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1. 개항 이후 외국 화폐의 유통과 당오전·평양전 주조
  • 당오전·평양전 남발의 영향
도면회

정부는 악화 남발로 막대한 주조 이익을 얻었지만 백성은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 당오전은 정부가 관리의 봉급과 공물 대금을 지급할 때 및 조세금 상납을 받을 때 법정 가치인 5푼으로 수수되었다. 그러나 개항장에서는 당오전에 포함된 금속의 실질 가치대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당오전을 남발한 만큼 일본 화폐와의 교환 비율(이하 ‘당오전 시세’라 함)이 계속 하락하여 실질 가치에 근접하였다.

그리하여 당오전 1관문(200매 5푼=10냥)과 등가로 교환되는 일본 화폐액은 1883년 1엔 90전에서 1888년 74전 2리, 1894년 5월 30전으로 점차 적어졌다. 특히, 1892∼1894년간 3개년 평균을 보면 경인 지역 당오전 시세와 부산항 당일전 시세는 거의 1 대 5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곧 법정 가치 5푼인 당오전 1매가 법정 가치 1푼인 당일전 1매와 같은 값으로 유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경인 지역 상인들은 당일전을 용해하여 동지금(銅地金)으로 수출하거나 시세가 더 높은 다른 지역으로 유출하였다. 이처럼 악화인 당오전이 양화인 당일전을 유통계에서 쫓아내는 현상을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한다. 따라서 당오전이 계속 남발되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악화인 당오전만 유통계에 남아야 할 것이지만, 이 법칙의 관철을 막는 요인이 있었다.

<표> 1883∼1894년 사이 당오전·당일전의 연평균 시세
단위 : 할(割)
연도
지역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경인 지역 19.00 11.02 7.60 6.00 5.96 7.42 6.61 5.50 3.97 3.28 2.91 3.00
부산항 26.68 18.96 17.10 15.20 15.70 15.20 15.00 19.60 19.20 16.20 14.40 15.00
✽경인 지역은 당오전 시세이고 부산항은 당일전 시세임. 1894년은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4년 5월의 시세임.
✽오두환, 『한국 개항기의 화폐 제도 및 유통에 관한 연구』, 서울 대학교 경제학과 박사 학위 논문, 1985, 208∼210쪽 ; 도면회, 「갑오개혁 이후 화폐 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한국사론』 21, 1989, 388쪽.

첫째는, 지방 아전들이 조세금을 한성까지 직접 수송하지 않고 한성 객주와 환 거래 관계가 있는 상인의 도움을 얻어 어음만 들고 상경한 후 그 어음 액수만큼의 당일전을 한성 객주에게 추심하여 상납함으로써 당일전 수송비(이하 ‘태가’라 함)를 착복하는 행태가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지방의 당 일전은 그대로 지역 내에서 유통하고 한성의 당일전만 정부로 흡수되는 셈이다.

둘째는, 정부가 조세금을 당오전으로 상납하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은 조세금을 당일전으로만 받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앞의 첫 번째 행태와 연관되어 있다. 즉, 지방관이 측근 인물이나 아전을 시켜 민간에서는 당일전으로 징수하고 이 돈으로 지방에서 상품을 구입하여 한성에 운반 판매하거나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로 교환하여 상경, 상품이나 일본 화폐를 당오전으로 환전 상납하게 할 경우 환 차액은 물론 운송 비용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표 ‘1883∼1894년 사이 당오전·당일전의 연평균 시세’에 의하면 1884년의 경우 당일전 10냥(1관문)을 일본 화폐와 교환하고 다시 당오전으로 바꾸어 상납할 경우 환 차액은 당일전으로 4냥 1전 9푼이 되었다. 당오전 시세가 폭락한 1892∼1894년간이 되면 이 환 차액은 약 8냥이나 되었다.

이처럼 지방관이 민인(民人)들에게는 당일전으로 징수하고 당오전으로 환전 상납하는 행태가 존재하는 한, 당오전 유통 지역은 확대될 수 없었다. 이것이 조선에서 ‘그레샴의 법칙’이 작용하지 못하게 한 주요인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 당백전·청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민인들이 당오전을 수수하기 꺼려한 점도 부분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94년까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은 당오전이 유통하지 못하고 당일전 유통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즉, 화폐 유통 구역이 당오전 지역과 당일전 지역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정부로서는 당오전 유통을 권장할수록 당일전과 당오전의 환전 차액만큼 재정 수입이 감소되기 때문에 당오전 발행 직후 인민에게서 조세금을 징수할 때 당오전으로 징수하라는 훈령을 발하였다. 훈령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이듬해 1월에는 당일전이든 당오전이든 민간에서 징수하는 대로 상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1885년경에는 충청·황해도, 전라도 의 일부에 당오전이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1888년경에 이르면 경기도는 전 지역, 충청도는 한산·홍산·홍주·강경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 황해도는 신계·곡산·지석(支石)장터 등 한두 개 군 외의 모든 지역, 강원도는 3분의 1 지역에서 당오전이 유통하게 되었다.

정부도 이제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880년대 후반에 들면 당오전이 유통하지 않는 지역의 지방관에게 당오전 시세를 반영하여 상납하라는 훈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훈령이다.

경상도의 각종 상납해야 할 전환(錢還)으로서 1889년 상납분부터는 반드시 지역 내에서 통용하는 당일전으로 백성에게서 징수하여 그대로 중앙에 상납하라. 혹시 당오전으로 바꾸어 상납할 경우에는…… 당일전 6전을 당오전 1냥으로 환산하여 각 서리배로 하여금 직접 납부하게 하라.108) 『각사등록(各司謄錄)』 권16, 경인 윤이월오일 순감(庚寅閏二月五日巡甘), p.510.

당일전 6전(60매)을 당오전 1냥(20매)으로 환산한다는 것은 당오전 1매를 당일전 3매와 등가(等價)로 취급한다는 의미이다. 표 ‘1883∼1894년 사이 당오전·당일전의 연평균 시세’에서 이 훈령이 내려간 시점인 1890년의 당오전 시세와 당일전 시세는 거의 1 대 3의 비율을 보이고 있어 이 조치가 당오전 시세가 하락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1년 이후에는 당오전과 당일전이 동일한 모양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점을 이용하여 같은 돈꿰미에 섞어 유통시키는 행태가 경인 지방을 중심으로 일반화되었다. 이제 당오전과 당일전을 구별하는 데 과다한 비용과 불편이 따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재정 손실을 입게 된 정부는 당일전을 당오전에 섞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화폐 유통 지역이 당일전과 당오전 지역으로 양분화되는 한편, 당오전 유통 지역에서는 물가가 폭등하였다. 예컨대 한성에서는 1882∼1893년간 쌀 1되 값이 4전 4푼에서 4냥 3전으로 10배, 면포 1필 값은 22냥에서 138냥으로 6배 폭등하여 고정 수입으로 살아가는 하급 관료나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외국 상품의 수입·판매업자도 당오전·당일전 등 엽전 시세 하락에 따라 상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 인해 판매 상황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설사 상품을 팔더라도 엽전 시세가 하락 일로였기 때문에 판매 대금으로 받은 엽전을 일본 화폐 등 가치가 안정된 화폐로 교환하는 데 곤혹스럽게 되고 그로 인해 손실을 입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로 수입 상품을 판매하던 청나라 상인은 1890년 전후부터 큰 손해를 입어 1893년에는 조선 상인과 거래할 때 상품 대금을 외상으로 거래하지 말고 모두 현금으로 받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엽전 시세 하락으로 이득을 보는 층도 있었다. 쌀·콩 등 곡물 수출을 할 여유가 있던 부농과 지주, 그리고 이에 종사하던 곡물 상인은 엽전 단위로 계산된 상품 대금이 급등하였기에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당일전과 당오전 사이의 시세 차이에 착안하여 환전 행위를 거듭함으로써 그 차액을 축적해 가던 상인층도 거액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관료층도 이러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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