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을 내면서
이은주

나는 오늘 왜 이 옷을 입었을까? 우리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다소 생소한 듯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항상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한 옷을 고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옷을 입는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추워서, 아니면 더워서 입는다고 하는 ‘신체 보호설’, 창피하지 않기 위해 입는다는 ‘수치 관념설’, 짝짓기를 위해 옷에 신경을 쓴다는 ‘유혹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하고 싶어한다는 ‘장식설’ 등등, 일찍이 인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이런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어느 이론 하나만으로는 복잡한 인간의 착장 동기를 설명할 수 없다.

옷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인간이 옷을 착용하는 동기는 더욱 다양해졌다. “옷이 날개다”, “잘 먹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와 같은 말은 옷을 잘 입으면 못난 놈도 잘난 놈으로 보일 수 있다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옷을 입는 동기는 상황에 따라 바뀔 뿐만 아니라 하나가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종류가 동시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물론 그 다양함 안에서도 비 중을 크게 두었던 동기가 있었다. 특히, 뚜렷한 계급의식이 존재했던 전통 사회에서는 신분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옷이었다. 또한, 예(禮)를 중시해 온 유교적 환경은 각각의 의례에 따라 까다로울 만큼 옷의 종류를 구분하였으며, 차려입는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전통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옷차림에 기대했던 의미는 사회적인 의미와 의례적인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렇듯 복잡한 동기에서 형성된 전통 사회의 복식 문화를 몇 가지 시각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제1장과 2장에서는 복식 문화의 근간인 ‘옷’과 ‘옷을 만드는 소재’로 나누어 내적·외적 환경 속에서 옷과 옷감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그 변천 과정과 시대적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제3장부터는 주로 조선시대 복식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요즈음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라는 대중적 매체를 통해 다양한 시대의 복식을 접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고증 작업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호감이 간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외의 시대 복식은 그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복식 문화에 대한 연구는 다른 시대에 비해 양적·질적으로 확대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반 독자들도 다른 시대보다 접할 기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복식 문화를 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여겼다. 마지막으로 양복과 양장으로 변화되는 개화기까지 살펴보면서 현재 우리 옷이 처해 있는 위기를 되짚어보고 현재의 상황에서 탈피하여 전 세계 젊은 친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옷이 멋지게 부활되는 날을 기대해 보려고 한다.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에서는 우리 옷의 기본 형태를 다루었다. 바지·저고리 등의 의복류를 비롯하여 관모, 허리띠, 각종 장신 구를 살펴보고 그 후 전개되는 시대별 복식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삼국시대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복식 양식에 외래 양식인 중국 요소가 혼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 고유 복식 양식에 당나라를 통해 받아들인 외래적 요소가 조화된 이중 구조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9세기 흥덕왕 복식 금제(服飾禁制)에 제시된 구체적인 옷과 직물의 명칭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국제적 양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고유 양식을 유지하면서 의례적 상황과 신분에 따라 더욱 분화된 복식 문화를 향유하였다. 왕복(王服)은 제복(祭服)·조복(朝服)·공복(公服)·상복(常服)·융복(戎服)·편복(便服)으로 나뉘어졌으며, 백관복(百官服)은 제복·조복·공복·융복 등으로 분화되었다. 특히, 송나라와 거란(요), 여진(금), 그리고 몽고(원)와의 다원적인 외교 관계에서 외래적 요소가 추가되면서 문화의 다양성을 형성해 갔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가치관이 자리를 잡으면서 보수적인 복식 문화를 창출해 가는 듯하였으나 후기에는 중국을 통한 서구 문화의 수용, 역관이나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의해 풍요로운 복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여성의 복식도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저고리는 짧고 밀착된 형태로, 치마는 엉덩이를 부풀리는 항아리형으로 바뀌어 감을 볼 수 있다.

제2장 ‘우리나라 옷감의 문화’에서는 옷의 재료가 되는 직물의 역사적 변천과 특성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5000여 년 전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가락바퀴와 실(麻絲)이 끼어 있는 바늘이 출토되었으며 고조선 지역에서는 견직물도 생산하였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발해의 고대 사회에서 이미 견섬유·마섬유·모섬유·면섬유의 4대 천연섬유가 존재하였으며, 당시의 옷감은 지금과 달리 대단한 공예품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에 생산하였던 금(錦), 직성(織成), 채단(綵段), 능(綾), 나(羅), 사(紗), 견(絹), 주(紬) 등의 다양한 견직물과 모시, 베 등의 마직물이 중요한 수출품이었음을 확인하고, 고려 말 불상에서 나온 300여 점 의 불복장(佛腹藏) 유물을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화려했던 옷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처럼 화려하고 다양했던 옷감들이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지 못하고 명주, 무명, 베, 모시와 같은 단순한 옷감만이 우리의 전통 직물로 명맥을 이어온 과정도 다루었다. 아울러 옷감의 종류와 명칭, 옷감 무늬와 그 속에 담긴 의미, 바느질 풍속 등을 정리해 보았다.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살던 특별한 사람들의 차림새를 알아보았다. 궁궐은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과 매일 궁궐을 출입하며 업무를 수행하는 문무백관 등이 생활하는 곳이다. 궁중의 생활은 왕권 국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엄격한 규범 아래 이루어졌으며, 생활양식도 가장 세련되고 화려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옷차림은 이러한 궁중 생활의 법도에 따라 세련되고 화려하면서도 엄격한 규범 문화를 그대로 잘 드러낸다. 궁궐에 머물며 생활하거나 궁궐을 드나들며 업무를 보았던 사람들의 옷차림은 각각의 인물의 지위와 역할, 특성을 그대로 보여 주기에 궁중 생활을 흥미롭고 진솔하게 반영한다.

많은 사람이 서로 만나는 공공 장소인 궁궐의 특수성 때문에 궁궐 안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언제나 예의를 갖춘 모습이어야 했다. 따라서 궁궐 안에서는 업무의 특성과 의식, 행사의 종류와 중요도에 따라 입는 옷인 관복을 입었다. 관복에는 보통 조복·제복·공복·상복이 있다. 이러한 관복은 또한 신분의 특성과 벼슬의 높낮이에 맞게 색·재료·장식 등을 달리하여 구별되게 입었다. 한편, 궁궐 안 여인들은 공식적인 행사 참석은 흔하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일상 생활에서도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해야 했다. 왕비를 비롯한 궁궐 내의 내명부(內命婦)는 치마와 저고리 위에 간단한 예복(小禮服)인 당의를 입었으며, 의식과 행사에는 적의·노의·장삼·원삼 등의 예복을 신분에 따라 입었다. 또한, 상궁, 나인, 생각시도 각자의 신분에 따 라 규정된 복식을 착용하였다. 이렇듯 궁궐 안 사람들의 옷차림을 통해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각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던 생생한 모습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찬 평생 의례복’에서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평생동안 치렀던 다양한 의례 때 입었던 의례복을 다루었다. 의례복은 상징물로 각 의례에 합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돌날에 입는 옷은 무슨 의미를 지녔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돌옷은 시대에 따라 종류와 형태가 변화하였지만 그 옷을 통해 아기의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특히, 오방색을 중심으로 한 색동의 까치저고리, 오방장두루마기 등은 화사함을 주는 동시에,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비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상투를 틀고 쪽을 찌면서 입었던 관례복은 성숙한 어른이 되고자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으며, 혼례복은 남녀의 새로운 인연을 상징하면서 남녀간의 애정과 다산(多産)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또한, 장수를 해야만 치를 수 있었던 수연례(壽宴禮)와 회혼례(回婚禮)의 복식도 살펴보면서 전통 사회에서 얼마나 부귀와 장수를 갈망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을 마감하면서 입었던 수의(壽衣), 그리고 돌아가신 분을 정성으로 보내드리기 위해 입었던 살아 있는 자들의 상복(喪服), 돌아가신 분을 기리면서 입는 제복(祭服)을 통해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백성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당시의 모습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에서는 전통 사회에도 유행이 있었다면 유행을 선도해 가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전통 사회는 현대와 달리, 신분이 제도적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신분과 신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즉, 신분은 출생과 함께 정해져 개인의 생활을 공적·사적으로 규제하고 한정시키는 관계로 낮은 신분에서 새로운 유행 스타일을 창조해 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의 특권층인 양반은 높은 모자, 넓은 소매로 신분의 우월과 권위를 표출하고자 하였으며, 고급 비단과 공이 많이 들어가는 누비 등의 귀한 소재를 통하여 단아한 멋스러움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 반가 부녀자 역시 엄청나게 비싼 가체(加髢)로 머리를 장식하고, 초피(貂皮)나 사라능단(紗羅綾緞) 등으로 만든 복식을 착용함으로써 다른 신분의 여성들과 구별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중흥기를 맞이한 영조·정조 시대에는 유행을 선도하는 계층도 궁중을 중심으로 한 상류 계층이 아니라 잡직의 별감(別監)과 심지어 천민 계층인 기생으로 옮겨 갔다. 별감이나 기생들은 새로운 유행을 형성해 가면서 그들의 직업적인 특징과 심리적인 면까지 반영한 예술성 높은 복식을 입었다. 그들의 복식을 통해 전통 사회에서의 패션 리더들의 역할과 새로운 패션 스타일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관직은 비록 낮았을지언정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별감의 복식은 색상면에서 단연 뛰어났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주황색의 초립을 쓰고 직령, 철릭을 홍색 한 가지로 하였으며, 여기에 각양각색의 허리띠는 별감이라는 직업의 특권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였다. 기생 역시 천민이지만 합법적으로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엔터테이너로 사대부와의 교제를 통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인물들이었다. 더 짧게, 더 좁게 디자인한 극단의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의도적으로 노출된 속옷은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아이러니칼하게도 은장도(銀粧刀)로 복식미를 완성한 그들의 예술적 탁월성과 창의성은 지금까지도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고 있다.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에서는 머리치장, 몸치장, 발 치장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미의식을 다루었다. 복식을 통한 장식은 모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양식의 표현으로 그들 생활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치장은 개인의 기호를 뛰어넘어 신분적 제약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조선시대 남자들은 의관을 정제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둘렀다. 이때 망건을 장식하는 풍잠과 관자는 재료와 조각 등으로 신분을 구별하는 역할을 하였다. 관모(冠帽)의 종류도 다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 종류, 높이, 너비 등이 달라지는 유행에 민감한 아이템이었다. 엄격한 조선시대의 신분 제도는 관모뿐만 아니라 갓끈, 허리띠, 그리고 부채 끝에 장식하는 선추(扇錘)에도 규제가 있었지만 각자의 멋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자들의 치장 또한 머리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작고 아담하게 머리 둘레에 땋아 얹었던 머리가 중·후기에는 나라에서 규제를 해야 될 정도의 크기로 사치스럽게 변하였다. 이에 따른 조치로 궁중 여인의 머리 모양인 쪽머리를 백성들도 할 수 있게 허용하였고, 비녀·뒤꽂이 같은 장신구 사용도 일반화되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조바위와 아얌이 유행하였다. 한편, 상류층 여인들은 외출할 때 말을 타고 너울을 썼으며, 하류층의 여인들은 전모를 써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 밖에 비녀, 댕기, 노리개, 가락지, 귀고리 등이 중요한 장신구 역할을 하였다. 우리 옷이 구조적인 면이나 색채, 문양 등이 단순하다는 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장신구는 다양한 색상·크기·소재 등으로 이를 보완하여 옷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관모와 단아한 장신구, 클지언정 동백기름으로 마무리하여 깔끔하게 틀어올리거나 쪽을 찐 단정한 머리 모양에는 세련됨과 아울러 정제된 유교적 정신문화가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에서는 개화기 이후 우리 고유의 복식 문화를 대신하게 된 서양 옷의 도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즉 서양식 옷은 언제부터 입게 되었을까? 개항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근대적 변화가 옷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서양 옷은 우리의 차림새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외출할 수 있었던 여인들이 양산에, 다 리를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짚신 대신 고무신과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전통 한복을 개량한 통치마, 양복, 파마 등이 뒤섞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를 통하여 양산, 하이힐, 양장 등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유행으로 이어졌다. 우리 옷을 밀어낸 서양 옷이 들어온 지 100년, 이미 일상복의 자리를 내어준 지는 오래되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복도 간편한 서양 옷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 옷이라는 이름하에 국적 불명의 옷이 범람하고 있고, 혼인 때의 한복까지도 대여해서 입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우리 옷의 고난 속에서 문화 관광부에서는 1996년 12월 4일 ‘한복 입는 날’을 제정하였다. 우리 옷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한복의 고급화·대중화·기성복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앞으로도 갈 길은 먼 것 같다. 현재 즐겨 입는 생활 한복은 전통성에 뿌리를 두고 21세기의 특성에 맞도록 디자인하여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 상품으로 육성해야 할 것이며, 전통 한복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는 상징적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96년 선언문의 취지처럼,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한복의 일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2006년 7월

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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