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1. 개항 이후 외국 화폐의 유통과 당오전·평양전 주조
  • 정부 재정의 궁핍과 당오전·평양전 주조
도면회

조선 정부의 재정은 1876년 개항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개항 후 새로 지출해야 할 예산 항목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양 열강과의 외교 관계 수립, 일본으로의 수신사·신사유람단 파견, 청나라로의 영선사 일행 파견, 미국으로의 보빙사 파견, 개항장에 항만·해관 등의 설치, 신식 군대의 설치 및 근대적 무기 구입, 1882년 임오군란이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한 배상금 지불 등 새로운 지출 항목이 늘어나면서 정부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빠졌다.

재정 수입을 늘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화폐 주조였다. 국왕의 허가를 받아 1881년 9월 호조의 주전소와 기계사(機械司)가, 10월 20일 통리기무아문과 무위소가, 11월 감공사(監工司)가 각각 주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조 이익만 가지고는 궁핍한 재정을 해결하기 힘들었다. 정부 내에서는 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둘러싸고 격론이 전개되었다. 청나라 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주선으로 1882년 조선 해관 총세무사로 부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e Möllendorf, 목인덕(穆麟德))는 명성 황후 척족인 민영익·민영목과 함께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옥균은 그러한 보조 화폐는 목전의 이익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책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재정 궁핍을 해결한 후 서양·일본과 같이 본위 화폐와 보조 화폐를 갖춘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은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가 시도한 차관 교섭이 실패함으로써 민씨 척족의 정치적 승리로 돌아갔다.104) 이석륜, 『신고(新稿) 한국 화폐금융사 연구』, 박영사, 1984, pp.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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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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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2월 18일부터 금위영(禁衛營)·만리창(萬里倉) 등 세 곳에서, 4월과 6월에는 강화도와 의주에서 각각 당오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1883년 7월 5일에는 주전 사업을 상시적인 사업으로 전환하고 서양의 화폐 주조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 화폐 제도를 수립하려는 구상하에 전환국(典圜局)을 신설하였다. 전환국 관리에는 민태호, 총판에는 이중칠, 방판에는 안정옥·권용철 등이 임명되었고, 전환국은 별도 관아를 짓기 전까지 창덕궁 좌측 원서동의 큰 집을 임시 사무소로 사용하였다.105) 오두환, 『한국 개항기의 화폐 제도 및 유통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4, pp.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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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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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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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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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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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정부는 전환국 설치 이후에도 다른 곳에서 당오전을 주조하였다. 1883년 여름만 해도 주요한 주전소가 세 군데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평양 주전소는 대대로 평안도 관찰사 자리를 독점한 민씨 척족이 운영하고 있었다. 강화도 주전소는 조영하·한규직 등 민씨 척족과 친밀한 인물들이 관리하였는데 평양보다 품질이 양호한 당오전을 주조하였으며, 삼청동 주전소는 전환국이 직영하는 주전소로 비교적 품질이 높은 당오전을 주조하였다.

당오전은 1푼 엽전(이하 ‘당일전’이라 함)과 마찬가지로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일종이지만, 금속 성분의 실질 가치가 2∼3푼밖에 되지 않는데 5푼의 법정 가치로 유통된 악화(惡貨)였다. 게다가 정부에 일정한 상납금을 내고 특허를 얻어 민간에서 사주하거나 몇몇 개인이 비밀리에 위조하는 당오전은 품질이 조악한 경우가 많았다.

당오전은 1883년 5월 5일부터 그동안 밀렸던 관리들의 봉급과 공물 대금으로 지출되면서 곧바로 한성 시내 물가를 급등시켰다. 정부에서는 허가받은 관청 외에 주전 원료인 구리와 납을 사사로이 매매하거나 당오전을 위 조하는 자를 처벌하겠다는 명령을 발하였다. 10월에는 전환국에서만 당오전을 주조하고 다른 주전소에서는 당일전만 주조하도록 조치하더니 급기야 12월 21일에는 전환국 외의 주전소를 모두 철파하고 말았다. 그러나 위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당오전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청나라인에 의해서도 계속 위조되었다.

정부는 당오전 주조를 잠시 정지했다가 당오전 유통 지역이 다소 넓어지자 다시 당오전을 주조하였다. 1887년 4월 18일 경남 창원에서, 1888년 5월에는 서강(西江)의 복파정(伏波亭)과 탁영정(濯纓亭)에서 당오전을 주조하게 하고, 8월에는 한성의 민간인 3개 처에도 세금을 상납하는 조건으로 주전을 허가하였다.106) 오두환, 위의 글, pp.184∼185. 지속적인 당오전 남발로 인하여 1891년에 들어서면 당오전은 시장 상거래에서 5푼이 아니라 2∼3푼으로 유통하게 되었다.

화폐가 민간에서 유통되는 가치가 실질 가치 수준까지 하락하면 더 이상 화폐 주조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정부는 1889년 3월 모든 당오전 주조를 중지하였다. 이번에는 주전 원료인 구리·납 산지와 가까운 평양에 전환국 분소를 설치하고 민씨 척족인 평안 감사 민병석의 관리하에 당일전을 대량으로 주조하게 하였다. ‘평양전’이라 불리던 이 당일전은 기존의 당일전과 비교할 때 중량이 3분의 1도 안 될 뿐 아니라 금속 성분도 극히 조악하여 전체 주조액의 약 16%에 해당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107) 도면회, 「화폐 유통 구조의 변화와 일본 금융 기관의 침투」, 『1894년 농민 전쟁 연구』1, 역사비평사, 1991, p.227. ‘평양전’은 발행되자마자 원산항과 경인 지방·남부 지방 등에 유입되면서 당오전·당일전 시세를 더욱 폭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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