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4장 일제 강점기의 화폐
  • 5. 식민지 화폐의 종말과 유산
정병욱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고 해서 화폐에 대한 일본인의 지배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행 등 주요 금융 기관에 대한 미군정의 장악은 10월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일본인은 패전이 다가오자 자신들이 장악한 금융 기구를 통해 돈을 마련하여 안전한 귀환을 꾀하였다. 퇴각 자금의 마련은 우선 소각 지폐 비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는 이미 1945년 3월경 소각해야 될 지폐를 35억 원 정도 비축해 두었으며, 전국 방방곡곡 어디라도 6시간 안에 현금이 배달되도록 예행 연습까지 마쳤다고 한다. 광복 당시 준비된 은행권은 40억 원 정도로 추산하였다.

또한 새로운 은행권을 발행하여 퇴각 자금을 마련하였다. 1945년 3월경 조선은행은 대장성, 일본은행 측과 협의하여 조선은행권의 조선 내 인쇄를 추진하였다. 종전에 동경의 조선은행 지점은 내각 인쇄국에서 인쇄한 지폐를 가져와 지점 지하실에 일단 수납하였다. 이후 은행권은 ‘(트럭)-시나가와(品川)역-(철도)-시모노세키(下關)-(배)-부산-(철도)-경성역-(트럭)’이라는 경로와 운송 수단을 통해 조선은행 본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면서 인쇄국에 일본은행권은 물론이고 각종 식민지 은 행권 발행 주문이 쇄도하여 인쇄 물량 확보가 어렵고, 또한 운송로가 길어 연합군에 의해 차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시 조선은행권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조선 내 인쇄를 전담했던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 기요지(星野喜代治)는 광복이 되기 전에 조선 내 모든 금융 기관의 수요를 조사하여 1,000원권 70억 원, 100원권 21억 원을 찍어 두었다고 한다. 이중 1,000원권은 한국인과 미군에 의해 사용이 제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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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후의 조선은행권-100원권(앞면)
광복 전후의 조선은행권-10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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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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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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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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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발행한 은행권은 전시기 조악한 지폐보다도 품질이 떨어졌다. 모조지에 평판 인쇄를 하였으며, 일련번호가 없었다. 또한 호시노는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나중을 생각하여 새로 인쇄할 은행권에는 일본은행권과의 태환 규정도 삭제할 것을 검토하였다고 한다. 발행에 급급한 나머지 인쇄의 질이 떨어졌고 8월 15일 이후에는 근택(近澤) 인쇄소에서 비밀 인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홀히 관리하여 광복 이후 많은 위조범이 양산되는 한 배경이 되었다.

소각 지폐 비축, 조선 내 은행권 발행 외에도 광복 이후 일본에서 일본은행권, 조선은행권이 공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대부분 민간인(예금 인출)과 군·총독부(국고금 지불)의 퇴각 자금으로 쓰였다. 미즈타는 일본인 기업체에 퇴각 자금을 대출하기 위해서 「은행 등 자금 운용령」이라는 전시 법령까지 발동하여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에 융자 명령(融資命令)을 내렸다. 조선은행의 한국인 은행원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말한다.155) 구용서 감수, 한규훈 구성, 「조선은행 40년 : 20회-제4장 긴급권(緊急券) 인쇄」, 『금융경제』 21, 금융경제사, 1978, pp.70∼71.

<표> 조선은행권 증발액과 주요 용도
단위 : 백만 원
구 분 폐쇄 기관 조선은행이
대장성에 제출한 자료
조선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의 회고
1945년 8월 15일∼9월 말
조선은행권 증발액
3,841 3,819
예금 인출 초과액
(이 중 일본 송금 환류액)
2,500
(-700)
1,920
국고금 지불 초과액
(이 중 군관계)
(이 중 총독부)
1,400
(800)
(600)
1,180

대출액 250 250
관동주의 발행 초과액 320 320
✽朝鮮銀行史硏究會 編, 『朝鮮銀行史』, 東洋經濟新報社, 1987, 736쪽.

하여간 국고금의 초과 지급이든 융자 명령에 의한 대출이든 간에 일본 군·관·민(軍·官·民)을 위하여 종전 청산 자금(終戰淸算資金)을 공급한다는 것은 일인(日人)들이 거져먹고 도망치기 위한 돈을 대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있는 돈을 가지고 대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새로 찍어서 공급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은행은 망하더라도 일본 금융 기관으로서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하여 조선에 있어서 중앙은행의 기능을 최고도로 발휘해야 한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고 ① 발권 은행으로서 조선은행 100원권을 비밀리 인쇄하여 ② 국고 은행으로서 국고금 초과 지급을 감행하고 ③ 은행의 은행으로서 각 금융 기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출하였던 것이다.

은행권은 퇴각 자금 외에도 무사귀환을 보장받기 위한 명목으로 여러 방면에 유용되었다. 광복 이후 일본인 관리들은 미군의 진주가 임박하자 그들로부터 일본인 여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백만 원을 들여 미군을 접대하기 위한 댄스홀을 만들었고 한국인 여자를 고용하였다. 또한 조선군, 조선 총독부, 조선은행 등이 기밀비 명목으로 상당액을 유용하였다. 미즈타는 일반 예금자에게 예금 인출 자제를 호소하면서도 8월 17일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와 경무국에는 500만 원의 기밀비를 지출하였다. 당시 500만 원이면 대략 광산 회사 직원 6만 2,500명분의 한 달 급료에 해당한다.

퇴각하는 일본인은 미군정의 자문에 응하여 화폐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호시노는 미군정의 군표 발행 계획을 혼란만 줄 뿐이라며 반대하면서 필요하다면 조선은행권을 찍으라고 권유하였다. 이후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 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미군이 인플레이션 방지 대책을 묻자 그는 “각 금융 기관은 지금까지 대출한 대출금 회수”에 최선을 다할 것, “금후 신규 대출은 치안에 영향이 없는 한 가급적 규제하여 보류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광복 직후 일본인의 방만한 자금 유용을 생각하면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다. 1947년 3월 조사에 의하면 금융 기관이 일본계 기업에게 대출하였다가 회수하지 못하여 광복 이후 고정된 금액이 25억 4,000여만 원이었으며, 그중 조선은행 몫은 8억 7,000여만 원이었다.156) 조선은행 조사부, 『조선경제연보』 1948년판, pp.1∼290. 이상 광복 직후 상황은 정병욱, 『한국 근대금융 연구』, 역사비평사, 2004의 제4부 ; 「해방 후 일본인 잔류자들-식민 지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 64, 2003과 이 글에 실린 관련 회고록 참조.

지폐 발행의 역사는 전쟁이나 식민 지배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프랑스의 최초 지폐는 미시시피 경영과 관련이 깊었고, 미국의 그것도 캐나다 진공이 필요한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지 폐도 프랑스와 전쟁으로 곤경에 처한 영국 정부에 요긴하였다. 이는 지폐가 다른 화폐에 비해 발행하기 쉬워 전쟁이나 식민 지배에 긴급히 필요한 재원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폐가 남발된 뒤에는 항상 가치 폭락이 잇따랐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일본의 침략 전쟁에 휘말려들었던 일제 강점기 지폐의 역사는 이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 준다. 식민 지배가 남긴 살인적인 인플레와 광복 직후 자금 유용은 새롭게 출발하는 한국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일제 강점기 지폐 발행 제도와 그 운영은 값비싼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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