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5장 대한민국의 화폐
  • 1. 광복과 우리 돈
  • 광복 후 통화 남발과 물가 폭등
배영목

미군정이 화폐 발행 기관인 조선은행을 접수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한 것은 8월 15일이 아니라 9월 11일이었다. 그리고 아놀드(A. V. Arnold) 군정 장관이 미 해군 소령 스미스(Roland. D. Smith)를 조선은행 총재로 임명하고 실제로 접수한 것은 9월 30일이었다. 따라서 해방 된 이후 거의 한 달 이상 동안 화폐 발행권은 일본인 손에 있었다.

광복 전후 화폐 발행 기관이 일본인의 손에 있는 동안 엄청난 통화 남발이 있었다. 조선은행권 발행액은 광복 직전, 즉 1945년 8월 14일에는 48.43억 원인데, 이를 지역별로 보면, 남한이 18.9억 원, 북한이 19.7억 원, 관동주(關東州) 및 만주(滿州)가 13.5억 원, 중국 2.5억 원, 일본 1.3억 원 정도이었다. 조선은행 은행권 발행액이 1944년 9월에 22.6억 원이므로 광복 직전 한 해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두 배 이상 급증하였다.162) 배영목, 『한국금융사 1876∼1959』, 도서출판 개신, 2002, p.351.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광복 직후 급증하여 8월 말에 79.9억 원이 되었고, 9월에는 86.8억 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큰 증가를 보이지 않아 1945년 말에는 87.6억 원에 그쳤다.

특히 광복 직후에 조선은행권, 즉 지폐가 남발(濫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금융 기관에 대한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여 현금 수요가 급증하자 이들이 22억 원에 해당하는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은행이 일본의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다른 금융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대량의 유가 증권을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여 회수하였기 때문이다.163) 배영목, 앞의 책, pp.351∼352. 셋째, 미군정이 조선은행 접수를 통해 통화 발행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통화 남발이 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이 1946년부터 재정 적자를 보전하고자 조선은행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정부 대상금 형식으로 차입함에 따라 통화 남발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조선은행이 미군정하의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정부 대상금으로 대출을 하게 되고, 또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거액의 대출을 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통화 남발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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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후 조선은행권 발행고와 서울 소매 물가 지수
광복 전후 조선은행권 발행고와 서울 소매 물가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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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말에서 8월까지 소매 물가 지수는 13배로 폭등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높은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광복과 함께 나타난 물가 폭등 사태는 한편으로 광복과 함께 조선은행의 통화 남발에서 비롯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물가 통제 기구가 와해되고, 광복에 따른 주요 생산물의 생산 중단 또는 위축 등으로 물자 공급이 줄어든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광복과 함께 나타난 물가 폭등 현상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지속되고 있었다. 서울 도매 물가 지수의 상승률이 1945년 576%, 1946년 378%, 1947년 198%, 1948년 62.9%, 1949년 36.8%에 달하였다.

광복 이후 물가 폭등과 그에 따른 화폐 가치의 폭락은 국민의 경제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화폐 가치 폭락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돈을 남김없이 현물을 구매하려는 현물 투기 또는 사재기가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곡물의 매점이었다. 정부도 식량 확보를 위해 통화를 남발하고 그에 따라 곡가가 상승하자 곡물 매집을 위해 통화를 또다시 남발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일제가 저축 운동을 강권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저금, 채권, 보험 등 다양한 형태로 저축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보유한 금융 자산은 광복 후 물가 폭등으로 휴지나 다름없게 되었다. 광복 후 물가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하여 장기적인 전망에 의존하는 재정 계획, 투자 계획, 저축 계획 등 어떤 종류의 계획도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고정된 근로 소득에 의존하는 노동자들은 물가 폭등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힘을 기울여 임금을 인상하려 해도 임금 인상이 물가 인상을 따라 갈 수 없었다. 반면에 생산자인 농민은 물가 폭등 위협에서 좀 더 멀어질 수는 있었지만 공산품 가격이 농산물 가격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여 실질 소득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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