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2. 근대적 화폐 제도 도입과 백동화 남발
  • 백동화 남발이 한국인 경제 생활에 미친 영향
도면회

한국 정부의 백동화 남발은 물가 폭등은 물론 상업·무역의 위축, 화폐 유통 지역의 양분화, 조세 부담의 과중화 등 한국 민인의 생활에 다대한 폐해를 끼쳤다. 우선 백동화 남발로 인한 화폐 가치의 하락이 물가 폭등을 초래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한성의 소매 쌀값(상등품 1되)은 1894년 7전 4푼에서 1904년 2냥 6전 7푼으로 3배 이상, 도매 쌀값(벼 1석)은 같은 기간 11냥 3전에서 59냥으로 5배 정도 폭등하였다.

물가 폭등은 노동자·하급 관리 등 화폐 소득 생활자를 궁핍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경인 지방 상인층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들 상인이 취급하던 물품 중 반 이상이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백동화 시세 하락에 따라 동일한 액수의 백동화로 구입할 수 있는 수입품의 양은 계속 적어질 수밖에 없고 백동화로 표시된 상품 가격도 폭등하였다. 따라서 판매량도 대폭 줄어 자본 규모가 작은 상인일수록 파산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점은 일본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200∼300엔 매상고를 올리던 상점도 지금은 2∼3엔의 매상고밖에 올리지 못한다.”라고125) 「韓國白銅貨の由來及濫發の事情」, 『朝鮮協會會報』 제1회, 1902, p.34 하듯이 판로 부진에 빠졌을 뿐 아니라, 일본으로 수입품 대금을 송금할 때 일본 화폐로 교환해야 하므로 백동화 시세가 하락한 만큼 환전 과정에서 손해를 입게 되었다. 수입품 판로 부진은 엽전 유통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백동화 지역의 엽전이 유입된 데다가 각 지방관들이 조세금을 지폐와 교환하여 송금하기 위해 엽전을 대량 운반해 옴으로써 엽전 시세가 폭락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백동화 시세와 엽전 시세가 모두 폭락한 1902∼1903년간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모든 상인층에 동일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수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은 오히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다. 전국 최고의 금 집산지였던 한성에서는 일본 제일은행이 일본 화폐 기준으로 매입 가격을 정하여 금지금을 매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동화 시세가 하락할수록 금지금 중매상 및 생산자들이 백동화로 더 많이 지불받을 수 있어 한성에서의 사금 수출은 크게 호황을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사정은 쌀·콩 등 곡물 매입상 및 생산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백동화 남발 이후 엽전 시세가 하락한 엽전 유통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편, 정부가 본위화를 발행하지 않고 백동화나 엽전과 같은 소액권 화폐만 대량 유통시켰기 때문에 그 유통에 소모되는 비용이 만만찮았다. 예컨대 1900년대 초에 엽전 200냥(2만 매)을 헤아려 90리(36㎞) 정도 운반하려고 하면 임금으로 약 5냥 3전 3푼을 인부에게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 화폐량의 2.7%를 엽전 유통을 위해 소모하는 셈이었다.126) 엽전 1매의 중량은 평균 1.45돈쭝(약 5.4g)이므로, 엽전 1관문(10냥)의 중량은 5.4㎏ 정도였다. 인부 한 명이 하루 종일 헤아릴 수 있는 엽전 수량은 20관문 정도이고, 운반할 수 있는 양은 평균 12관문이었다. 당시 인부 임금은 하루에 2냥 정도였다. 이들 수치를 가지고 계산하면 인부 임금으로 (엽전 계산비 2냥)+(엽전 운반비 20/12×2냥)=5냥 3전 3푼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장에서는 일본 화폐를 사용하여 큰 불편이 없었지만 내륙과 개항장 사이에는 일본 화폐의 유통량이 적고 엽전만 유통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화폐 운반에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수출품 매입 자금으로 미리 석유·면사·면포·명태 등 잘 팔리는 상품을 개항장에서 구입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판매한 뒤 그 매상금으로 수출품을 사들이거나, 수입품 판매 대금을 개항장으로 보내려고 할 경우 그 대금으로 쌀·콩·우피 등을 매입하여 개항장으로 보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본위화·고액권 부족에 은행과 같은 금융 기관의 미비로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어음(於音)이나 환(換) 같은 금융 방식이 널리 이용되었다. 어음은 발행인의 신용에 기초하여 화폐 유통비를 절감하고 운용 자본금의 일시적 증식을 도모할 수 있는 신용 증서로서, 조선 후기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엽전 유통 지역에서는 ‘엽전 어음’이, 백동화 유통 지역에서는 ‘백동화 어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어음의 액면은 보통 엽전 500냥 정도이고 추심 만기는 대개 5∼7일, 길어도 1개월을 넘지 않았다. 유통량은 1902년 현재 부산 지방만 10만 관문 이상이며 한국 개항장 내의 총유통량은 30∼40만 관문 정도였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이 어음 이서(裏書) 양식이 발달하지 않고 근대적 상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도가 났을 경우 보상받을 길이 없다는 큰 단점을 안고 있었다. 1899년 말부터 1900년에 걸쳐 부산항의 일본 상인이 발행한 어음의 부도가 속출하여 금융 공황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상인이 발행한 어음은 중국 상인 또는 한국 상인의 어음에 비해 신용이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하여 어음은 현금에 비하여 5% 이상 낮게 평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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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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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이 화폐 유통의 불편을 덜고 일시적인 자본 증식을 도모하기 위해 상인층이 이용하던 금융 방식이었다면, 정부와 지방관, 상인층 등은 오늘날의 환에 해당하는 외획(外劃)·세납차인(稅納差人) 등의 금융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들 금융 방식은 조선 중기부터 발달한 방납(防納)과 유사한 것인데 갑오개혁기에 징세 기구, 국고 제도, 은행 설립 등의 제반 구상이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엽전 운반 시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발달한 것이다.

외획이란 지방관이 조세금을 한성으로 납부하지 말고 정부에서 지정한 제3자에게 직접 지급하라는 탁지부(또는 중앙 관청)의 명령을 말하며, 이 명령을 발하는 경우는 대체로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즉, ① 중앙 정부가 급히 자금을 차입할 필요가 있을 때, ② 중앙에서 지방 관청 경비를 지급해야 할 때, ③ 중앙 관리의 지방 출장 시 여비를 지급해야 할 때, ④ 상인이 국고를 이용하여 송금하려고 할 때 등이다. ①, ④의 경우는 국고에 자금을 대여해 주거나 필요한 송금액을 미리 국고에 납부한 사람(주로 상인층)에게 오늘날 영수증에 해당하는 자문(尺文)을 발급하며, 지방관은 이 자문을 제시한 사람에게 그 기록된 액면만큼 정부로 납부할 조세금을 대신 지급 하는 방식이다. ②, ③의 경우 역시 정부가 발급한 자문을 소지한 상인 또는 중앙 관리에게 그 액수만큼의 조세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외획과는 반대의 경로를 밟는 것이 세납차인 제도이다. 이는 지방관이 조세금을 국고로 납부하기 이전에 한성 또는 지방의 신용 있는 상인을 ‘세납차인’으로 선정하여 그에게 조세금을 대출해 주고 그로 하여금 한성의 재정 기관에 조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방식이다. ‘세납차인’은 이 조세금을 자본으로 삼아 각 지방에서 상품을 매입한 다음 한성으로 수송하여 판매한 뒤 판매 대금 중에서 원래의 조세금 액수만 국고에 납부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외획·세납차인 제도는 지방관·아전의 조세금 횡령으로 정부 재정을 만성적인 적자 상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오전 때와 마찬가지로 화폐 유통 지역을 엽전 지역과 백동화 지역으로 양분하고, 엽전 유통 지역 농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켰다.

조세로 받은 엽전을 상납할 때는 각 군에서 한성까지의 거리에 따른 운송비를 태가(駄價)라고 하여 운반되는 조세금 내에서 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태가 액수는 엽전 100냥을 매 30리 운반하는 데 대해서 2전 5푼씩 지급하는 것으로 정했으나 1897년 1월 1일부터 물가를 감안하여 5전으로 인상하였다. 경상·전라·함경·평안도 등 한성에서 먼 지역은 조세금 중 태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평균 10% 이상이며 30%에 이르는 지역도 있었다.

태가액이 이처럼 많았기 때문에 이 지역 지방관은 조세금을 육로로 운반할 때의 위험과 불편을 덜고 막대한 액수의 태가까지 차지하기 위하여 두 가지 방법을 개발하였다. 한 가지는 신용 있는 상인을 세납차인으로 정하여 조세금 운반을 위탁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지방관이 조세금 중 태가를 미리 공제하여 자기 소유로 할 수 있는 한편 상인도 조세금 납부 기한까지 무이자로 상업 자본을 얻는 셈이 되므로 대단히 성행하였다. 다른 한 가지는 지방관의 명을 받은 아전이 조세금으로 받은 엽전을 개항장으로 운반해 가서 일본 은화·지폐 등 고액권으로 교환하여 상납하는 것이다. 이 경 우에도 지방관은 태가를 온전히 취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백동화와 엽전을 교환할 때의 환 차액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세금 상납 위탁을 받는 상인이나 아전은 대개 동일인일 경우도 많고 엽전과 교환한 일본 화폐를 한성에서 다시금 백동화로 바꾸어 환 차액까지 취득하는 행태가 많았으므로 앞의 두 가지 방법은 실제로는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조세금은 군수 → 엽전 → 수출 상품(또는 일본 화폐) → 백동화 → 탁지부라는 경로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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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6월 지역별 화폐 유통 상황
1905년 6월 지역별 화폐 유통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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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백동화를 남발하기 시작하는 1898년 이후에는 백동화와 엽전의 환 차액이 점점 커졌기 때문에 한성에서 거리가 먼 경상·전라·함경도 등의 지방관은 농민에게서 엽전으로 징수하여 정부에는 백동화로 바꾸어 상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방관이 조세금을 백동화로 징수하는 것은 태가와 환 차액을 합친 막대한 이익을 상실함을 의미하였다. 이는 앞서 1880년대에 당오전을 남발할 때 당오전 유통 지역이 확대되면서도 경상·전라 지역에는 끝까지 당오전이 유입되지 못한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지방관의 조세 납부 행태로 인하여 그레샴의 법칙이 관철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1905년 6월 화폐 정리 사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한국은 지도 ‘1905년 6월 지역별 화폐 유통 상황’과 같이 백동화 유통 지역과 엽전 유통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엽전으로 납세하는 농민이나 백동화로 조세금을 상납받게 된 정부나 모두 환 차액 만큼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탁지부는 1901년 1 월 2일 농민에게 조세를 징수할 때 엽전, 백·적동화를 불문하고 농민이 납부하는 대로 상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지방관의 강제와 폭력하에서 농민이 백·적동화로 조세금을 납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수들이 백동화로만 상납함에 따라 정부 재정은 백동화 시세가 하락할수록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토지 1결당 세액(이하 결세라고 함)을 1901년에 최고 50냥, 1903년에 다시 최고 80냥으로 증가시켰다. 이는 백동화로 결세를 납부하는 농민에게도 부담이 되는 것이었지만, 엽전으로 납부하는 농민에게는 더욱 과중한 부담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결세가 최고 80냥으로 인상된 1903년부터 엽전 유통 지역과 백동화 유통 지역이 접하는 전라북도 군산항 부근의 여러 군에서 엽전으로 결세를 납부해야 했던 농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자료는 백동화가 유통하고 있는데도 지방관의 억압 때문에 엽전으로 납세해야 했던 전북 고산군(高山郡)의 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본군(고산군) 세납을 현재 유통되는 백동화로 징수하지 않고 그 가계(加計)에서 이득을 얻기 위해 억지로 엽전을 징수하니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어떻게 모두 엽전으로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인근의 읍들에서는 모두 백동화로 결세를 징수하는데 오직 본군만 백동화를 거부하고 엽전을 취하는 고로 불평이 많습니다.127) 『훈령존안(訓令存案)』 3(규장각 분류 번호 奎18153) 제8책, 광무 7년 1월 17일 훈령 전북관찰사.

고산군 농민의 반발을 시초로 하여 1903년 8월에는 금산군(錦山郡)에서 군민 1,000여 명이 봉기를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농민들의 반발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금구군(金溝郡)에서는 1결당 세액 80냥 중 55냥은 엽전으로, 25냥은 백동화로 징수하기로 하였다. 앞의 금산군에서는 1결당 75냥 중 65냥 5전은 엽전으로, 12냥 5전은 백동화로 수납하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다. 또 임피(臨陂)·옥구군(沃溝郡)에서도 엽전 과 백동화의 비율을 5대 3으로 하여 결세를 수납하기로 하였다.

1904년 이후에는 백동화 시세가 엽전 시세의 반 이하로 폭락하여 군수의 엽전 징수 강제와 이에 맞서는 농민들의 반발이 더욱 격렬해졌다. 1905년 1월 말 전북 26개 군 가운데 여산(礪山)·용안(龍安)·진산(珍山)군은 백동화만 유통하고, 옥구·함열(咸悅)·금산·고산군 등은 백동화보다 엽전이 더 많이 유통하며, 나머지 각군은 모두 엽전만 유통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백동화로만 결세를 납부하게 해 달라는 농민들의 호소는 대규모 봉기로 폭발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전북 순찰사는 군수와 농민의 입장을 절충하여 80냥 중 40냥은 백동화로, 40냥은 엽전으로 징수하라는 훈령을 각 군에 하달하였으나 농민과 군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자의 이해관계 충돌은 1905년 2월 전후부터 고산·임피·전주·무주·김제·고부군 등에서 청원 운동 또는 농민 항쟁으로 계속 폭발하였다.128) 도면회, 앞의 글, 1989, pp.45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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