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5장 대한민국의 화폐
  • 4. 돈의 관리와 가치
  • 통화 남발과 돈의 가치
배영목

이미 도표 ‘서울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추이’에서 본 바와 같이, 광복 직후 우리나라는 일본과 경제적 단절, 남북 분단, 생산 기반 와해 등의 실물적인 측면뿐 아니라 일본인과 미군정에 의한 통화 남발 등으로 서울 소비자 물가가 1945년 3,146%, 1946년 121%, 1947년 152%를 넘어서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고, 서울 도매 물가 상승률은 1946년 224%, 1947년 82%, 1948년 63%, 1949년 36.8%를 기록하였다. 광복 직후 물가 폭등 사태는 생산 회복, 통화 관리 강화 등으로 다소나마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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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증가율과 소비자 물가 상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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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950년 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통화 남발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6·25 전쟁을 계기로 서울 도매 물가는 1950년 56%, 1951년 531%, 1952년 117%가 상승하였다. 물가 폭등은 전쟁의 소강 상태, 미국의 군사 원조에 힘입어 1953년부터 수습되었지만 전쟁 수습을 위한 통화 남발이 지속되어 1956년까지는 높은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한국과 미국이 통화 남발의 주원인이었던 정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고 통화긴축을 시행한 결과, 1957년부터 통화량 감축과 함께 물가 상승률 하락이 나타났다. 1957년에는 물가가 자체가 하락하는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전쟁 이후에는 물가가 점차 안정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61년 이후 군사 정부의 등장과 경제 개발 추진 등으로 과거에 비해 그 폭은 줄었지만 통화 남발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이 또 나타났다. 군사 정부는 화폐 개혁 실패 이후 경제 개발 재원 조달의 주요 수단으로 통화 남발을 활용하면서부터 통화 증가율이 높아지고 그 결과로 물가 상승률이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 통화 남발 → 물가 상승 → 통화 수요 증가 → 통화 남발이라는 악순환이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 박정희 유신 체제가 무너지면서 한국은 경제적으로 불황과 채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외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과거 인플레이션 시대를 단절하는 물가 안정 정책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그에 따라 물가 상승률이 낮아지면서 통화 증가율도 자연적으로 낮아졌다. 물가 안정 → 통화 수요 감소 → 통화 긴축 → 물가 안정이라는 선순환이 나타났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광복 이후 처음으로 통화 증가율은 20%대 이하로 떨어지고 물가 상승률은 한자리수, 즉 10% 이하로 계속 머물게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통화 남발과 인플레이션 간의 악순환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우리나라의 누적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 상승 폭은 놀랍다. 광복 이후 2005년 6월까지 소비자 물가는 11만 배(연평균 21.3%), 생산자 물가는 7만 배(연평균 20.4%) 올랐다고 한다. 그 정도가 가장 심하였던 시기는 물론 1945∼1965년까지이다. 개별 가격을 보면 쌀값이 55만 배, 금값이 13만 배, 서울시 버스 요금이 500만 배, 쇠고기값이 192만 배, 달걀은 8.7만 배, 연탄은 2만 배 상승하였다. 물가 상승이 놀라운 만큼 당연히 돈 가치도 놀라울 정도로 떨어졌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시대에서는 모든 국민들은 원하지 않게 인플레이션세(inflation tax)를 내게 된다. 화폐의 가치가 물가 상승분만큼 떨어지므로 현금이나 예금을 가진 사람들은 구매력이 줄어든 만큼을 화폐 발행자에게 세금으로 낸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통화 남발로 물가가 두 배로 올랐다면 그 화폐의 구매력은 반(2분의 1)이 되므로 자신의 화폐 자산의 반을 화폐 발행자, 즉 정부(중앙은행)에게 세금을 낸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원하지 않은 인플레이션세를 내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실물 자산을 늘려가야 할 것이다. 사재기에 대한 수많은 비난이나 단속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쌀, 연탄 등을 가능한 한 많이 사들이고 땅과 집도 가능한 늘리려고 한 것은 이러한 인플레이션 시대에서 살아가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화폐 가치에 대한 불신으로 계에서도 쌀의 부피 단위인 말이나 금의 중량 단위인 돈이 화폐 단위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1961년 농촌 고리대 조사 과정에 드러난 일이지만 농가의 현물 부채가 논의 경우는 75%, 밭의 경우 11%에 달하였고 계산 단위는 대부분 쌀이었다. 당시에는 토지 구입도 현금보다는 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통화를 남발하면서도 인플레이션에 따라 재정 수입 감소를 피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정부조차도 인플레이션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는 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발한 방법으로 인플레이션 속에서 재정 흑자를 달성한 사례가 있었다. 정부는 1950년 11월 임시 토지 수득세를 제정하여 지세를 토지의 산출량을 기준으로 현금으로 징수하는 금납제가 아니라 현물로 징수하는 물납제를 강행하였다. 이 현물 납부는 모든 작물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쌀에만 제한되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950년 56%, 1951년 224%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쌀을 경작하여 납부해야 하는 농민에게만 조세의 부담이 가중되었다.194) 한국산업은행, 『한국산업은행 10년사』, 1955, p.375. 정부가 조선시대의 갑오개혁(1896)으로 이미 사라졌던 물납제로 되돌아가면서까지 재정 수입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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