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9월의 제1차 화폐 개혁에서 한국은행이 적성 통화 추방을 위한 화폐 교환을 추진하려면 상당량의 은행권을 준비해야 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1,000원권 100원권 두 종류의 한국은행권을 일본 내각 인쇄국에 의뢰하여 인쇄한 것을 제1차 긴급 통화 조치에서 신화폐로 사용하였다.
이 은행권은 처음으로 한국은행권임을 명시하였고, 발행자로 한국은행 총재인이 나타나고, 뒷면에는 영문으로 발행자로 THE BANK OF KOREA와 우리나라 화폐 단위의 영문명 WON이 처음으로 인쇄되었다. 이 은행권은 불행히도 일본의 조폐 기관이 제조하였지만 은행권에서 일제의 문양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어 화폐 수요의 팽창에 따라 한국 조폐 공사가 제조한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있는 1,000원권과 500원권을 새로이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이 이후로 고액권으로는 새로 발행된 한국은행권이 사용되었지만 소액권으로는 여전히 조선은행권이 계속 사용되었다.
미군정기 정부는 일본과 북한의 화폐 개혁으로 이 지역의 조선은행권이 대한민국 지역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화폐 교환에 대비하여 조선은행 최순주(崔淳周) 이사를 보내어 미국 재무성 인쇄국이 신은행권을 제조하도록 하였다. 한국과 미국이 이 은행권을 국내로 반입한 뒤 봉인하여 한국은행에 보관하였는데 다행히 북한군이 손대지 않아 다시 부산으로 이송하여 조선 방직 회사에 보관하였다. 한국은행은 1953년 2월 제2차 화폐 개혁에서 이 은행권을 신은행권으로 사용하였다.
이 은행권은 1,000환, 100환, 10환, 5환, 1환 다섯 종류로 광복 후 사용된 어떤 은행권보다 질이 좋았다. 이 은행권은 환단위를 사용하였지만 원단위가 사용될 때 제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금액은 한자로만 환(圜)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영어로도 원(WON)으로 표시되어 있고 한글로도 원으로 표시되었다.173) 이러한 기이한 표시는 미군정기, 즉 원화시대에 주문되어 제조된 은행권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원을 환으로 화폐 단위 명칭을 바꾼 상황에서 환 단위로 사용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환(圜)은 둥글다는 의미로는 원, 돈다는 의미로는 환으로 발음한다는 설명이 있으나 한글로 원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도 궁색한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돈은 비록 미국에서 제조되었지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북선과 무궁화 문양이 사용되었다.
군사 정부가 1962년 6월 제3차 화폐 개혁에서 은행권과 교환할 여섯 종의 신은행권은 한국 조폐 공사가 제조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영국의 토마스 드 라루(Thomas De La Rue)사에 제조하게 하여 국내로 들여온 것이었다. 군사 정부가 이 화폐를 한국 조폐 공사에서 제조하지 않고 영국 회사에 맡긴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외국 회사에 의뢰하여 보안을 유지하고 고품질 은행권 제조를 통해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174) 조명수, 『재미있는 돈 이야기』, 도서출판 이가책, 1993, pp.286∼288. 앞면 도안의 주소재는 500원권은 남대문, 100원권은 독립문, 50원권은 해금강과 총석정, 10원권 이하는 한국은행 휘장이 사용되었다. 이 은행권은 더욱 정교한 인쇄 방법인 요철판(凹凸版)으로 인쇄되었으며, 물론 이전의 은행권에 비해 종이의 질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