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5장 대한민국의 화폐
  • 3. 화폐의 변신과 지불 수단의 다양화
  • 은행권 속의 인물
배영목

은행권이나 주화는 늘 사용하는 화폐로서 그 나라의 주권과 경제를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왕, 대통령, 역사적 인물 등이 화폐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인물은 정교 하여 위조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은행권은 물론 주화의 도안에서도 주요 소재로 이용한다. 예컨대 미국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인도는 인도의 독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간디를, 베트남은 독립을 지킨 호치민을 은행권에 등장시키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권에는 이름도 없는 노인, 이른바 ‘수령 노인’이 돈 속의 인물로 쓰였다. 무명의 인물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화폐에 등장하는 것은 화폐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일본의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킬 때 생길 수 있는 민족적 반항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제국 때의 한국은행권에 광화문이라도 등장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국권은 화폐에도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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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상과 저금통장
모자상과 저금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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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한국은행권이 조선은행권 대신에 처음 등장하면서 무명의 노인이 사라지고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이 은행권 인물로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경쟁자가 없는 모델이었던 셈이다. 1960년 4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야인으로 돌아가자 이승만이 은행권과 주화에서 모두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이제부터 더 이상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모델로 등장한 인물은 세종대왕이었다. 1960년 8월 15일부터 새로 발행된 1,000환권, 연이어 500원권에도 세종대왕이 등장하였다. 세종대왕은 1961년 4월 19일 이후의 100환권, 1965년 8월 14일 이후의 100원권, 1973년 6월 12일 이후의 10,000원권, 1979년 6월 15일 이후의 10,000원권, 1983년 10월 8일 이후의 10,000원권, 1994년 1월 20일 이후의 10,000원권에 이르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은행권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 세종대왕은 신인 모델이 아니라 최고액권의 인물상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세종대왕 이외에도 여러 인물이 등장하였다. 5,000원권의 율곡 이이, 1,000원권의 퇴계 이황, 500원권의 이순신 장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과 달리 무명의 어머니와 아들이 군사 정부 시대의 은행권의 주소재로 등장한 적이 있다. 이 모자상은 어머니와 아들이 저금통장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저축을 권장하기 위해 이 모자상을 등장시켰다고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20년간 집권하면서 자신을 화폐 속의 인물로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우리나라 은행권에는 인물 이외에도 문화재가 종종 주소재 또는 부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한국은행이 설립된 이후부터 1960년 4·19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1950년 은행권에는 앞면에는 대부분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가 있었지만, 간혹 거북선, 남대문, 독립문 등도 주소재로 등장하였다. 뒷면에는 탑골 공원, 한국은행 건물, 해금강과 총석정, 독립문 등이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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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에 등장한 문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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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발행된 5원권 앞면의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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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발행된 500원권 앞면의 남대문
1962년 발행된 500원권 앞면의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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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발행된 10원권 앞면의 첨성대
1962년 발행된 10원권 앞면의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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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발행된 50원권 앞면의 탑골 공원
1969년 발행된 50원권 앞면의 탑골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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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앞면에는 이승만 대통령 대신에 세종대왕이 등장하였으나 문화재로는 남대문, 독립문, 해금강과 총석정, 한국은 행 휘장, 첨성대, 독립문, 탑골 공원 등 무질서할 정도로 여러 문화재 문양이 등장하였다. 뒷면에는 한국은행 본점, 독립문, 거북선, 근정전, 경회루 등이 등장하였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10,000원권은 세종대왕과 물시계, 5,000원권은 율곡 이이와 벼루, 1,000원권은 퇴계 이황과 투일, 500원권에는 이순신 초상과 거북선 등과 같이 각각 등장 인물의 상징물이 인물과 함께 앞면에 나타났다. 뒷면에는 10,000원권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경회루로, 5,000원권은 한국은행 본점에서 오죽헌으로, 1,000원권은 도산 서원 등 각 등장 인물과 관련된 건물이 등장하였다. 지금까지 은행권 앞면에는 인물과 그 상징물, 뒷면에는 인물과 관련된 건물이 등장하는 패턴이었으나, 최근 발행된 5,000원권에는 건물이 앞면에 등장하고 있다.

인물의 초상이 이승만 대통령 시대에는 나이에 따라 변하고 그 이후에는 인물 모습이 고증 내용에 따라 변하였다. 미인상이 시대에 따라 변하듯이 화폐에 나타난 위인상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에 새로운 역사적 위인이 등장함으로써 은행권의 권위나 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높아지는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은행권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그 당시 국민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나 문화재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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