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1장 우리 옷의 기본형과 시대별 변천
  • 3. 고려시대의 남녀 옷차림
  • 치마, 저고리, 포의 일반 복식
김문자

고려 여인의 치마저고리 입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우리 고유의 착장 방법인 치마 위에 저고리를 착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통일신라시대의 복식에 나타난 당·송의 여인 복장처럼 저고리를 먼저 입고 그 위에 치마를 입는 방법이다. 『고려도경』에 보이는 상하 귀천 없이 착용하였다는 백저의(白紵衣), 황상(黃裳)은 우리 고유의 양식으로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형태였을 것이다.

귀족 여자들은 치마저고리 위에 흰색 모시로 만든 백저포(白紵袍)를 입었는데, 그 제도는 남자의 포와 비슷하다. 평상시에는 포를 착용하지 않고 치마저고리 차림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백저포 위에는 무늬가 있는 허리띠를 띠었다. 또 여기에 오색찬란한 끈에 금방울을 매고 사향(麝香)과 같은 향료 주머니를 찼는데, 이러한 패물이 많은 것을 귀히 여기고 자랑으로 삼았다고 한다.18)유희경·김문자, 『한국 복식 문화사』, 교문사, 2004,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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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의 여인상
수월관음도의 여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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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덕사(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19)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관음보살과 예불을 드리는 선재동자로 구성된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 작품과 같은 도상의 원류는 둔황(敦煌)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도상은 중국 내륙에서도 제작되어 고려에까지 파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일본 대덕사(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은 14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의 오른쪽 여인은 꽃무늬가 있는 홍색 치마 위로 노란 저고리를 입고 있다. 저고리에는 고름을 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저고리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면서 띠가 없어지고 앞에 매듭단추나 실용성 있는 작은 고름이 생기게 되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도 동정이 달려 있다. 저고리 소매가 좁아지는 경향을 느낄 수 있으며, 치마는 중간에 매듭이 있는 허리끈이 길게 늘어졌고 치마폭이나 길이도 다소 줄어든 듯이 보인다. 한편, 왼쪽 여인은 동정이 달린 포를 착용 한 것으로 보이며 허리에 띠를 매고 늘어뜨리는 중간에 매듭 장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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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 부인 초상
조반 부인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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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마리 고분 벽화
둔마리 고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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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박익 묘 벽화의 여인상에서도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깃은 남자 옷과 마찬가지로 깊게 여며지는 형이며, 옆트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치마는 끈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다.20)고부자, 앞의 책, 219쪽.

조반(趙胖, 1341∼1401) 부인의 초상화에서도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허리를 덮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는데, 치마 위로는 흰색 치마허리 끈 두 개가 나란히 늘어져 있다. 치마보다 더 진한 쑥색 비단 저고리를 착용했는데 깃과 소매 끝에는 홍색 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흰색 옷을 입었다.21)이강칠 외, 『역사 인물 초상화 대사전』, 현암사, 2003, 46쪽. 또한, 치마저고리 위에는 옷깃과 수구(袖口, 소맷부리)에 적색 선이 둘러진 포를 입고 있다.

이와 같이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고 있는 모습은 방배동 출토 나무 인형(木偶像)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서민 여인상의 치마 위로도 허리끈이 나란히 길게 늘어져 있다. 손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저고리에는 작은 옷고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은 모습은 경남 거창 둔마리(屯馬里) 고분 벽화의 여인상에서 발견된다. 이 고분 벽화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인은 좁은 소매의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있다. 치맛주름은 허리선에만 잡혀 있으며, 치마허리는 다른 감으로 달고 표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형태와 같다.

하연(河演, 1376∼1453) 부인의 초상에서도 저고리 위에 치마를 착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대가 비슷한데도 조반 부인과는 다른 착장 방법을 보이는데, 이처럼 같은 귀족층에서도 조선 초기까지는 상반된 두 가지의 차림새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연 부인은 치마저고리 위에 포를 입었으며, 그 위에 표를 두르고 있다. 포 옆으로 흘러내린 두 줄의 적색 띠는 통일신라시대의 요반 같은 이색 치마 허리띠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저고리의 특징은 서민 남자 복식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정의 발생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온양 민속 박물관에는 1302년에 제작된 아미타불 복장 복식 세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말기의 복식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저고리 한 점과 자의(紫衣), 중의(中衣)로 이름이 붙여진 포 두 점이 있는데, 자의는 포형으로 앞여밈이 깊은 형태이며 중의는 자의의 밑받침 옷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22)유희경, 「15세기 복식의 양식과 특성-신말주계회도(申末舟契會圖)를 중심으로-」, 『한국 복식』 10,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1992, 10∼14쪽. 비록 포의 양식이기는 하지만 자의의 경우 저고리에 동정이 달려 있다. 저고리의 깃·도련·소매 끝·치맛단 등에 둘러져 있던 선이 이때에 이르러 사라지면서 그 대신에 흰색 동정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온양 박물관 소장 저고리를 통해 고려시대 여인이 입은 저고리 형태를 추적해 볼 수 있다. 깃 부분에 적힌 먹글씨(墨書)23)상의에는 “腹藏入敎是綃脊衫納宰臣兪弘愼妻李氏”라고 묵서로 쓰여 있다.에 ‘초척삼(綃脊衫)’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 저고리는 고대의 저고리에 비해 길이가 짧고, 여밈이 겹침형으로 변했으며, 이색선(異色襈)이 사라지고 옆트임이 생겼다. 화장(등솔 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은 지금의 저고리에 비해서 매우 길지만 함께 발견된 포 형태의 자의나 중의에 비해서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당시의 상의류는 손등을 완전히 덮는 형태였을 것이다. 즉, 『고려도경』에 “손에 부채를 들었다 하더라도 손톱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흔히 강낭(絳囊)으로 이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소맷자락 자체가 길어 손등을 완전히 덮는 형태였을 것이다. 또한, 매듭단추를 사용하여 저고리를 여몄는데, 매듭단추는 대가 없어지고 고름이 생겨나는 과정의 첫 단계에 해당한다. 매듭단추는 겉깃의 끝과 안깃의 끝에 달고 단추 고리를 사용하고 있다. 단추를 끼울 때는 꼬임을 벌려서 끼워 단추가 빠질 염려가 없다.

고려시대의 치마는 여덟 폭으로 만드는데 위에는 잔주름을 수없이 잡아 둥글게 입음으로써 중후한 멋을 강조하였다. 또한, 길이가 대단히 길어서 걸을 때 치맛자락을 겨드랑이 밑에 끼고 다녔다. 치마의 색상은 가을과 겨울에는 색이 짙거나 옅은 황색을 많이 입었는데, 다만 왕비의 치마에만 쓸 수 있어서 착용이 금지되었던 홍색을 제외하면24)조효순, 『한국인의 옷』, 밀알, 1995, 72∼73쪽. 조반 부인이나 하연 부인의 초상화를 통해서 치마 색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다. 치마허리는 치마와는 다른 감으로 만들었으며, 치마허리 끈을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 말의 관복은 명나라 제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명나라 여인들이 당나라와 송나라 복식의 착장 방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여성의 평상복은 지금과 같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우리 고유의 양식을 지키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의상의 착장 방법도 원 간섭기에 일시적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내려온 우리의 전통 양식이 지속되다가 깃 모양 및 길이가 달라지면서 여밈 방법에 약간씩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과 혼재되어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이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는 착장 방법으로 통일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고려시대 여인들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몽수(蒙首), 일명 개두(蓋頭)라고 불리는 쓰개를 착용하거나, 몽수 위에 입(笠)을 덧쓰기도 하였다. 몽수는 서역(西域) 부인의 머리 장식이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당나라에서는 이를 멱리(冪䍦), 유모(帷帽), 개두 등으로 불렀다. 몽수는 머리에서부터 덮어쓰는 것으로 눈과 얼굴을 드러내 놓았는데, 땅에 끌릴 정도의 길이였고 외출할 때 썼다.25)임명미, 『한국의 복식 문화』 Ⅰ, 경춘사, 1996, 453쪽. 반면, 평민 여성은 몽수를 걷어 올리고 다녔으며, 중국에서 들여온 화관(花冠)이나 몽고풍으로 보이는 족두리도 혼례 등의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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