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1. 개항 이후 외국 화폐의 유통과 당오전·평양전 주조
  • 개항과 외국 화폐의 유통
도면회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1882년 이후 청나라 및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서구 열강과도 조약을 맺었다. 이 국가들과 교역 관계를 열자 조선 사회에는 외국 상품은 물론 은화·지폐와 같은 근대적 화폐도 유통되었다.

조선의 대외 무역액은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과 청나라를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무역 품목별로 보면 조선은 일본에 쌀·콩 등 곡물과 소가죽을 수출하고, 영국산·일본산 면포를 수입하는 구조였다. 수입품 중 외국산 면포는 하급 관료와 중인, 상인층, 지주·부농층의 의복 제조에 사용되었는데 1894년경에 이르면 국내 면포 시장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수입량이 증가하였다. 청나라와의 무역에서는 인삼·종이 등 몇 가지를 수출하고 서양 면제품과 고급 직물, 비단류 등을 수입하였는데, 항상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많았기 때문에 무역 적자액은 금·은 등으로 지불하는 구조를 형성하였다.

외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개항장이나 양화진·한성 등 개시장 (開市場)에서는 멕시코 은화와 청나라의 마제은(馬蹄銀), 일본 은화·지폐, 러시아 루블 은화 등 외국 화폐가 유통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은화는 멕시코 국내뿐 아니라 남·북아메리카를 비롯하여 필리핀·중국·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멕시코 은화가 장기간에 걸쳐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중량이나 품위가 일정하여 가치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후반 동아시아에서 유통하고 있던 멕시코 은화의 평균 중량은 416.5그레인(약 27g), 순은 함량 374그레인(약 24g)이었다. 멕시코 은화는 단순히 서양 화폐로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적 화폐 제도로 개편할 때 모범 역할을 하였다. 일본도 서양과 같은 화폐 제도를 도입할 때 멕시코 달러를 모방하여 은화를 주조하였는데 그것이 곧 1엔 은화 즉 원은(圓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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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은화
멕시코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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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은화
러시아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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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은화는 개항 이전에는 주로 청나라 상인에 의해 조선에 유입되고 개항 이후 특히 1883년 각 개항장에 해관이 설치된 이후 관세 수납 화폐로 유통되거나 국제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 이후에 위조된 멕시코 은화가 많아지면서 신용이 점점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일본 은화에 그 지위를 넘겨주었다.

마제은은 청나라에서 사용되던 은지금(銀地金)인데 모양이 말발굽과 비슷하여 조선에서는 말굽은 또는 마제은이라고 불렸고 청나라에서는 은냥(銀兩)·은정(銀錠)·보은(寶銀) 등으로도 불렸다.

마제은은 조선 후기 청나라와의 조공 무역을 통해 유입되었다. 궁중에서는 이를 비축하고 있다가 각종 국가 행사 비용에 필요한 물품을 시전에서 조달한 후 그 가격에 해당하는 만큼 대가로 지불하였다. 민간에 대량 유통된 것은 1894년 청일 전쟁 때 청나라 군대의 군수품 대금으로 일시에 대량 유입되면서부터였다. 조선에 유입된 마제은의 중량은 약 1근(600g) 정도였고 대·중·소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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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은
마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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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은화나 마제은보다 더욱 널리 유통된 외국 화폐가 일본 1엔 은화와 지폐였다. 1엔 은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상품 수입이 늘어나면서 신용도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유통 범위도 넓어졌다. 1893년에 이르면 멕시코 은화는 위조가 많아져 하나하나 품질을 검사한 데 비해 1엔 은화는 개수만 헤아려 주고받을 만큼 신뢰를 받았다.

은화와 태환되는 지폐, 즉 일본은행 태환권(이하 ‘일본 지폐’라고 함)도 휴대·운반·계산의 편리성으로 인해 유통량이 늘어났다. 1892년경에는 조선인이 일본은행권을 매우 신용하여 일본은행권 100엔에 대하여 은화 102∼103엔을 주고 교환할 정도가 되었다. 고려 후기에도 지폐가 유통된 적 있었으나 당시에는 일본은행과 같은 근대적 금융 기관이 아니라 정부에서 임의로 발행한 것이고 은화와 교환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은행 태환권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유통된 은행권 지폐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화폐가 유통하면서 조선 화폐인 엽전과 교환될 때 오늘날과 같이 환율이 성립되었다. 즉, 일본 상인이 조선 상인에게 상품을 구입하려면 조선 화폐가 필요하였고, 조선 상인 역시 일본 상인에게 상품을 구입하려면 일본 화폐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양국 화폐 사이에 환율이 성립하였는데, 이를 일본 상인은 ‘한전상장(韓錢相場)’(이하 ‘엽전 시세’라고 함)이라 불렀다. 개항 직후에는 은화 1엔, 곧 일본 동전 10관문(貫文)과 같은 무게의 엽전(5냥∼6냥 6전)이 대등하게 교환되었다. 이를 거꾸로 계산하면 엽전 1관문(10냥)은 일본 화폐 2엔(5냥으로 교환될 경우) 내지 1엔 50전(6냥 6전으로 교환될 경우) 정도와 교환되고 이러한 환율을 엽전 시세 20할(2엔, 1관문) 내지 15 할(1.5엔, 1관문)이라 불렀다. 이는 일본 동전과 조선 엽전이 모두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고 있어 같은 무게의 동전은 같은 실질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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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엔 은화
일본 1엔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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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 시세는 양국 화폐의 실질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만 무역 수지에 따른 양국 화폐의 수요 공급 관계에 의해서도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의 수출량(주로 쌀·콩·소가죽·금 등)이 증가하면 엽전에 대한 수요가 일본 화폐에 대한 수요보다 커지므로 엽전 시세가 높아졌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의 수입량(주로 면포류와 잡화)이 증가하면 이에 대해 지불해야 할 일본 화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므로 엽전 시세가 낮아졌다.

1883년 이후에는 위조가 많은 멕시코 은화나 계산·휴대·운반이 불편한 엽전보다 일본 은화나 지폐가 더욱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리아문 등 각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 또는 세창양행(世昌洋行)·이화양행(怡和洋行) 등 외국인 회사에 갚아야 할 원리금을, 해관세로 징수한 일본 지폐로 태환하여 송금하라는 등의 훈령이 빈발하였다.

1891년경이 되면 개항장뿐만 아니라 대구·전주·강경 등 대도시에서 조선인 관리나 상인 등이 엽전을 일본 지폐로 바꾸어 가는 자가 많아졌다. 일본 은화는 어느 지방에서나 인기를 누려 부유한 집은 엽전을 일본 은화로 바꾸어 축장할 만큼 일본 화폐에 대한 신용도가 높아졌다.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발을 보였던 유생들도 1893년 세자 탄신 기념 과거에 응시하면서 대부분 엽전을 일본 지폐로 바꾸어 와 한성에서 다시 엽전으로 교환하여 사용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일본 화폐의 조선 내 유통량은 청일 전쟁 직전 약 100∼150만 엔 정도였는데, 이는 1893년경 조선 국내 엽전 총유통량 800∼1,000만 엔의 약 12.5∼15%나 되는 비중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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