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2. 근대적 화폐 제도 도입과 백동화 남발
  • 청일 전쟁과 은본위 화폐 제도의 도입
도면회

조선 정부는 당오전을 남발하면서도 근대적 화폐 제도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 시도로 1882년 10월경 대동일전(大東一錢)·대동이전·대동삼전이라는 세 종류의 은화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이들 주화는 발행되자마자 부호의 수중에 들어가 축장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버려 상거래에서 사용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원료로 사용되던 마제은 가격이 오르고 구입도 어려워져 1883년 6월 이후 주조가 정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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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부는 외국 차관을 도입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금·은 화폐를 발행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는데, 그 결실이 경성 전환국의 설치였다. 정부는 1885년부터 전환국 신축 계획을 수립하여 독일계 상회사 세창양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약 3만 원에 해당하는 전환국 기계를 독일로부터 수입하였다. 당시 수입된 조폐 기기는 압인기, 압연기, 압사기, 선반, 절단기, 착공기, 자동 평량기, 연마기, 압차기(壓車機), 기기(汽機), 기관(汽罐) 등이었다. 이어서 세 명의 독일인을 조폐 기술자로 초빙하였으며 1887년 10월에는 남대문 근처에 경성 전환국을 완공하였다.109) 이석륜, 앞의 책, pp.220∼223.

아울러 주화 제조에 필요한 원형 소전(素錢)과 각인(刻印)도 독일에서 수입하였으나 조각이 선명하지 못하여 일본인 기술자를 도입하여 각인을 완성하게 하였다. 독일에서 도입한 각인은 금화 20원(圜)·10원·5원·2원·1원, 은화 1원·5냥·2냥·1냥·반냥, 적동화 20푼·10푼·5푼·2푼·1푼 등 총 15종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888년 1원 은화, 10푼 적동화, 5푼 적동화 등 세 종류 약 5,300원 가량을 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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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압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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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주조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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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 제조는 정부 재정의 부족으로 시험 단계에 그치고 말았으나 조선 정부의 구상은 1891년에 가서 구체화되었다. 1891년 고종의 밀명을 받은 전환국 방판(幇辦) 안경수는 일본에서 오사카 제동 회사 사장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를 만나 화폐 개혁에 필요한 자금 20만 엔 차관 계약을 체결하였다. 5년간 일본인을 고용하여 신식 화폐 주조 사무를 관리하게 하고 주조 이익금의 4분의 1을 마스다에게 주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다른 한편 신구 화폐를 교환할 교환국 업무를 담당할 책임자로 일본 제58은행 은행장인 오미와 쵸베(大三輪長兵衛)를 초빙하였다. 오미와는 교환국 업무와 관련하여 인천에 일본 제58은행 지점을 개설하고 전환국에서 주조할 신화폐와 구화폐 교환을 취급하고자 하였다. 그는 1891년 8월 「신식 화폐 조례」를 기초하고 1892년 11월에는 경성 전환국과 별도로 인천 전환국을 준공하였다.110) 오두환, 앞의 글, pp.115∼117. 인천 전환국에서는 연말까지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 동화, 1푼 황동화 등 다섯 종류 합계 23만 5,000여 엔 정도의 화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일본 화폐와 품위·중량·가치를 거의 같이 하는 것이었다. 즉, 5냥 은화는 일본의 1엔 은화, 1냥 은화는 일본의 20전, 2전 5푼 백동화는 일본의 5전, 5푼 적동화는 일본의 1전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다만 1푼 황동화는 구 엽전 1매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본 화폐에는 이에 해당하는 것이 없었다.

이와 아울러 정부는 태환서(兌換署, 교환국·교환서로도 부름)를 설립하고 새로 주조한 화폐와 구화폐의 교환 정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태환서에서는 50냥·20냥·10냥·5냥 액면을 가진 호조 태환권을 발행하여 우선 구화폐와 교환한 다음 신화폐의 발행량이 충분하게 되면 이 호조 태환권을 다시 신화폐와 교환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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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주조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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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주조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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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식 화폐 발행 계획은 일본인 마스다와 오미와 사이에 화폐 주조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한 데다가 청나라 관리 위안 스카이(袁世凱) 및 미국·독일의 공사로부터 강력한 외교적 압력을 받아 순조롭게 추진되지 못하였다. 당오전·평양전 주조를 통해 막대한 주조 이익을 얻던 정병하·민영준 등도 신식 화폐 발행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내외의 압력과 화폐 개혁을 둘러싼 이권 쟁탈로 신화 발행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고종은 신화 발행 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1894년 중반 경에는 「신식 화폐 발행 조례」를 실시할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894년 중반 동학 농민 전쟁과 청일 전쟁이라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을 맞이함으로써 신식 화폐 발행 계획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생한 농민 항쟁이 3월에 전국적 농민 봉기로 이어지고 4월 27일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 생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정부가 요청한 청나라 군대가, 뒤이어 일본 군대가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양국 사이에 조선 내정 개혁을 둘러싼 교섭이 결렬되고 6월 23일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이틀 앞서 일본군의 보호하에 권력을 장악한 친일적인 개화파 세력과 흥선 대원군 계열이 6월 25일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곧 갑오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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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태환권 원판
호조 태환권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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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제도와 관련해서는 조세 종목의 통폐합과 금납화, 당오전의 당일전으로의 흡수, 신식 화폐 발행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개화파 정권은 같은 해 7월 10일 쌀·콩·삼베·면포·엽전 등 다양한 종류로 수납하던 각종 조세를 10월부터 화폐로 통일시킨 데 이어, 8월 22일에는 정부의 모든 지출 항목도 화폐로 통일시켰다. 수십 가지에 달하던 조세 종목도 결세와 호세로 통합하고 결세는 1결당 최고 30냥, 호세는 1호당 3냥으로 정하였다. 이들 조치에 의하여 화폐는 조선 민인의 경제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활 수단이 되었다.

7월 8일에는 당오전·평양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당오전과 당일전의 혼용을 엄금하고, 당오전과 당일전이 섞여 있을 경우에는 그 당오전을 1푼 가치로 계산한다고 공표하였다. 조세금 수입과 정부 지출은 모두 당일전 단위로 환산해서 시행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당오전은 당일전과 동일한 가치로 유통하게 되었으나 당오전이 유통하던 경인 지방 등에서는 당일전 유통 지역과 화폐 환산 단위를 달리 하게 되었다. 즉, 당오전 유통 지역에서는 당오전이든 당일전이든 모두 200매를 1관문으로 계산하거나 ‘당오 몇 냥’이라 하여 당오전임을 명시하 였다. 반면 경상·전라·함경도 등 당일전 유통 지역에서는 당오전이나 당일전이나 무조건 1,000매를 1관문으로 계산하게 되었다.111) 도면회,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 『한국사론』 21, 서울대 국사학과, 1989, pp.377∼384.

이러한 조치는 1892년 이후 당오전 1매와 엽전 1매가 실제 상거래에서 동일한 가치로 유통하고 있던 상황을 추인함과 동시에 화폐 가치의 통일을 기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명령에 따라 당오전 1매를 엽전 5매의 가치로 사용하던 민인들에게는 자기가 소유한 당오전 가치의 5분의 4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방관·아전들이 법령을 잘 모르는 민인들을 수탈하기도 하였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농민들에게 환곡을 지급할 때 예년과 달리 당오전으로 지급하고 원리금을 받을 때는 당오전이라도 모두 당일전으로 계산하고, 1호당 195푼씩 내던 호포전도 900푼으로 5배 징수하는 행태가 나타났다. 이러한 수탈은 당오전이 대량 유통하던 경기·충청·황해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 1894년 가을 동학 농민군이 재차 봉기할 때 황해도 지방 농민군 대열에 ‘당오전이 당일전이 되어 손실을 보고 분노한 무리’가 참가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112) 도면회, 앞의 글, 1991, pp.233∼234. 정부는 당오전과 당일전의 가치를 동등화시키는 조치에 이어 7월 11일 다음과 같이 「신식 화폐 발행 장정」(이하 「장정」이라 함)을 반포하였다.113) 『구한국관보』개국 503년 7월 11일자.

제1조 신식 화폐는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 4종으로 나눈다.

제2조 화폐 단위의 최저는 푼(分)으로 하며 10푼을 전(錢), 10전을 냥(兩)으로 한다.

제3조 화폐는 5등급으로 나눈다. 최저 1푼은 황동화, 다음 5푼은 적동화, 다음 2전 5푼은 백동화, 다음 1냥 은화, 그리고 5냥 은화를 최고 등급으로 한다.

제4조 5냥을 본위화로 삼고 1냥 이하는 모두 보조화로 삼는다. 1냥 은화로 거래할 때는 1회에 100냥을 한도로 한다. 백동화 이하의 화폐 로 거래할 때는 1회에 5냥을 한도로 한다. 단, 거래자 사이에 상호 허락할 때에는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제5조 신식·구식 화폐를 모두 통용시켜 유통을 넓히며 그 비례는 다음과 같다.

/ 1푼 황동화는 구엽전 1매 / 5푼 적동화는 구엽전 5매

/ 2전 5푼 백동화는 구엽전 25매 / 1냥 은화는 구엽전 100매

/ 5냥 은화는 구엽전 500매

제6조 은화로 수입 지출하기로 한 각종 항목의 조세 및 봉급은 가능한 한 은화를 사용하되, 형편에 따라서는 구엽전을 대신 사용할 수도 있다. 구엽전을 사용하기로 규정된 것은 제5조의 비례를 따른다.

제7조 신식 화폐를 다량 주조하기 전에 잠시 동안 외국 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 단, 본국 화폐와 동질 동량 동가인 것만 유통시킨다.

이는 앞서 1891년에 준비된 「신식 화폐 발행 조례」를 거의 그대로 공표한 것이다. 이로써 은화를 본위화로, 동화와 엽전을 보조화로 삼는 근대적 화폐 제도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실시되었다. 즉, 한국도 중국·일본과 마찬가지로 은본위 화폐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화폐 단위는 1냥=10전=100푼의 십진법으로 계산되었다. 그리고 「장정」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5냥 은화가 일본 은화나 멕시코 은화와 동일한 지금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개항장이나 재정 기관인 탁지부·해관 등에서는 관례적으로 그 화폐 단위 엔(圓) 또는 원(元)을 차용하여 사용하였다. 이 경우에는 일본 화폐 단위인 전(錢)·리(厘)도 동시에 사용하여 5냥=1원(元·圓)=100전=1,000리의 방식으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 때문에 본위화인 5냥 은화를 다량 주조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국내 유통에 충분할 만큼의 은화를 다량 주조하려면 해관세를 재정 자금으로 비축하거나 금·은 등 귀금속의 유 출과 유입을 통제하여야 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신식 화폐 특히 본위화의 준비도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화폐 개혁을 실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는 일본이 청일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군수품 대가나 조선인 노무자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는 데 막대한 화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화폐가 개항장에서 신용도가 높아지고 유통량도 늘어났지만, 전쟁 수행 지역인 내륙 지방에서는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군수품 구입 대금이나 인부 고용비를 줄 때는 일본 화폐를 엽전으로 교환하여 지급해야 하였고 이 때문에 엽전 시세가 폭등하기 시작하였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준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화폐와 동질·동량·동가를 갖게 만든 신식 화폐를 시중에 유통시키게끔 1891년의 「신식 화폐 발행 조례」를 시행하게 하였다. 단, 동 조례에는 없던 내용을 제7조로 부가하여 일본 화폐도 당분간 같은 값으로 유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114) 이석륜, 앞의 책, pp.250∼255. 그러나 신식 화폐든 일본 화폐든 조선인이 익숙해지는 데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우선 조선 정부가 7월 20일부터 발행한 신식 화폐 총액은 23만 원에 불과하였을 뿐 아니라, 발행된 사실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한성에서만 주고받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인부 고용비나 군수품 구입 대금을 한국민에게 지불할 때 일본 화폐를 엽전으로 바꾸어야 했으므로 엽전 수요량이 급증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15할 전후였던 각 개항장의 엽전 시세는 1895년 초 25할까지 폭등하였다.

엽전 시세 폭등으로 인하여 일본 측은 「장정」이 반포된 바로 다음날인 7월 12일 일본군의 군수 대금을 일본 화폐나 전표로 지급하게 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조선 정부는 이를 수락하여 각 지방 관청에 중앙으로 상납해야 할 조세금을 일본군 전표를 받고 대여해 주거나 엽전 5냥에 일본 화폐 1엔의 비례로 바꾸어 준 후 일본 화폐로 상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일본 측은 또 조선 정부의 승인을 얻어 평안도 지방에 일본제 면포를 대량 수입 판매 하여 엽전을 조달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 내에는 일본 화폐의 유통량이 급속히 늘어났다. 일본군이 한성에서 의주까지 북진하면서 산포한 일본 화폐는 총 600만 엔(은화 3분의 1, 지폐 3분의 2) 이상에 달하였고 그중 400만 엔 이상이 북부 지역에서 유통하였다. 지폐는 대부분 인부 고용비로 지급되었는데 거의가 5엔권이나 10엔권으로, 인부 10명에 5엔권 2장, 7명에 10엔권 1장 꼴로 지급되었다. 따라서 지폐를 분배하는 데 상당한 곤란이 야기된 데다가 내륙 지방 조선인은 지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지폐를 엽전과 교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엔권 지폐 1장이 법정 환율인 엽전 500매가 아니라 280매와 교환될 만큼 일본 지폐의 시세가 하락하였다.

일본 상인이 수입 판매한 면포는 조선인에게 지폐의 신용도를 높이고 일본 상권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인이 면포를 살 때 일본군에게서 받은 지폐를 사용함에 따라 지폐 시세도 점차 올라, 1895년 6월경에는 1엔권 지폐 1장과 엽전 420∼430매가 교환될 만큼 신용이 확대되었다. 1엔 은화도 처음에는 엽전 340∼350매와 교환되었으나 조선인이 지폐로도 교환하고 귀금속으로 축장하거나 녹여 사용함으로써 신용을 획득하였다. 1895년 6월경이 되면 경기·황해도에서는 1엔 은화가 「장정」에 규정된 법정 비가대로 엽전 500매와 교환되었다.

1897년 후반이 되면 일본 화폐의 총유통량은 300만 엔으로 줄었다. 지폐는 각 개항장과 개성·서울 등 은화와의 태환이 가능한 상업·무역 중심지에서만 유통한 반면, 은화는 개항장뿐만 아니라 평양·원산 이남 내륙의 상업 중심지에서 원활하게 유통하고 있었다. 경인 지방에서는 신식 화폐와 일본 화폐가 유통하면서 엽전의 수요가 감퇴하여 1895년 6월 이후에는 엽전 시세가 성립되지 않고 「장정」에 규정된 대로 일본 화폐 1엔이 엽전 5냥 또는 백동화·적동화 5냥의 비가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륙 지방과 부산·원산에서는 여전히 엽전만 유통 하고 있었다. 일본 은화 1엔도 엽전 500매로 교환되지 않고 화폐 수급 관계에 따라 엽전 500매 전후의 시세로 교환되고 있었다. 즉, 1897년 7월경 일본 은화는 평안·황해·충청·전라도 등 내륙 지방에서는 엽전 510∼560매(17.9∼19.6할)로 법정 가치보다 높게 유통하고 있었고, 부산·원산 등 개항장에서는 480매(20.8할)로 낮게 유통하고 있었다. 이는 내륙 지방에서 일본 은화를 귀금속으로 비축하거나 용해하여 비녀·반지·담뱃대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하여 은화가 비싸게 취급된 반면, 개항장에서는 쌀·콩 등 수출품 대가로 일본 상인이 지불한 은화가 농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에 고액권인지라 은화로 받기를 꺼려하여 은화가 값싸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인 지방에서는 일본 은화가 조선의 본위화처럼 유통한 반면, 여타 지역에서는 여전히 엽전이 지배적이고 일본 은화와 지폐는 조세금 상납과 대규모 거래 시의 고액권 화폐로만 유통하였다. 화폐 제도 측면에서 보았을 때 경인 지방에서는 일본 화폐를 본위화로 삼는 ‘은본위제’가, 여타 지역은 엽전을 ‘본위화’로 삼는 ‘동본위제’가 유지된 셈이다. 그러나 ‘은본위제’ 지역의 엽전이 그레샴의 법칙에 따라 더 높은 가치로 유통될 수 있는 ‘동본위제’ 지역으로 유입됨으로써 ‘동본위제’ 지역의 엽전 시세를 하락시켰으니, 이렇게 보면 ‘동본위제’ 지역도 사실상 ‘은본위제’에 종속되어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화폐 제도에 종속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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