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3장 개항기의 신식 화폐
  • 3. 화폐 정리 사업과 한국인 화폐 자산의 수탈
  • 엽전 정리와 엽전 유통 지역의 저항
도면회

백동화 정리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주로 교환 과정을 거쳐 마무리된 데 반하여 엽전은 조세금으로 징수하거나 매입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었다. 엽전을 백동화와 다른 방식으로 정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엽전은 보조화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법정 가치와 실질 가치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아 사실상 본위화처럼 유통되고 있었다. 즉, 엽전 1관문(10냥)은 도표 ‘1898∼1905년 사이 부산·한성의 엽전·백동화 시세’에서와 같이 15∼20할의 시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 화폐로 1엔 50전∼2엔에 해당한다. 따라서 엽전을 백동화처럼 10냥(은본위 2원)=신화 1원(圜)의 비율로 교환한다고 하면 50전 내지 1원의 손해를 볼 것이므로 엽전 교환에 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시세대로 당시 650만 엔 정도 유통되는 엽전을 신화폐로 교환할 경우 백동화 교환 비용 외에 추가 재원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메가타로서는 추가 재원을 안 들이고 엽전을 정리하려면 조세금으로 징수하는 방식이 가장 적절하였던 것이다.

둘째, 러일 전쟁 이후 전쟁 수요로 구리 값이 계속 뛰어올라 1907년경이면 엽전 1관문이 2엔 50전까지 육박하고 있었으므로 엽전을 녹여 동지금으로 만들어 국제 시장에 판매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민이든 일본인이든 엽전을 대량 매수하여 동지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행태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엽전 정리는 조세금으로의 징수보다는 매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1909년 말까지 납세를 통해 환수된 엽전은 겨우 2만 5,222원(1.1%), 매수를 통한 것이 235만 8,487원(98.9%), 총 238만 3,709원의 엽전이 유통계에서 사라졌는데, 이는 당초 유통량 650만 원의 37%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조세금 징수를 통해 엽전을 정리하고자 했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당오전이 유통하던 1880년대, 백동화가 대량 유통하던 1905년 이전과 똑같이 지방관이 조세금을 백동화 또는 신화폐로 징수하지 않고 엽전으로만 징수하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1905년 1월 금본위 화폐 조례를 실시하면서 엽전 10냥=신화폐 1원(圜)의 비율로 계산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구리의 국제 가격이 등귀한 탓에 1905년 6월 엽전 10냥(1천 매)=신화폐 1원 50전의 비율로 올려 엽전 1매의 법정 가격을 1리(厘) 5모(毛)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야 한국민이 엽전을 조세금으로 납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탁지부에서는 엽전으로 조세금을 징수하는 경우에 대해 1894년 갑오개혁 직후와 비슷한 기만 행위를 하였다. 조세금은 1902년 이래 토지 1결당 80냥, 즉 신화폐로는 8원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8원을 엽전으로 환산하면 53∼54냥이 된다. 반대로 엽전 80냥을 신화폐로 환산하면 12원이 된다. 탁지부는 이러한 산술적 차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엽전만 유통하는 경상·전라·함경도 등 지역에 대해 1905년 6월 29일 “엽전으로 납부 할 경우에는 이전과 같이 80냥, 신화폐로 납부할 경우에는 12원을 납입하게 하라.”고 훈령을 내렸다.135) 김혜정, 「구한말 일제의 엽전 정리와 한국민의 균세운동」, 『동아연구』 17, 서강대 동아연구소, 1989, pp.547∼549.

이러한 훈령으로 엽전 유통 지역 민인은 백동화 유통 지역 민인보다 4원을 더 내게 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이미 백동화가 유통하고 있던 전라북도 일고여덟 개 군에서 엽전으로만 징수하는 지방관의 행태에 대해 청원과 봉기가 발생하던 상황에서 탁지부가 이러한 훈령을 내린 것은 산술 조작으로 재정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엽전 80냥 또는 신화폐 12원 중 어떤 화폐로 받든지 탁지부로서는 토지 1결당 신화폐 4원에 해당하는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탁지부에서는 이와 아울러 1906년 9월부터 그동안 문제시되어 온 지방관의 환 차액 착복 및 조세금 지체를 근절하기 위해 「관세관 관제」를 정하여 군수층을 징세 기구에서 배제하고 세무관-세무주사를 두어 징세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 후 1907년 12월에는 「관세관 관제」를 폐지하고 「재무 감독국 관제」, 「재무서 관제」를 공포하였다. 이로써 군수·관찰사 등 지방관은 조세금 징수 업무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고 재무 감독 국장과 재무 서장을 맡은 일본인이 징세·재무 업무를 직접 장악하게 되었다.136) 이윤상, 「통감부시기 재정 제도의 개편」, 『한국사』 42, 국사편찬위원회, 1999, pp.326∼330.

이처럼 조세금 징수 기구를 개혁하였지만 막대한 환 차액은 탁지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지방관은 물론 조세금을 직접 징수하는 세무주사나 세무관 역시 엽전으로 징수하여 백동화 또는 신화폐로 교환 상납함으로써 환 차액을 착복하기 시작하였다. 탁지부로서는 낭패였다. 그러나 탁지부든 지방관이든 세무관리든 누가 환 차액을 차지하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수탈당하는 것은 언제나 조세금을 엽전으로 내야 했던 민인들이었고 이들은 불공평한 조세 징수 방식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1906년 4월 『황성신문』 기사에서는 “영남과 호남 4도의 관찰사와 100여 명 군수가 지폐와 엽전 환 차액을 차지하려고 민인을 압제하여 억지로 엽전만 받기에 신화폐로 납세하는 자는 한 명도 없을 지경”이라 하였다.137)『황성신문』 광무 10년 4월 6일자, 잡보 계군학립(鷄群鶴立) 이로 인해 1906년 3월 경상북도 인동군과 선산군에서는 농민들이 엽전 80냥을 60냥으로 줄여 줄 것을 요구하면서 봉기하여 군수를 위협하고 구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1907년 초부터는 국제 구리 시세가 올라 엽전이 계속 국외로 수출되면서 엽전 유통량 자체가 감소하였다. 이제 엽전 유통 지역에서는 엽전으로 조세금을 내려 해도 엽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탁지부에 의해 엽전 유통 지역으로 분류된 각 지역에서는 신화 12원 결세를 백동화 유통 지역과 마찬가지로 8원으로 균등하게 해 달라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유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그해 말에는 전라북도까지 퍼졌다. 주축을 이룬 인물은 주로 호남학회 회원들로 변승기(邊昇基, 장성군)·송영순(宋榮淳, 장성군)·변진걸(邊鎭傑, 장성군)·조옥승(曺玉承, 무안군)·박준필(朴準弼, 진안군)·서상옥(徐相玉, 익산군) 등이었다.

조세금을 균등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는 군수·관찰사를 시작으로 하여 탁지부 및 통감부에까지 수십 차례 올라갔으나 1908년 초까지 탁지부는 구차한 변명을 대면서 번번히 청원을 기각하였다. 이제 이들은 1908년 4월 전라·경상도 지역은 결세 중 4원을 빼고 8원만 납부하자는 부분 납세 거부 운동으로 전환하였다.138) 운동의 상세한 전말은 김혜정, 앞의 글 참조. 이 운동은 전국적 자강 운동 단체인 대한 협회의 협력도 얻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주도자들은 다시 통감부와 중앙 정부 관계 기관에 청원서를 계속 제출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통감부로서도 이 운동의 확산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지역은 전국에서 결세 수입이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1908년 5월 20일에 이르러 통감부의 지시를 받은 정부는 마침내 엽전 유통 지역의 결세를 신화폐 8원으로 인하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는 구리 값이 더욱 치솟아 엽전 10냥=신화폐 2원 70전 까지 되어 엽전을 억지로 조세금으로 징수하기보다 무역 상인들이 매수하여 수출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였다. 정부는 7월 1일부터 엽전 1매의 통용 가격을 2리로 올려 주고 엽전은 1회 거래에 500매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는 칙령을 공표하였는데, 이 비율로 엽전을 매수하여 구리로 수출하더라도 최소한 엽전 10냥에 50∼60전 이상의 수익을 볼 수 있었다.

화폐 정리 사업은 이처럼 수백 명 상인의 파산과 수십만 농민의 과중한 조세 부담을 밑거름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저지른 백동화 남발의 피해는 고스란히 상인과 농민들에게 돌아갔고, 이후 한국민은 제일은행권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식민지적 화폐 제도 속에서 살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