이 화폐로서 압도적 우위를 가졌다. 1718년 유복명(柳復明)의 지적에 의하면, “야채를 파는 노파나 소금을 파는 사람까지도 곡물보다는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또 “그것 없이는 물자를 구하기가 정말 곤란한 상태”로까지 진행되었다.82) 『숙종실록』 권62, 숙종 44년 윤8월 무신. 이것은 서울의 사정일 것이다. 『이재난고(頤齋亂藁)』를 지은 황윤석이 18세기 서울에서 생활할 때에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드물었다.83) 정수환, 「18세기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화폐 경제 생활」, 『고문서연구』 20, 2002. 18세기의 일기인 『승총명록(勝聰明錄)』에 의하면, 고성·통영에서도 동전의 사용이 활발하였다. 서울 등 도시에서는 화폐의 사용이 활성화된 반면, 일반 농촌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서울에서는 돈으로 살아 가고 지방에서는 곡식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장시에서 물물 교환이 활발하다고 외국인은 보고하였다.84) 오두환, 『한국 근대 화폐경제사』, 한국연구원, 1991, pp.12∼14.

도시보다는 덜해도 농촌에서도 화폐 경제화가 진전되어 있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에 거주하는 박씨가는 1900년경 이틀에 한 번 꼴로 재화를 거래할 정도로 시장 거래는 일상이 되었는데, 박씨가의 교환은 대개 동전을 매개로 하였고, 현물로 결제할 때에도 재화의 시장 가치를 측정하여 동전으로 정산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1893년 2월 22일 박씨가는 소금 27되를 되당 8전 5푼의 시세로 22냥 9전 5푼 어치를 외상으로 구입하였다. 27일에는 소금 20되를 되당 7전 5푼의 시세로 15냥 어치를 구입하고, 찹쌀 27되를 되당 9전 3푼의 시세로 값을 치르니, 12냥 8전 4푼이 여전히 외상으로 남았다. 3월 5일에는 또 찹쌀 14되를 같은 시세로 값을 쳐주니 1전 8푼이 남아서 나머지 돈을 받고 결제를 종료하였다. 이 물물 교환에서는 동전이 가치 척도로 기능하고, 신용 거래가 개재하여 동전이 채무 결제 수단으로도 기능하였던 것이다. 동전이 물물 교환과 신용 거래를 지원하였고, 그럼으로써 적은 화폐량으로 거래의 원활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재화의 매매와 달리 임금은 일반적으로 동전과 더불어 현물을 함께 지불하였다. 19세기 중반 경북 예천군 박씨가의 농가 경영에서는 2년 안팎을 복무하는 머슴에게 현금뿐만 아니라 의복, 신발 등 현물도 지급하였고, 2∼3마지기의 논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날품팔이에게는 술·담배만 지급할 경우 2전, 세끼 식사를 제공할 경우 1전을 지급하였다. 정부에 의한 임금 지급은 원래 쌀과 무명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동전이 보급되면서 무명을 대체하여 간 결과, 18세기 전반 10% 내외를 차지하던 동전은 19세기 전반에 60% 내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85) 박이택, 「서울의 숙련 및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 1660∼190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서울대출판부, 2004, p.56. 임금을 식량과 옷감으로 지급한 것은 소비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기능을 하였다.

동전은 국가 지불 수단으로서 위상을 신장하였으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세를 동전으로 납부하는 추세는 진전되다 가 18세기 말부터 법정 조세의 전납화 추세는 정체하여, 경지세의 전납화율은 19세기 중엽에도 25% 정도에 머물렀다.86) 방기중, 「17·18세기 전반 금납조세(金納租稅)의 성립과 전개」, 『동방학지』 45, 1984 ; 「조선 후기 군역세(軍役稅)에 있어서 금납조세의 전개」, 『동방학지』 50, 1986. 국가 조달 물자들의 공정 가격을 기록한 『탁지준절(度支準折)』이 여러 종 남아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18세기 말의 책자를 보면, 국가가 물자를 구입하는 데에 대부분 동전을 지급하였음을 보여 준다. 동전 외에도 다양한 은화, 무명, 쌀도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비단을 구입할 때는 은화로 지불되었다.

화폐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선물하는 물품도 환금성이 높은 몇 가지로 통일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재난고』에 의하면 선물 수증(受贈) 활동이 시장 교환에 의존하게 되어, 현물로 지급해야 할 선물을 돈으로 대신 지급하거나, 부의(賻儀) 등 선물을 시장에서 사서 지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선물을 현물로 주고받는 일이 많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호혜의 세계에서는 현물 사용이 뿌리 깊게 존속하였다. 농촌 계의 운영에서는 동전의 비중이 증대하는 추세였지만, 미곡이 지불 수단으로 계속 활용되었다.87) 이우연, 「농촌 임금의 추이 : 1853∼1910」, 『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001 ; 박이택, 「촌락 내부 계약에 있어서 지급 표준과 지급 수단(1667∼2000)」, 『민족문화연구』 38, 2003.

동전의 보급은 상거래의 편의를 증진하여 시장을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계산의 편의를 증진하여 물가 관념을 발달시켰다. 18∼19세기에는 일부 양반도 미곡 등 중요 상품의 물가 변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일기 등에 기록하였다.

동전의 유통과 통화 정책은 시장의 이해 등에 관한 경제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경제 지식의 증대에 기여하였다. 동전이란 무용한 물건인 반면 중요한 이권이므로 군주가 가져야 한다는 이권재상론은 동전의 가치와 존폐(存廢)를 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는 발상을 낳았다. 그래서 상평통보가 통용된 직후에 동전과 은전의 교환 비율을 일정하게 하려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시장의 힘에 좌절되었다. 앞서 전황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요와 공급으로 그것을 설명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음을 언급하였다. 17세기 말부터 폐전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영조는 동전을 폐기하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1731년에 박문수는 “화폐의 권한은 마땅히 국가에 있어야 하나, 자금은 그렇지 않아 그 권한을 부자가 가졌다. 부자가 비축한 돈을 끝내 풀어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욱 비싸진 후에 이익을 거두기 위함이다.”고 논하였다.88) 『비변사등록』 89책, 영조 7년 정월 7일. 영조는 정부가 쌀값을 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결국 시장에 가격 조절 기능을 맡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92년 정조는 서울 주민의 식량 사정이 상인에게 달려 있다고 보고, 물가 안정을 위해서는 시장 기능을 억제해서는 안 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다음의 전교(傳敎)를 내렸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이란 경제적 힘에 의해 결정되고 정책으로 인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서울의 수많은 인구가 배불리 먹는 것은 곡식 값이 비싼가 싼가에 달려 있다. 그 원천이 세 가지니 공(貢)·시(市)·상(商)이다. 근일에 대간(大諫)의 말이 있어서 유사(有司)에게 단단히 타일러 곡식 값이 뛰어오르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나,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저 무역의 방도에서는 돈과 곡식이 다같이 화천(貨泉)이지만, 그것이 풍부한가 부족한가에 따라 서로 보배가 되기도 하고 쓸모없게 되기도 한다. 조정에서 마땅히 물가 안정에 힘쓰려면 백천(百川)을 도도히 흐르듯이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근원이 되는 물을 인도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대저 공미(貢米)를 억지로 시중(市中)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공물 납부를 직업으로 하는 자는 바야흐로 자신도 먹고살 겨를이 없으니, 시세를 비록 상인보다 더 쳐주지 않더라도 저자에 앉아서 장사하는 자들이 어디에서 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상인은 먼 곳에서 배와 수레로 실어와 헐값에 사들이고 비싸게 파는 이익이 있는 연후에야 곡물을 수집하고 배포한다. 이제 금령을 내려 그 이익을 막는다면, 배와 수레로 한강을 건너 서울로 향하던 자들이 장차 허둥지둥 배와 수레를 돌려 돌아갈 것이니, 틀린 계책이다. 그들이 폭주하고 서울에 이르도록 방임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1만 곡(斛)의 곡식이 저자에 있는 것과 같다. 한 시장의 가격이 이미 고르게 되면 나라 전체의 식량이 저절로 넉넉해질 것이니, 이런 정사는 옛사람이 방(榜)을 걸어 쌀값을 올린 뜻이다.89) 『정조실록』 권35, 정조 16년 8월 경인.

시장의 성장과 동전 유통의 확대는 경제 교육을 진전시켰지만, 이권재상론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고 화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폐전론이 실행될 수 없음을 자각한 영조는 그럼에도 이권재상의 관념을 강하게 가져서 1756년 “무릇 화권(貨權)은 성세(盛世)에는 위에 있고 쇠세(衰世)에는 아래에 있으니, 만약 기강이 굳건하면 모래를 돈으로 삼기를 명하더라도 인민이 따를 것이다.”라는 전교를 내렸다.90) 『탁지지』 외편 권2, 시전 전교 영조 32년 10월. 흥선 대원군이 소재 가치와 현저히 괴리된 명목 가치를 가진 당백전의 통용을 추진한 것도 원래 돈이란 무용한 물건이며 그 권한을 국가가 가진다는 관점을 배제하고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대표적인 문학 작품을 통해 돈이 인간 생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방랑하면서 어렵게 살아간 김삿갓(1807∼1863)은 누구보다 돈의 위력을 절감하였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이전보다 돈의 위력이 강화된 시기였다. 그는 「범주취음(泛舟醉吟)」이란 시에서 돈으로 술을 산다는 구절 다음에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나 돈이 바로 항우장사지(今世英雄錢項羽)”라고 읊조렸다. 그는 「전(錢)」이란 시에서 돈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91) 정대구, 『김삿갓 연구』, 문학아카데미, 1990, p.159, p.184.

천하를 두루 다녀도 어디서나 환영하네 / 周遊天下皆歡迎

나라와 집안을 흥하게 하니, 그 세력 대단하다 / 興國興家勢不輕

갔다가도 다시 오고 왔다가도 다시 가며 / 去復還來來復去

생사람을 죽여버리기도 하고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네. / 生能死捨死能生

조선 후기 가사(歌辭)인 「우부가(愚夫歌)」에 나오는 사치하고 방탕한 생 활상 중 돈에 관련된 것으로는 “후할 때는 박하여서 한푼 돈에 땀이 나고 박할 때는 후하여서 수백 냥이 헛것이라”, “주색잡기(酒色雜技) 모두 하여 돈 주정을 무진하네”, “돈을 물 쓰듯이”, “제 아비 덕분으로 돈 천이나 가졌더니 술 한 잔 밥 한술로 친구 대접 하였던가”, “놀음판에 푼돈 떼기”, “혼인 핑계 어린 딸은 백냥짜리 되었구나”, 그리고 월 단위, 일 단위, 장시가 열리는 5일간으로 붙는 이자놀이를 말하는 “월수돈 일수돈에 장별리 장체기며”가 있다.92) 김성배 외 편저, 『주해(註解) 가사문학전집』, 집문당, 1981(중판), pp.266∼272. 돈이 생활과 접대에 다양하게 사용되고 인격을 재는 척도로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부전』도 돈이 경제 생활과 얼마나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끼니를 이어가기 힘든 흥부 내외는 온갖 품을 다 파는데, 그중에 “오 푼 받고 마철 박기, 두 푼 받고 똥재 치기, 한 푼 받고 비매기” 등이 있다. 동전 1개가 1푼이다. “돈 30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으로 감영(監營)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라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흥부는 ‘30냥을 받아 열 냥어치 양식 팔고 닷 냥어치 반찬 사고 닷 냥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를 맞고 와서 몸조섭을 하리라.’ 하고 구상하였다. 놀부에 고용된 째보가 삯을 정하고 박을 켜자 하니, 놀부 마음이 흐뭇하여 1통당 10냥씩 정하였다. 박에서 나온 스님, 무당, 등짐꾼, 초라니, 양반, 사당거사(社堂居士), 왈자 들은 한결같이 놀부에게 돈을 요구하였다.93) 김태준 역주, 『흥부전·변강쇠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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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가 제작된 무렵에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 패물이나 애장품으로 사용된 별전(別錢)이 주조되었다. 별전은 크게 주화식 별전과 변형식 별전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상평통보의 기본 형태를 유지하며, 전면에 왕가 경축 및 삼강오륜을 강조한 각종 길상어(吉祥語)와 오복 문자(五福文字) 등이 새겨져 있는 것이 주를 이룬다. 후자는 공예 의장적 성격이 강하여 종류 와 문양이 다양하며, 예술성 높은 것이 많다. 대부분 별전 속에 사용된 문양은 현실의 감추어진 욕구인 부자 되고 오래 살고 아들 많이 낳고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고 등등을 바라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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