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
  • 4. 고액권
  • 고액권 발행론
이헌창

고액 동전을 주조하자는 논의는 동전을 폐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먼저 이루어졌다. 실학자 이익과 정상기(鄭尙驥, 1678∼1752)는 폐전론이 득세하던 18세기 초에 각각 당육십전(當六十錢)과 당백전(當百錢)의 주조를 주장하였다. 이것들은 각각 상평통보의 60배와 100배에 상당하는 가치의 동전이다. 고액의 동전은 사용하는 데에 불편하므로 점차 소멸되고, 쌀과 무명과 같은 비금속 상품 화폐 체제로 복귀할 것으로 전망하였던 것이다.

폐전론이 후퇴하고 1731년부터 동전 주조가 재개된 후에는 고액전 발행이 전황과 동전 원료 부족의 대책으로서 대두하였다. 고액전의 발행 논의는 1730년대부터 1810년대에 활발하였는데, 이 시기에 전황, 곧 동전의 부족을 경험하였고, 일본에 주로 의존하는 동전 원료가 비싸지고 원활히 공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전의 중량이 줄어들었다. 18세기 전반에 일본으로부터 은의 유입이 격감하고 두절됨에 따라 고액권인 은화가 화폐계에서 점차 사라졌는데, 이것도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을 높였다.

고액권 발행론은 상평통보의 수 배 내지 수십 배 가치의 동전을 만들자 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에서 10배가 되는 당십전(當十錢)을 주조하자는 견해가 가장 많았다. 박문수와 정약용 등은 동전과 더불어 은화를 병행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은 공급의 부족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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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의 주조를 주장하는 주된 동기는 동전량이 부족한 애로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고액 거래와 원격지 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동기도 작용하였다. 1735년 호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은 고액권을 제조하여 소액 동전과 병용하면 고액 거래에도 편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동전은 중량이 무거워 운반과 고액 결제에 불편하였던 것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의하면, 허생이 변산의 도적들에게 돈을 힘껏 지고 가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니, 뭇 도적이 돈을 다투어 지려고 했으나 100냥을 채우지 못하였다. 동 가격에 따라 동전 무게가 변하였는데, 동전 1개가 1.6전중(錢重)이라면, 100냥은 60㎏이 나간다.

박지원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재직 중이던 1792년 친지 김이소(金履素)의 우의정 임명을 축하하는 편지와 함께 보낸 「하김우상서별지(賀金右 相書別紙)」에서 당면 화폐 문제인 전황에 관한 예리한 진단과 처방책의 일환으로 고액권 유통을 위한 뛰어난 방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정부는 전황의 대책으로 중국 동전의 수입을 의도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은으로 중국 동전을 수입하면 경비를 빼더라도 이익이 5∼6배여서 역관(譯官)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중국 동전의 소재 가치가 상평통보보다 훨씬 가벼운 만큼 물가의 등귀와 화폐 제도의 문란을 낳을 것이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증명되었다.

박지원이 생각한 전황의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 돈중(敦重)하고 견후(堅厚)한 구전(舊錢)을 2문전으로 삼으면, 백만 냥이 생긴다. 둘째, 1752∼1753년간 주조된 동전은 신제(新制)에도 맞지 않고 매우 박열(薄劣)하므로, 통용을 정지하면 물가가 안정될 것이다. 셋째, 은화의 통용을 장려한다. 은화의 유출을 막기 위해 5냥·10냥의 은화를 주조하고 약재와 같은 필수품이 아닌 것의 수입은 규제한다. 넷째, 수입해 온 중국 동전은 의주에 보관하였다가 중국 사절의 여비에 충당한다. 이것은 실현 가능한 합리적 방안들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점에서 최상의 전황 대책이었다.

박지원은 국제 화폐인 은화가 유출되는 것은 중국 사행이 경비 조달을 위해 천년을 두어도 부서지지 않을 은을 가져가서 삼동(三冬)만 쓰다가 봄이면 해어져 버리는 모자와 바꾸기 때문이니, 천하의 졸계(拙計)로 보았다. 그래서 필수품 외의 수입을 금지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은 무역 이익에 관한 예리한 인식으로 서양 중상주의 시대의 중금주의(重金主義)에 상통한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도 마찬가지로 중금주의적 견해가 제시되어 있어서, 이러한 인식은 북학파 공동 연구의 성과로 보인다.

정약용은 북학파의 이러한 고액권 발행론을 계승하였다. 그는 품질이 조악한 동전 10개로 당십전을, 100개로 당백전을 주조하여 품질이 양호한 구전과 더불어 통용하자고 하였다. 그는 금·은·동을 소재로 하는 9종 화폐의 주조를 제안하였다. 그는 서양 금·은화의 지식을 가졌다. 금·은을 화폐로 삼으면 금·은의 중국 유출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래서 고액 거래와 원격지 거래에는 고액권을 사용하고 소액 거래에는 구전을 사용하면 불편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런데도 1866년 당백전이 주조되기 이전까지 왜 고액권이 발행되지 않았던가? 첫째, 고액권이 나와 소액권이 유통계에서 줄어들면, 서민의 경제 생활에 불편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1735년 송진명의 고액권 발행 주장에 대해 영조는 이 점을 우려하였다. 유교의 안민 이념은 소민 보호를 위한 소액권의 유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한국보다 시장이 더욱 발달한 중국에서도 칭량 은화가 있었지만 동전을 본위화로 삼는 사상은 청나라 말까지 뿌리 깊게 존속하였다. 둘째,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고액권 주조가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 우려되었다. 셋째, 뇌물과 도적의 성행이 우려되었다. 폐전론을 낳았던 도덕 경제론이 그것이 사라진 다음 고액권 발행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지금도 뇌물 성행 등의 문제가 10만원권 발행론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고액권 기피론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조선시대에는 고액권이 부재한 점에서 그것은 지나쳤다. 넷째, 조선 내에는 도시 시장과 원격지 유통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고액 거래에 편리한 은화의 필요성은 덜 절박하였다. 달리 보면, 유교의 상업 경시관이 시장 경제 상층의 활성화를 위한 고액권의 공급에 소극적인 자세를 낳았다. 다섯째, 19세기 전반에 갑산 동광의 개발을 비롯하여 동 채굴이 활발해지고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됨에 따라, 고액권 주조 유통 논의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소액이고 무거운 동전은 대규모 거래와 고액 거래에 불편하였는데, 18∼19세기에는 신용 거래 수단으로 환(換)이 사용되면서 원격지 유통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현금 대신 보내어 결제하는 환은 무거운 동전의 운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개성상인, 곧 송상(松商)이 18세기 후반에 서울, 강경, 전주, 강릉 등지와 활발한 환 거래를 하였음은 그 들의 부기책에 드러나 있다. 지방 관청에서는 환을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1786년부터 시작되는 송상의 부기책에 의하면, 환 거래의 규모는 보통 400∼600냥이었는데, 19세기에는 수천 냥의 환 거래도 이루어졌다.101) 홍희유, 『조선상업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 pp.25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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