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3. 화폐 경제로의 이행
  • 화폐 기능의 확대
이영훈

북한 경제가 현물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 이행함에 따라 화폐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

가치 척도로서 과거 북한 화폐는 ‘생산물의 가격과 원가를 계획’하는 기능을 하였다. 국가의 가격 기구는 생산물에 투입된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하며, 예외적으로 사회주의 우월성을 시현하기 위해 대중 소비품은 낮은 가격으로, 사치재는 높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를 들어 쌀의 배급 가격은 킬로그램당 8전으로 실제 (암)시장 가격에 비해 수백 배의 낮은 가격을 유지해 왔다.

이와 더불어 화폐는 통제의 기능을 하였다. 국가의 재정·금융 기관은 기업과 기관에 대한 재정 지출 또는 은행 대출을 통해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게 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원에 의한 통제’라고 한다. 이러한 가치 척도 및 통제 기능을 토대로 국가 계획 기관은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계획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시장 경제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가격이 계획 기구에 의해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을 결정되는 게 아니라 시장의 수요 공급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미 쌀을 비롯한 소비재의 대부분은 시장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고 일부 생산재도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원에 의한 통제’는 북한 재정의 축소로 인해 재 정 통제 대신 은행 통제로 대체되고 있다. 은행 통제는 수익이 나는 공장·기업소에 한해 대출이 되고 있어 실질적 의미에서 ‘원에 의한 통제’는 과거에 비해 엄격해진 편이다.

과거 교환 수단으로서 북한 화폐는 제한된 기능을 하였다. 사회주의하에서 ‘상품’인 소비재의 거래는 ‘현금 거래’를 하고 ‘상품적 형태’를 띠는 생산 수단의 거래에서는 ‘무현금 거래’ 를231) 무현금 거래는 기관, 기업소 상호 간에 원료, 자재, 설비 등 생산 수단을 구입할 경우 은행에 개설된 은행 계정 간의 차감 결재로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원칙으로 한다. 그 때문에 소비재를 거래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화폐는 ‘교환 수단’으로 기능하여 화폐 유통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었다.

그러나 소비재뿐만 아니라 생산재와 식량의 자유 거래가 증가하면서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은 확대되고 있다. 과거 생산재의 기업 간 현금 거래는 금지되었으나, 국가의 자재 공급 체계가 화해되면서 생산재의 현금 거래가 관행화되어 왔으며 2002년 1월에는 생산재를 거래하는 ‘사회주의 물자 교류 시장’마저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식량 배급 또한 국가로부터의 배급은 거의 중단되었으며 공장·기업소 차원의 배급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가동률이 낮은 공장·기업소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정상적으로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어 나머지 부족한 식량은 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불 수단으로서 화폐는 신용 거래나 임금과 세금 지불 등에서 나타나는데, 과거 북한에서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은 대부분 노동자 사무원에 대한 임금 지급에 국한되었다. 신용 거래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며, 주민들에 의한 납세는 1974년 세금 폐지를 선언한 이후 1990년대 이전까지 없었다.232) 북한은 1974년 4월 주민이 납부하는 세금을 폐지하였으며 ‘세계에서 세금 없는 첫 사회주의나라’라고 자부해 왔으나 1990년대 들어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시장세를 거두고 있으며, 2002년 7·1조치를 계기로 토지세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대가도 일부만 화폐로 지급되고 있다. 농민에게는 현금과 함께 현물이 지급되고 있으며 노동자에게는 임금 외에 식량 배급 등의 ‘추가적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233) ‘추가적 혜택’의 규모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통계 자료가 남아 있는 1950년대 후반의 경우 임금의 70% 수준이었다. “우리 당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 노동자, 사무원들의 물질 문화 생활 향상을 위하여 실로 그들의 노임의 70%에 해당하는 추가적 혜택을 주었습니다.” 국토통일원, 『조선로동당대회 자료집』 2, 1988, p.227.

그러나 최근 조세가 신설되고 화폐 임금 중심의 보수 체계가 확립되면서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은 확대되고 있다. 1990년대 농민 시장에 서 징수되기 시작한 시장 사용료(시장 판매 매대 사용료)와 장세(상인들에 대한 소득세), 2002년 7·1 조치를 계기로 토지 사용료 등이 신설되었다. 또한, 7·1 조치를 계기로 북한은 화폐 임금 중심의 노동 보수 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군수 공장, 수출 기업소, 주요 기간 산업의 공장·기업소 등 가동되는 일부 공장·기업소를 제외하면 여전히 임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기업 및 노동자가 부를 축적하는 데서 나타난다. 과거 북한에서 기업은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없으며 주민들의 저축 성향은 매우 낮아 축재 수단으로서의 화폐 기능은 매우 미약하다.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저축할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을 해도 되찾기가 힘들어 저축을 기피하고 있다.

최근 화폐의 기능이 전반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나 주민들의 저축 성향은 여전히 낮은 상황이다. 더욱이 최근의 물가 상승, 소지하고 있던 화폐가 휴지화되었던 1992년 화폐 교환의 경험, 7·1 조치 전후로 야기된 화폐 교환 소문 등으로 인해 북한 화폐는 축재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높지 않다. 오히려 달러나 위엔화 등 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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