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어 양국 사이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그 밖에 요나라·금나라·원나라·일본과도 정치적인 이유로 교류를 맺어 물자를 교환하였으며, 사무역·밀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공(朝貢)이나 사여(賜與)의 물품은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특산품을 보내는 것으로, 이 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감이 국가 간의 매우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고려에서 외국에 보낸 직물의 종류는 금, 직성(織成), 채단, 능, 나, 사, 견, 주, 저포(苧布), 화문저포(花紋紵布), 세마포(細麻布), 흑마포(黑麻布), 황마포(黃麻布), 생중포(生中布), 생평포(生平布), 계, 백첩포 등이 있다.
고려 초기에는 오대(五代)와의 교역에서 계, 계금과 같은 모직물과 백첩포와 같은 면직물이 중요 수출품이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금, 계, 백첩포, 모시를 선물하였고,82)『책부원귀(冊府元龜)』 권970,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5. 945년(혜종 2)에는 후진에 각종 용이나 봉무늬가 있는 계금과 백첩포를 보내기도 하였다.83)『고려사』 권2, 혜종 2년. 982년(성종 1)에는 송나라에 금은사를 넣어 짠 계금으로 만든 포(袍)와 깔개(褥)를 보냈다.84)『송사(宋史)』 권487, 열전246, 외국(外國)3, 고려.
고려 중기에는 송나라와 대등한 규모로 옷감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1071년(문종 25)에는 사신 김제(金悌)를 송나라에 파견할 때 백첩포와 금· 계 이외에도 능·나·사와 같은 고급 견직물도 보냈다.85)『고려사』 권9, 문종 25년. 그 가운데 나는 색라(色羅) 100필, 생라(生羅) 300필로 견직물 중에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보내온 나 100필과 비교해도 네 배나 많은 분량이다. 옷감 이외에도 의복, 보료, 요대, 금합 등의 예물을 각각 금박이 찍힌 나 혹은 붉은색 매화무늬 나로 만든 보자기로 싸서 보냈다. 이는 당시에 고려에서 나를 짜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의미한다. 능도 고려에서 색릉(色綾) 100필, 생릉(生綾) 300필을 보낸 반면에 송나라에서는 200필만 보내왔다. 송나라에서는 계를 보내오지 않았으나 고려에서는 황계삼(黃罽衫), 홍계편복(紅罽便服) 이외에 방석, 병풍, 보료, 휘장도 계로 만들어 보냈다. 백저포나 황마포와 같은 마직물 역시 고려에서만 보냈다. 그러나 사는 송나라에서 색화사(色花紗)를 500필씩 보내왔는데 고려에서는 관모용으로 특별히 생산한 모자사(帽子紗) 20매, 복두사(幞頭紗) 40매 정도를 보냈을 뿐이다. 이처럼 송나라와 활발하게 옷감 교역이 이루어졌던 문종 시대를 전후하여 약 80여 년 동안이 고려에서 직물 생산이 가장 활기를 띠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긍에 따르면, “고려는 극히 아름다운 문라(紋羅), 화릉(花綾), 금, 계 등을 기교 있게 직조하였다.”86)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23, 토산조(土産條).고 하였다. 문라, 화릉, 금, 계와 같은 옷감은 고도의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의 눈에, 그것도 옷감이 발달한 송나라 사신의 눈에 고려의 옷감이 아름답고 기교가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면 고려시대에 고급 옷감을 짤 수 있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몽고의 침입 이후 원나라와의 교역은 이전의 오대나 송나라와의 교역에 비하여 품목에 변화가 생겼다. 계, 계금, 백첩포와 같이 신라 시대부터 수출하였던 모직물, 마직물 종류가 사라진 대신 견직물 종류와 마포, 저포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1231년(고종 18)에는 사라금수의(紗羅錦繡衣) 16벌, 자사오자(紫紗襖子) 두 벌, 능사유의(綾紗襦衣), 주포유의(紬布襦衣) 2,000벌과 세마포 33필을 원나라에서 요구하였고, 1232년(고종 19)에는 나·견·능·주·백저포·마포를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양을 보냈다. 그 밖에도 1253년(고종 40)에는 몽고의 황제와 관리들에게 많은 양의 금은포백을 선물로 주어 국가의 재물 창고가 고갈되었다.87)『고려사』 권23, 고종 18·19년; 권79, 지33, 고종 40년. 원종 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진한 자주색 나(眞紫羅), 견, 백저포를 원나라에 보냈으며,88)『고려사』 권25, 원종 3·4·5년. 충렬왕대에는 특히 원나라에서 자주색 나와 백저포를 수차례에 걸쳐 요구하였고, 백저포 중에서도 매미 날개와 같이 얇은 모시에 무늬를 넣은 문저포(紋紵布)는 그들이 매우 선호하는 특산품이었다.89)『고려사』 권31, 충렬왕 20·22년. 따라서 1283년(충렬왕 9)에 문저포를 처음으로 원나라에 보낸 이후 충숙왕 때에는 일곱 차례나 보냈으며, 공민왕 때에도 원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보냈다. 그 밖에도 포 5만 필, 백저포 4,300필, 흑마포 2만 4,100필, 백마포 2만 1,300필을 원나라에 공물로 보냈다고 하니90)『동국통감(東國通監)』 권52. 공무역이나 밀무역을 통하여 실제 원나라로 수출한 모시와 베의 수량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에는 막대한 양의 백저포가 수출되었으며 중국 사회에서 백저포는 고려의 발음대로 모시포(毛施布)라 부르며 널리 유행되었다. 원나라의 유명한 노래인 「어초기(漁樵記)」에서 불릴 만큼 고려의 모시포는 몽고인에게 선망의 직물이 되었다.91)민영규, 「장곡사 고려 철불 복장 유물」, 『인문 과학』, 연세대학교, 1966, 241쪽.
이와 같은 공무역 외에도 사무역에 의한 직물 교류도 여전히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예는 조선 세종 때 편찬한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老乞大)』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상인은 북경에 가서 고려의 세마포·모시포·말·인삼 등을 중국에 팔고, 각종 무늬의 단, 직금의 고급 견직물이나 견·능과 같은 옷감을 구입하였다.92)아세아 문화사 영인, 『박통사·노걸대』,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