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2. 근대적 화폐 제도 도입과 백동화 남발
  • 일본 제일은행권의 발행과 한국 화폐 주권의 침탈
도면회

백동화 남발을 기화로 하여 한국 주재 일본 제일은행은 독자적인 지폐를 발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제일은행권이다. 일본 제일은행은 개항 이래 부산·원산·인천·한성 등에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하여 일본인의 무역·상업 금융을 지원해 왔으며, 1884년에는 한국 해관세 취급 특권을 얻었다. 해관세는 수출세·수입세·톤세를 합쳐서 1897년 이후 매년 100만 원이 넘었는데, 한국 정부 재정 수입의 15∼30%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제일은행은 해관세를 한국 정부 명의의 예금으로 예치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이 해관세를 담보로 하여 소규모 차관도 제공함으로써 한국 내 금융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지위를 바탕으로 제일은행은 1895년경부터 독자적인 은행권을 발행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1900년 4월 한국 정부가 프랑스계 금융자본인 운남 신디케이트와 화폐 제도 개혁을 위한 차관을 도입하려 하자 위 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제일은행은 이 차관 교섭을 무효화시키는 공작을 펴는 한편, 조약 이행이 잠시 지체된 9월 이후부터 은행권 발행 준비를 서둘렀다. 제일은행은 일본 정부의 승인을 얻은 후 한국 정부에 한마디 통보도 없이 1902년 5월 20일부터 부산·목포·인천·한성 지점에서 1엔권부터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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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발행 제일은행권 10엔권(앞면)
1902년 발행 제일은행권 10엔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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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발행 제일은행권 10엔권(뒷면)
1902년 발행 제일은행권 10엔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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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행은 이 은행권이 오늘날의 자기앞 수표와 유사한 약속 어음이라고 강변하였지만 사실상 지폐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약속 어음의 액면가는 당시 유통하는 화폐의 최대 단위를 초과하는 액수라야 하는데 제일은행권은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 그대로 1엔권·5엔권·10엔권 등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금화와의 태환이 보장된 태환 지폐도 아니고 일본 지폐와의 태환만 보장된 불환 지폐 성격이 농후한 지폐였다. 제일은행권은 금화가 아니라 금화에 기초하여 발행된 일본 지폐를 지불 준비금으로 하여 발행되었으므로 한국 내에서 금융 경색이나 공황 등이 발생할 경우 한국민은 일단 제일은행권을 일본 지폐와 교환한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발권 은행인 일본은행에서 금화와 태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러한 교환은 일반 한국민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은행이 지폐를 발행할 때는 같은 액수의 금화를 지불에 대비한 준비금으로 비축해 두어야 하는데 제일은행은 지불 준비금으로 일본은행권을 70%, 나머지 30%를 일본의 국·공채 등 유가 증권으로 준비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제일은행은 30% 이상의 은행권 발행 이익을 취득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인은 그만큼의 상품 및 노동력을 수탈당하게 된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제일은행권 발행을 감사할 권한이 없으므로 은행권 남발 여부를 단속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제일은행권이 신용을 획득할수록 한국의 화폐·금융은 일본의 일개 사립 은행에 의해 통제되고, 나아가서는 그 자본 창출력에 의해 한국의 상권마저 일본 상인에게 빼앗길 우려가 높은 것이었다. 『황성신문』에서는 제일은행권이 자본력이 미약한 일본인 상인·자본가 등을 지원하여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수행하게 하는 식민지적 화폐라고 비판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 한국 내륙에서 철도·광산·금은·미곡 등 수천 가지 종류의 상공업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영업에 공급할 자본을 오로지 본국에만 의지하기 곤란한 고로 우리 한국에 특별히 적절한 방침을 불가불 강구하려 함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저 영국의 식민 정책을 보니…… 식민지에 필요한 제반 비용은 모두 식민지로부터 배출하게 하여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하니 영국의 식민 정책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는 수단이라. 지금 제일은행에서도 이 정책에 나서는 것인가.122)『황성신문』 광무 7년 2월 16일자.

경인 지역 상인들은 제일은행권이 발행되자마자 수수 불가 의지를 한국 정부에 표명하였고, 한국 정부 역시 이를 받아들여 1902년 9월 11일 「제일은행권 수수 금지령」을 각 지방에 내렸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거센 항의에 부딪쳐 4개월 만인 1903년 1월 8일 금지령을 해제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제일은행권 반대 운동은 화폐 발행 업무를 주관해 왔던 이용익과 황실 보위 세력인 보부상 단체 상무사(商務社), 경인 지방 상인들을 중심으로 1월 15일∼2월 12일, 6월∼11월 등 두 차례나 더 일어났지만 일본 정부의 외교적 압력하에 모두 좌절하고 말았다. 반대 운동으로 인하여 제일은행권 유통량은 1903년 말까지 87만 엔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123) 나애자, 「이용익의 화폐개혁론과 제일은행권」, 『한국사연구』 45, 1984, pp.77∼84.

제일은행권 발행으로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백동화 발행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고종 황제와 이용익이었다. 고종 역시 지폐 발행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은행권은 화폐 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였다. 그의 의지를 받든 이용익은 ‘제일은행권 망국론’을 외치면서 반대 운동을 주도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지폐 발행 계획을 추진하였다. 전환국으로 하여금 지폐 모형을 조각하게 하고 개항장에 출하되는 사금 및 금괴를 매수하여 지폐 발행 준비금에 충당하려 하였다. 그리고 1903년 3월 24일 한국 정부는 「중앙은행 조례」와 「태환 금권 조례」를 반포하여 금본위 화폐 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 금괴 3만 개를 내장원으로 운반 적치하고 8월경 중앙은행 설립 준비에 들어갔으며 1904년 4월에는 태환권 및 백동화 어음을 인쇄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124) 도면회, 앞의 글, 1989, pp.43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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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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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 전쟁은 이러한 계획을 무산시켰다. 지폐 발행을 준비하던 이용익은 일본이 한국 정부에 강요한 「한일 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다가 2월 말 일본으로 납치되었다. 게다가 ‘시정 개선’이라는 구실하에 강제 체결된 1904년 8월의 「한일 협약」에 의하여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11월 28일 전환국을 혁파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지폐 발행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러일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청일 전쟁 때와 같이 군수 비용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화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군용 수표·제일은행권을 대량 발행하여 경비 절약을 꾀함은 물론,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공식 화폐로 승격시킬 준비를 하였다. 일본군은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은본위제 군용 수표를 발행하게 하여 모든 군수비를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백동화 시세가 반으로 떨어졌다는 구실로 백동화 1원에 해당하는 임금 및 물품 대금에 대해 은화 50전에 해당하는 군용 수표를 지급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에 대해 각 지방 인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 공사와 교섭하여 군용 수표 1엔권을 금본위 화폐 89전의 가치로 통용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용 수표는 당초 의도한 만큼 원활하게 유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화폐와 교환할 때 웃돈을 주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 대신 10전·20전·50전 등 소액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게 하여 종잇조각에 불과한 제일은행권으로 한국 인민의 부를 강제 수탈해 나갔다.

<표> 1893∼1905년 사이 한국 내 화폐 유통량
구분
연도
한국 화폐 일본 화폐 제일은행권 일본 화폐로 환산한 총통화량
엽전 백동화 적동화 은화 원 은 일본은행권 보조화
1893 800∼1,000만 엔
700∼800만 관문
             
1894         중북부 200만 엔 중북부
400만 엔
     
1895 600만 엔
이상
7만6천 원
15만 원
9만 원
북부 50만 엔 전체
150만 엔
     
1897 400∼500만 엔
      경기·충청·황해·평안 300만 엔
강원·함경 약 20∼21만 엔
   
1898 500만 엔
200만 엔
    80만 엔
80만 엔
    800∼1000만 엔
1899 700만 엔
110만 엔
20만 엔
5만 엔
50만 엔
150만 엔
3만 엔
  800∼1000만 엔
1900 4∼500만 엔         250만 엔      
1901 420∼480만 관문            
1902   1400만 원 20만 원   53만 엔 87만 엔 10∼20만 엔 62만 엔  
1903               87만 엔  
1904               337만 엔  
1905년
6월 말
650만 엔
1150만 엔
    130만 엔
    607만 엔
2537만 엔
✽‘엔’으로 표시된 것은 일본 화폐 단위 또는 일본 화폐 단위로 환산한 액수이며, ‘원’으로 표시된 것은 한국 화폐 단위임.
✽도면회, 「갑오개혁 이후 화폐 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1894∼1905)」, 『한국사론』 21, 1989, 391∼393쪽.

이제 남은 문제는 제일은행권을 좀 더 많이 발행하고 유통 지역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제일은행권은 일본 지폐와 함께 개항장 상인들 사이에서는 원활하게 유통되고 있었으나 내륙 상업 도시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위조 제일은행권까지 유입되어 신용 확대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위조 제일은행권과 기타 위조 화폐(금·은화, 지폐, 은행권, 증권 및 기타 보조화)에 대한 단속법을 반포하고 제일은행권 신용 강화에 힘썼다. 이같은 단속 조치와 함께 일본군 작전 지역에서의 군수비, 경부선·경의선 철도 공사의 물품 대금 및 인부 임금으로 제일은행권을 지불함으로써 유통 확대에도 힘써 나갔다. 이에 제일은행권 유통고는 크게 증가하여 1904년 말 337만 엔, 1905년 6월 말 약 607만 엔에 달하였는데, 이는 한국 내 전체 통화량의 27%에 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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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행권 10전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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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은행권의 유통이 확대되는 다른 한편에서는 대량의 사주 백동화가 일본 상인에 의해서 평안도 지방으로 밀수입되고 경인 지방의 백동화 중 악화가 대부분 충청도 및 진남포로 유입되면서 백동화 유통 지역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평안·황해·충청도는 대부분 조악한 백동화만 유통하는 상태가 되고 백동화 시세는 10할 이하로 떨어졌다.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말 백동화 유통 지역은 평안·황해·경기·충청도 전역과 강원도의 4분의 3, 전라북도의 3분의 1, 함경도의 일부까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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