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2. 북한 화폐의 변천
  • 1947년 화폐 개혁
이영훈

1947년 화폐 개혁은 북조선 인민 위원회 법령 30호에 의거하여 1947년 12월 6일부터 12일까지 7일간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발행되었던 구조선은행권과 ‘붉은 군대 사령부’가 발행한 소련군 군표가 북조선중앙은행에 의해 발행된 북조선중앙은행권의 신권과 1 대 1로 교환되었다. 이때 발행된 신권은 1원, 5원, 10원, 100원권 네 종이었다.207) 한편 일제강점기에 발행되었던 보조 화폐는 이후에도 계속 통용되었으나 1949년 5월 14일 내각결정 50호에 의거, 소액 지폐 15전, 20전, 50전권의 지폐가 발행되면서부터 이들의 유통은 무효화되었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화폐 개혁의 동기는 민주 개혁과 자주적 화폐 제도 수립(재정적 독립)에 있다. 북한 문헌에 따르면, 1947년 화폐 개혁은 “민주 개혁의 성과를 공고히 하고 나라의 정치적 독립을 재정적으로 확고히 담보하기 위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으며, 또한 “미일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 반동들의 파괴 책동을 짓부수고…… 자립적인 민족 경제 건설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208) 『재정금융사전』, 사회과학출판사, 1995, p.1261.

당시 화폐 개혁의 동기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1947년 화폐 개혁은 신구 화폐의 교환 비율을 1 대 1로 정했지만 소유 형태에 따라 화폐 교환의 한도에 차별을 둠으로써 상공업자, 종교 집단 등 의 화폐 자산을 몰수하였다.209) 이와 함께 교환 한도를 초과하여 예치된 예금의 지불 방법과 한도 또한 차등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토지 개혁(1946. 3.), 국유화령(1946. 8.) 등에 이은 ‘민주 개혁’의 일환으로 유산 계급의 물적 토대를 최종적으로 박탈한 조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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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발행 군표 5원권(앞면)
1945년 발행 군표 5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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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발행 군표 5원권(뒷면)
1945년 발행 군표 5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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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주민 집단의 대응은 각기 상이하였다. 농민, 노동자, 사무원 등 근로 계층은 화폐 개혁에 적극적으로 응한 반면에 상인, 중소 상공업자들은 비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이기까지 하였다. 토지 개혁, 국유화, 화폐 개혁 등 일련의 ‘민주 개혁’으로 농민과 노동자는 지주와 친일 세력의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작품인 리기영의 『개벽』은 이러한 주민들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210) 리기영, 「개벽」, 『한국소설문학대계』 10, 동아출판사, 1995. 참고로 광복 직후 북한에서는 전체 농가의 4%에 불과한 지주가 총경지 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농가의 56.7%에 달하는 빈농이 경지 면적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수확량의 70∼80% 정도를 바쳐야 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은 대다수 농민들에게 ‘평생 제일 큰 행복’이었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값없이 나누어 준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실로 이것은 고금에 처음 듣는 말이다. ……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땅덩이가 떠나갈 줄은 몰랐다. 천지개벽을 하기 전에야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토지 개혁이란, 정말 눈에 안 보이는 개벽을 해서 하룻밤 사이에 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표> 1947년 화폐 개혁에서의 계층별 화폐 교환 비율
단위 : %
계층별 상공업자Ⅰ 상공업자Ⅱ 노동자·사무원 연금 생활자 농민 학생 종교 단체
교환 비율 21 54 74 43 69 82 8
✽상공업자Ⅰ은 10명 이상의 노동자·사무원을 고용하는 경우, 상공업자Ⅱ는 10명 이하를 고용하는 경우, 기타는 이상의 분류에 포함되지 않은 주민 집단을 나타냄.
✽전현수, 「1947년 12월 북한의 화폐 개혁」, 『역사와 현실』, 19, 역사와 비평사, 1996, 207쪽 참조.

또한, 주민들은 ‘천지개벽’의 기쁨을 제공해 준 김일성과 공산당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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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화폐 개혁 은행권 100원권(앞면)
1947년 화폐 개혁 은행권 10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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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화폐 개혁 은행권 100원권(뒷면)
1947년 화폐 개혁 은행권 10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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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상인들 사이에서는 “노동자들은 노동 법령을, 농민들은 토지를 획득했지만 우리들은 무엇을 획득했는가. 우리는 모두 끝장이다.”는 비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또한 일부 유산 계층과 교회 목사들은 화폐 개혁을 보이코트하라는 호소문을 살포하거나 화폐 개혁 지지 집회를 결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주둔하에서 유산 계층의 영향력은 너무도 미약하였다.

둘째, 자주적인 화폐 제도 수립과 관련하여 북한은 각종 화폐(구조선은행권과 소련 군표)의 유통과 남한에서 가치 저하된 조선은행권의 유입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고 자주적인 화폐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화폐 교환을 실시한다고 밝히고 있다.211) 당시 북한 당국이 발행한 화폐 개혁 관련 호소문이나 선전 요강을 보면, 남조선이 조선은행권과 위조 지폐를 ‘침입시켜’ 시장을 혼란하게 하고 물가를 폭등시켜 대중의 생활 수준을 저하시키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 교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46∼1947년 남북 간 교역 규모가 북한 무역의 7%에 불과하였음을 감안해 볼 때, 주된 이유는 당시 기본 통화로 기능하고 있던 소련 군표의 문제점 해결에 있다고 할 수 있다.21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현수, 「1947년 12월 북한의 화폐 개혁」, 『역사와 현실』 19, 1996 참조.

소련 정부는 소련군의 주둔 경비를 정부 예산에서 충당하지 않고 소련군 사령부 군표를 발행함으로써 해결하였다. 군표는 1945년 9월 21일부터 1 대 1의 환율로 구조선은행권과 함께 통용되었으며, 1947년 화폐 개혁 직전에는 72억 원으로 북한 유통 화폐량의 90%를 상회할 정도로 증가하였다.213) 1947년도 유통되었던 군표 72억 엔은 같은 해의 세출액 83.4억 엔의 86%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보였다. 당시 화폐 발행의 증가는 전적으로 군표 발행에 기인하는데, 이는 물가의 폭등을 낳고 생활 수준을 저하시켜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이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소련군 사령부는 1947년 6월 군표 유통은 중단시키 되 소련군이 회부한 금액에 대해서는 전액 교환해 준다는 조건하에서 화폐 개혁을 제안하였다. 화폐 교환의 결과를 보면, 북한 측이 교환에 회부한 구화폐는 71.2억 원으로 이 가운데 35%만 교환되었는데 반해 소련 측이 교환에 회부한 금액은 9.3억 원으로 100% 교환되었다.

이처럼 화폐 개혁으로 유산 계층의 화폐 자산을 수탈함으로써 사회주의적 평등의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폐 자주권을 획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소련 주둔군 비용을 소련 정부 대신 북한 정부가 떠안는 대가를 치르면서 이루어졌다. 또한 화폐 개혁은 광복 이후 토지 개혁, 국유화령 등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던 남북한을 두 개의 화폐 경제권으로 나누어 놓아 남북한 경제의 이질화를 심화시켰다.

북한의 화폐 도안은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광복 이후 토지 개혁, 국유화 등 일련의 ‘민주 개혁’으로 물적 토대가 지주와 자본가로부터 농민과 노동자로 이동하였다. 즉 시대의 주인이 지주와 자본가에서 노동자와 농민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7년 북한 화폐는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세종대왕, 이황 등 역사적 위인이 등장하는 우리의 화폐와 달리 망치를 든 노동자와 쇠스랑을 든 농부가 화폐에 등장한 것이다. 더욱이 이들 노동자와 농부는 새로 발행된 1원, 5원, 10원, 100원 등 모든 화폐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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