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2. 북한 화폐의 변천
  • 1992년 화폐 교환
이영훈

북한은 중앙 인민 위원회 정령(1992.7.14)에 의거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네 번째 화폐 교환을 단행하였다. 새로 1원, 5원, 10원, 50원, 100원권이 발행되었으며 구화폐와 1 대 1로 교환되었다. 새로 발행된 화폐에는 천리마 운동, 주체 사상, 김일성 등 1979년 발행된 화폐의 기본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등장 인물과 서해 갑문, 주체 사상탑 등의 건축물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체 사상탑(1982), 서해 갑문(1986) 등의 대형 건축물은 1980년대에 김정일의 지도에 따라 집중적으로 건설하였다. 그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통해 자신의 배짱과 정치적 지도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새롭게 발행된 화폐에는 직접적으로 김정일이 등장하지 않았으나 김정일이 주도한 건축물들을 등장시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92년 화폐 교환은 교환 한도를 강력하게 제한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교환 한도를 한 가구당 399원으로 정하고 나머지는 은행에 예금 후 지불하도록 하였고 30,000원 이상은 저금마저 불허하였으며 기관, 기업소 단체도 필요한 만큼만 교환하게 하였다. 당시 노동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이 10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교환 한도를 가구당 399원으로 정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교환 한도 이상의 주민 소득이 국가 재정으로 이전됨과 동시에 주민들의 소득 평준화를 낳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자율이 낮은 데다 예금 인출이 매우 어려워 일부 주민들은 어렵게 모았던 돈을 강물에 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은 북한 화폐보다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고 가치가 안정적인 외화나 귀금속 등을 선호하게 되었다.224) 국가안전기획부, 『최근 북한 실상』, 1994년 4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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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앞면)
1992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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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뒷면)
1992년 화폐 교환 은행권 1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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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 이유는 시장 경제 확산에 따른 부작용 차단과 국가 재정 확충에 있었으며, 그 밖에 일부 부유 계층이 소유한 화폐의 회수 등에 있었다고 판단된다.225) 당시 사람들은 장사하느라 은행에 돈을 넣지 않아 국고가 텅 비어 있던 상태였다. 1992년 당시 은행에 돈이 없어 노동자들의 임금은 세 달 이상 밀렸지만, 중국 화교들과 재일교포 집에는 은행보다 많은 돈이 저축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으며 시중에 유통되는 돈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북한 당국은 화교와 돈 많은 사람들을 목표로 개혁을 실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목표하였던 사람들은 다 빠져 나가고 돈 없는 노동자들과 한 푼씩 모은 사람들만 졸지에 휴지조각을 쥐게 되었다(The Daily NK, 2005년 5월 3일자). 1992년 화폐 교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80년대 말부터 외부로부터의 수입이 대폭 감소하면서 공급 부족이 심화되었다. 그 때문에 공장 가동률이 30% 미만으로 떨어지면서 주민들은 국영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농민 시장에서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구입해야 하였다. 당시 생필품은 국정 가격보다 5∼10배 이상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으며, 거래 금지 품목인 식량 또한 불법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주민들이 생필품을 국영 상점 대신에 시장에서 구입하였기 때문에 돈이 국가로 환류되지 않고 시장에서 유통되었고, 그 결과 국가 재정은 점차 줄게 되었다. 반면에 일부 주민들은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괴리를 이용하여 낮은 국정 가격에 사서 높은 시장 가격에 팔아 큰 매매 차익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북한 정부는 1991년 비사회주의 현상의 차단 이란 명분으로 농민 시장을 단속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공급 부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장을 단속하는 조치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북한 정부는 화폐 교환을 통해 교환 한도 이상의 화폐를 국가로 환수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화폐량을 축소시켜 시장 경제의 확산을 차단하는 결과를 기대하였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화폐 교환을 통해 화폐 유통량을 줄인 만큼 물가가 하락하지는 않았으며 경제가 호전되지도 않았다. 공급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1995∼1997년의 ‘고난의 행군’기 동안에는 쌀값이 4∼8배 정도 오르는 등 전반적으로 물가가 크게 인상되었고 1998년에는 500원권이 새로 발행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경제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선군(先軍) 정치를 앞세운 경제 관리, 인민 경제 계획법의 제정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으나 공급 부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으며 자생적으로 확산되는 시장 경제의 진전을 막을 수 없었다.226)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영훈, 「북한의 ‘자생적’ 시장화와 경제개혁의 전개」, 『통일문제연구』 44, 평화문제연구소, 2005 참조.

마침내 계획 경제의 위축과 시장 경제의 확대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2002년 7월 1일 시장 경제를 적극 수용하는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를 단행하였다. 북한은 7·1 조치를 통해 국정 가격을 평균 25배 정도, 임금 수준을 평균 약 20배 인상하여 1인당 임금 수준을 월 2,000원 정도로 책정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큰 폭의 국정 가격과 임금의 인상은 낮은 국정 가격과 높은 시장 가격 간의 차이에 따른 부작용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227)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영훈, 「북한 경제정책의 변화와 향후 전망 : 가격을 중심으로」, 한국은행, 2005 참조. 즉, 공급 부족이 심화되면서 국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가 점차 벌어지게 되었고, 주민들은 국정 가격으로 국가 물자를 빼돌려서 농민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반면에 정부는 국정 가격으로 판매해야 하는 기업소 단위들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 지출을 지속해야 하였다. 그 결과 계획 경제가 위축되고 시장 경제가 확산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북한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 경제를 정상화시키고자 가격을 현실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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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고액권-500원권(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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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권(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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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격 현실화는 그동안 억눌려 왔던 인플레이션을 뒤늦게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지속적인 물가 하락을 사회주의 ‘법칙’적 현상으로까지 규정해 왔기 때문에 20배 이상의 물가 인상은 국가 권위의 실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늘어나는 화폐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1,000원권, 5,000원권 등 고액권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2005년에는 200원권을 새롭게 발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편, 국정 가격 및 임금의 대폭적인 인상과 그에 따른 화폐 발행의 증가는 7·1 조치 이후 인플레이션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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