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8권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 제6장 북한의 화폐
  • 3. 화폐 경제로의 이행
  • 물신주의의 만연
이영훈

주민들의 경제 활동이 점차 공장 기업소에서의 계획 수행에서 개인 생산과 시장에서의 생존 경쟁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의 가치관이 이념 중심에서 돈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이미 1990년대에 들어서면 북한에서는 “국정 가격과 도덕이 없어졌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국정 가격이 없어졌다는 말은 주민들이 국가 상점이 아니라 시장에서 시장 가격으로 원하는 물품을 구입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말로 계획 경제가 그만큼 와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도덕이 없어졌다는 말은 주민들의 가치관이 사회주의 도덕에서 돈 중 심으로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고난의 행군기를 거치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면 굶어죽는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당시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것이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돈임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의지했던 ‘토끼와 양’은 다 굶어죽고 자기 나름의 생계 수단을 확보했던 ‘늑대와 승냥이’는 살아남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주민들의 직업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가장 원하는 직업이 당 간부, 보위 일꾼, 안전 일꾼 등이었으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중류층은 무역 일꾼이나 상업 일꾼을 선호하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위층은 여전히 당 간부를 최고로 여기지만 중류층은 무역 일꾼·상업 일꾼·선원 등을, 하류층은 운전 기사·외화벌이 노동자 등을 선호하고 있다.

한편, 남녀 관계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북한 정부는 비전문직 여성 근로자들에 한해 사직을 허용하였다. 과거에는 ‘8·3 자금’이라는 뇌물을 주고 부분적으로 사경제 활동을 했으나 비전문직 여성 근로자들은 아예 사직을 하고 사경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부 여성들의 하루 소득이 남편의 한 달 임금에 버금갈 정도로, 여성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가계 소득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여성들은 열심히 시장 활동을 하여 생계를 꾸리는 반면에 남성들이 가동되지 않는 공장처럼 돈을 벌지 못하고 빈둥거리게 되자 남녀 관계가 점차 기울기 시작하였다. 과거 하늘에 비유되던 남편의 지위가 ‘집 지키는 멍멍이’, ‘만 원짜리 자물쇠’, ‘옷걸이’ 등의 빈정대는 말들이 유행할 만큼 추락하고 있다.

한편, 국가의 통제 능력이 약화되고 시장 경제로 이행하게 됨에 따라 뇌물 수수가 일반화되고 있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화폐 경제 또 는 시장 경제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의 사회에서의 인간 관계는 교환 관계가 아니라 증여-답례가 일반적인 관계라고 하였다.234) M. Mauss, Essai sur le don, 이장률 옮김, 『증여론』, 한길사, 2002, p.193. 사회주의에서 대중 필수품을 낮은 가격으로 공급하는 가격 결정 원칙은 일면 이러한 증여-답례의 관계가 관철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저가의 배급을 ‘추가적 시혜’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노동의 대가라기보다 충성으로 보답해야 할 일종의 선물인 셈이다. 시장 경제가 미발달하여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거나 재산권이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사회일수록 권력자의 재량에 의해 자원 배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커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뇌물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북한에서는 웬만한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는 뇌물 제공이 필수적이며 당원 입당, 탈북, 심지어 사형 감면조차 뇌물을 제공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사회의 부패상을 빗대어 “노동자는 노골적으로 해먹고, 당 간부는 당당하게 해먹고, 안전원은 안전하게 해먹고, 보위원은 보이지 않게 해먹는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북한에서 인기 있는 뇌물은 외화나 국정 가격으로 현물을 제공하는 것인데, 외화는 북한 체제의 지속성에 대한 회의감 및 화폐 개혁 등으로 북한 화폐가 가치 저장의 기능을 상실한 데 따른 것이다. 또한, 국정 가격으로 현물을 제공할 경우, 이를 농민 시장 등에서 암거래 가격으로 판매하여 몇 배의 매매 차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235) 국가안전기획부, 앞의 책, 1995년 1월. 그러나 돈을 줄테니 그 대가를 내놓으라는 식의 증여는 부정한 반대급부를 막연하게 기대하게 된다. 권력은 세금 징수를 통해 재정을 확충하는데, 권력의 수하들이 뇌물을 받아 챙기기 시작하면 권력의 몫이 그만큼 줄어든다. 그래서 권력이 약한 나라일수록 뇌물 수수는 만연하게 된다. 사실상 북한에서는 개인과 기업에 대한 국가의 보호가 약화되면서 지도자의 명령보다는 개인과 기업 자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점차 만연해 가고 있다.

1991년의 농민 시장 단속, 1998년의 농민 시장 규제 및 노동자들의 공장 복귀 조치 등을 통해 시장 경제의 확산을 통제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특히 고난의 행군기를 지나면서부터 정부의 통제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심지어 농민 시장에서 안전원이 총을 들고 상거래를 규제해도 주민들이 순응 하지 않았으며, 안전원과 주민들의 충돌도 잦았다고 한다.

법으로 통제하기가 불가능하기 시작한 게 대체로 97년도부터입니다. 97년도에는 안전원들이 총 뽑아 들어도 “야, 이 새끼 쏘라. 총에 맞아 죽으나, 굶어죽으나 같으니까 죽여라. 맘대로 하라.”고 나섰단 말입니다. 이제는 굶주리니까 안전원이 총을 뽑았어도 쏘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재간 없이 법이 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236) 이영훈, 앞의 글, 2005, p.34.

2005년 10월 정부 차원의 쌀 배급제 실시 등을 발표하였으나 주민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조직적인 통제로 억눌려 있기는 하지만 지도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 빈곤이 장기화되면서 돈이라는 물신이 점차 김일성·김정일이라는 우상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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