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1. 북한 화폐의 특징
  • 화폐의 정의
이영훈

화폐는 상품 교환을 매개해 주는 수단으로 탄생하였고 상품 생산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상품이든 구입할 수 있는 ‘일반적 등가물(general equivalent)’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형성된 화폐는 가치 척도, 교환 수단, 지불 수단, 가치 저장 수단 등의 기능을 한다.198) 사회주의에서 화폐의 규정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상품, 가치, 가격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상품은 자가 소비가 아니라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된 물건으로서, 상품 생산은 사회적 분업과 소유의 분화를 전제한다. 가치는 상품에 들어 있는 상품 생산자들의 노동이 그 생산물에서 표현되는 형태로서, 가치의 크기는 상품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 필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 가격은 이러한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다.

사회주의 화폐 또한 이러한 화폐의 기본적인 정의와 기능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過渡期) 경제 체제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즉,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그 근간이 되는 화폐 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는 화폐를 공산주의 단계에 이르면 당연히 폐지될 ‘과도기적’ 경제 범주로 간주하고 있다.

화폐는 사회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발생하였다가 그 존재의 객관적 기초가 사라짐에 따라 점차 없어지게 되는 경제 범주이다. 결코 영원성을 띤 경제 범주가 아니다. …… 상품 화폐 관계의 경제적 기초를 생산물에 대한 소유의 분화에서 찾는 입장에 설 때 여러 생산 방식에 걸쳐 존재해 온 상품 화폐 관계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가 끝나면 없어진다는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199) 리원경, 『사회주의 화폐제도』, 사회과학출판사, 1986, pp.9∼10.

실제로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오언(Robert Owen)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화폐를 통해 상품 화폐 관계를 해소하려고 시도하였으며,200) 상품 가치의 크기는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되고 가치는 직접적으로 노동 시간으로 측정된다는 데서, 그레이, 프루동, 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금 대신 노동 시간을 화폐 단위로 하여 교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레이는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에 대한 중앙은행의 조사를 기초로 은행의 창고(상품 창고)와 은행권(노동 화폐) 발행 제도에 의한 공정한 상품 생산을 생각하였다. 오언이 이 구상을 협동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실행에 옮겨 1832년 노동 화폐로 노동 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 노동교환소를 창설하였으나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상품 생산에서 사적(私的) 노동(勞動)이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서 표시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주장이다. 볼셰비키 혁명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화폐를 상품으로 대체하여 국영 기업들 간의 모든 화폐 단위의 결산을 폐지시키고 임금을 현물로 지급하는 시책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사적 소유를 폐지하였다 하더라도 화폐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었다. 화폐(가격) 이외에 노동 시간이나 추상적인 가치로 경제 계획을 작성하고 운영할 수 없었고 여전히 상품 생산과 교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서의 화폐 유통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화폐의 폐지는 공산주의 단계의 과제로 미루어 놓게 되었다. 즉, 모든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생산되고 ‘필요에 따른 분배’를 실현할 수 있는 공산주의 단계가 도래하면 상품 생산과 교환은 폐지되며 그에 따라 화폐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에서는 화폐를 부정되어야 할 경제 범주로 보는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숭배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어느 상품이든 구입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의 삶을 위한 수단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람의 머리 위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마르크스(Karl Marx)의 화폐의 ‘물신성(fetishism)’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적인 생산 체제 아 래에서는 인간의 노동 생산물인 화폐가 마치 고유한 힘을 지니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되고, 화폐를 신앙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 이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물신 숭배(物神崇拜)라 하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일상적 종교가 되어 있다고 한다.201) 자세한 내용은 마르크스, 『자본론』 1 참조. 물신성 이론은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철학적 소외 이론이 경제학의 분야로 이전된 것으로서(I. I. Rubin, 『마르크스의 가치론』, p.88),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본 것을 마르크스는 신을 화폐로 대체하여 인간에 의해 창조된 화폐가 인간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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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주체 사상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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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회주의에서는 국가에 의해 전반적인 자원 배분이 이루어진다. 기업들은 국가로부터 자재와 자금을 공급받으며 계획 생산량을 달성하면 그만이다. 판매도 이미 계획 단계에서 대부분 보증되어 있어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가 팔릴 것인가 팔리지 않을 것인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즉, 사회주의 기업은 자본주의 기업들처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동기가 없다. 주민들도 국가에 의해 식량, 주택, 교육, 의료 등이 보장되고 소득 수준이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처럼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에서 기업과 주민들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에서는 돈 대신에 국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스탈린(Losif Vissarionovich Stalin), 마우쩌둥(毛澤東), 김일성 등과 같은 정치 지도자가 주민들의 의식과 행위를 지배하고 통제하게 된다. 사회주의에서 물질적 인센티브 대신 지도자의 이념과 의지 등이 반영된 정치 도덕적 인센티브로 생산을 독려하고 사회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지도자에 대한 개인 숭배가 훨씬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 왔다. 특히 1967년 주체 사상을 유일 사상 체계로 하는 전일화된 사회로 바뀌면서 교육과 문화 예술의 방향은 최고 지도자의 사상과 의지를 관철하는 데 두어졌다.202) 수령은 문화예술의 최고 수요자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의 북한 최고의 작품을 창작한 천재적인 문예창작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대백과사전』 9,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5, p.460. 김일성의 교시는 모든 문헌에 서 ‘수령 교시’로서 고딕으로 인용되고 여기에서 벗어난 해석과 서술은 용납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김일성과 김정일은 공공 장소에서 심지어 모든 가정에서 ‘어버이 수령’으로서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통제하고 있다.

북한에서 지도자와 주민의 관계는 김정일이 정리한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 정치적 생명체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수령’은 ‘인민대중의 최고 뇌수’로서 마치 생명체의 여러 부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리적인 요구가 뇌수에 반영되고 뇌수는 그 요구를 집대성하고 그것을 정확히 반영하는 존재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인민대중은 당의 영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 사상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영생하는 자주적인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사회 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 개별적인 사람들의 육체적인 생명은 끝이 있지만 자주적인 사회 정치적 생명체로 결속된 인민 대중의 생명은 영원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에서 하느님을 수령과 대체하면 다를 게 거의 없다.203)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4, p.435 ; 임영태, 『북한 50년사』 2, 들녘, 1999, p.172 참조. 이처럼 사회주의에서는 화폐에 대한 물신 숭배 대신 지도자에 대한 우상 숭배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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