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3. 중요한 교역품 고려시대의 옷감
  • 옷감을 생산하는 관청
조효숙

고려시대의 직물 생산은 중앙과 지방에 옷감 생산을 담당하는 관서(官署)를 두어 전문 장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 사원이나 일반 백성들이 전문적 혹은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민간(民間) 수공업, 그리고 천인들에 의해 구성된 특수 수공업 단위인 소(所)에서 생산되는 소 수공업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관영 수공업을 총괄하던 공조(工曹)에서는 행정 관리와 생산 기술 체계를 정연하게 갖추어 옷감 생산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특별 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에는 어의(御衣)를 만드는 상의국(尙衣局), 이에 필요한 옷감을 관장하는 대부시(貸付寺)가 있었으며, 금·능·나의 특별한 옷감은 액정국(掖廷局)에 금장(錦匠)·나장(羅匠)·능장(綾匠)을 두어 분업 생산하였고, 계와 수는 잡직서(雜織署)에 계장(罽匠)과 수장(繡匠)을 두어 분업 생산하였다. 또한, 옷감의 염색은 도염서(都染署)라는 별도의 부서를 두어 수행하였다. 대부시에는 정3품 판사가 배치되었고 그 밖의 관청에는 정6품 봉어(奉御)로부터 정9품 승(丞)에 이르는 관리들이 행정적으로 지휘하고, 그 밑에 감작(監作)·감사(監使)·사(史)·서령사(書令史)·서사(書史)·기관(記官) 등의 아전을 두어 실무 관리 및 장인을 독려하였다.76)『고려사(高麗史)』 권77, 지31, 백관2. 관영 공장에서 옷감을 생산하는 기술자들은 월급(別賜)을 지급받았는데, 작업의 종류에 따라 차별을 두었다.77)『고려사』 권47, 지47, 식화, 녹봉(祿俸). 금·계를 짜는 장인에게 능·나를 짜는 장인보다 높은 별사를 주어 더 많은 기술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에는 월급에 차등을 두는 등 체계적인 생산 관리 시스템으로 운영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도에도 금기방(錦綺坊), 잡직방(雜織坊), 갑방(甲坊)과 같은 소규모 공장을 두고 다수의 부역층 장인이 소속되어 금이나 기, 그 밖의 직물이나 피혁 제품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기 원나라의 지배 아래서 견직물 생산이 약화되면서 이러한 지방의 수공업장은 직물 생산보다는 능·나를 저장하는 창고로 전락하였다.78)『고려사』 권89, 열전20, 권단(權㫜). 또한, 서경(西京)에는 능라점(綾羅店)이라는 부서를 설치하여 각 도의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능·나와 같은 고급 옷감을 관리, 판매하며 때로는 주문에 따라 생산도 하였다.79)홍희유, 『조선 중세 수공업사』, 지양사, 1988, 94쪽. 그 밖에 사소(絲所)·주소(紬所)가 있었는데 대부분 직조 기술을 배운 노비가 면주와 같은 단순한 옷감이나 비단실을 충당하였다. 이들은 부과된 공물량(貢物量)을 납부한 다음에는 독립적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민간 수공업은 사찰에 소속된 전문 장인이나 농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베, 모시, 면주와 같은 소박한 옷감을 주로 생산하였으나 경 우에 따라서는 사신을 파견할 때 그 나라에 바치는 공물용(貢物用) 고급 옷감이나 생업을 위한 판매용 상품도 생산하였다.

예를 들면, 1276년(충렬왕 2)에 한 여승이 원성공주(元成公主)에게 헌납한 꽃무늬가 있는 백저포(白紵布)의 섬세함이 매미 날개 같다고 하며,80)『고려사』 권89, 열전, 후비(后妃)2, 충렬왕 제국 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한강(漢江) 두모포(荳毛浦)에 있는 암자의 니비(尼婢)는 직조 기술이 우수하여 상당히 세밀한 면주를 짜서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81)이능화(李能和), 『조선 불교 통사(朝鮮佛敎通史)』 하, 花紋紵布 尼婢織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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