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4. 점점 단순해지는 조선시대의 옷감
  • 옷감 생산의 발전과 퇴보
조효숙

우리나라가 고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옷감을 생산하고 사용하였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고려 후기 100여 년간 몽고의 침입으로 고급 옷감을 생산하는 기술이 퇴보하였으며 특히 견직물의 쇠퇴가 두드러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왕들은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옷감 생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적극적으로 잠업과 면업을 권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일정한 수준까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유교 사상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의복 사치를 금하였고, 옷감을 생산하는 장인을 천대하였다. 따라서 옷감 생산 기술의 향상은 불가능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정부의 경제력이 더욱 약화되어 관에서 주도하는 직물 생산조차 쇠퇴하였다. 정부는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으로부터 옷감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직물 산업 측면에서 볼 때 국가 경쟁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직물 산업의 발전 기회를 점차 잃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직물 산업의 발전과 퇴보 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태종대부터 연산군대까지로 견직물과 면직물이 모두 성장 발전하는 시기이다. 역대 왕들은 양잠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관청을 중심으로 사·나·능·단과 같은 고급 견직물 생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중앙 정부에 소속된 장인은 모두 597명이었는데, 그 중 직물 생산과 관련된 장인은 모두 264명으로95)『경국대전(經國大典)』 권6, 공전(工典) 공장(工匠). 다른 수공업에 비해 직물 분야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에 통직(通織)을 설치하고 옷감 생산에 실명제를 도입하여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장인의 기술 혁신을 위하여 견습 장인을 중국으로 연수를 보내는 등 견직물 생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96)『연산군일기』 권53, 연산군 10년 5월 을유. 그 결과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는 기술이 차츰 발달하였으며 저변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견직물뿐만 아니라 면직물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세종의 적극적인 면업 장려 정책에 힘입어 면화의 생산 지역은 날로 확장되었고 품질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제 면포는 상류층에서도 선호하는 옷감이 되었으며 1445년(세종 27)에는 여섯 명의 승지에게 면포를 하사하여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다.97)『세종실록』 권112, 세종 28년 5월 임진.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 사신과 수양 대군에게 면포로 만든 단령(團領)·답호(搭胡)·철릭(帖裏)을 하사하는98)『단종실록』 권1, 단종 즉위년 윤9월 병자 ; 10월 계사. 등 왕실에서 상류층 의복으로 면포를 사여한 사례가 여러 차례 보인다.

두 번째 단계는 중종대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로 옷감 생산이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에서 민간 수공업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정부에서는 『농상교서(農桑敎書)』를 반포하여 농민을 계몽하고 잠실(蠶室)을 복구하는 등 잠업 진흥 정책을 시행하였다.99)『중종실록』 권27, 중종 12년 2월 임신 ; 권32, 중종 13년 3월 병오. 이러한 영향으로 잠업을 부업으로 하는 것이 모든 농가로 확산되었고, 민간에 의한 양잠이 성행하였다. 또한, 연산군의 실정은 국가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수공업장에서 월급을 주지 못하자 장인들은 관청에서 나와 사사로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중종대에는 관장제 수공업장 내의 장인 제도가 차츰 무너졌으며, 실직한 직조 장인들이 사대부가에 개인적으로 고용되어 사·나·능·단과 같은 고급 옷감을 생산하였다.

1514년(중종 9)에는 “중국 능단의 품질이 좋지 않아 자가(自家)에서 사직(私織)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며…….”라고 하였고, 1516년(중종 11)에는 “중국의 백사를 수입하여 각색으로 물들여 능단을 짜는 자가 사대부가에도 있으니 이를 금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부녀자들이 향직필단(鄕織匹段)을 입느라 경가파산(傾家破散)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녀자들의 향직필단을 금하고 사직과 능라장(綾羅匠)의 사사로운 매매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대두되었다.100)『중종실록』 권20, 중종 9년 2월 임술 ; 권25, 중종 11년 5월 기유 ; 권26, 중종 11년 10월 무신·갑술.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16세기에는 왕실의 옷감 생산 능력이 약화되었지만 고급 옷감은 개인에게 고용된 장인이 계속 생산하였으며, 품질이 중국 옷감 못지않게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도 면포 생산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생산 지역이 확장됨에 따라 생산량도 증가하였다. 면직물은 여진, 명, 일본 등과의 대외 교역에서 말, 향료, 비단, 염료와 같은 수입품에 대한 지불 수단의 주종을 이루는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수요가 급증하였다.10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4, 283∼290쪽. 그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상류층이 면포로 만든 옷을 입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견사와 면사를 교직한 사면교직(絲棉交織) 옷감이 유행하였다.102)『명종실록』 권20, 명종 11년 6월 병오.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영조대까지로 직물 산업의 침체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역대 왕들은 고급 직물 생산을 장려할 여유가 없었다. 사치스러운 견직물보다는 생산이 쉬운 면포의 생산을 적극 권장하였다. 특히, 영조는 강력한 사치 금제 정책을 펼쳐 고급 견직물 생산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관청에서 소규모로 생산하던 무늬 있는 직물조차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전국에 있는 사직기를 즉시 철거하라.”는 강력한 금지령을 내림에 따라103)『추관지(秋官志)』(1746) 제4편 장금부(掌禁部) 신장(申章) 사치(奢侈). 무늬 있는 단의 생산 기술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18세기를 즈음하여 옷감의 유행에 변화가 찾아왔다. 『추관지(秋官志)』에 “1746년(영조 22) 문단(紋段)을 금지한 이후에 주우사, 항라, 개지주, 소릉(小綾)으로 사치한다.”고 기록하여104)『추관지』(1746) 제4편 장금부 신장 사치. 이전 시대에 비하여 무늬가 화려한 단직물 대신 무늬가 없는 옷감이나 눈에 띄지 않는 무늬의 옷감이 유행하여 옷감이 단조로워진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출토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연꽃과 모란무늬가 옷감 전체의 바탕을 이룬 화문단과 구름무늬와 보배무늬가 가득 차게 배열된 운문단이 대부분이었는데 17세기부터는 새로운 유형의 견직물이 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면주를 곱게 누벼 줄무늬 효과를 낸 옷감이 많았고, ‘항라’와 같이 깨끗하게 가로줄이 나타나는 옷감도 새롭게 등장하였으며, 흔히 ‘추사’라고 하는 지금의 지지미와 같은 질감의 평견직물도 많이 출토되었다. 무늬가 있는 경우에도 16세기의 전형적인 연화만초문단(蓮花蔓草紋緞)에서 벗어나 단순한 무늬를 드문드문 배열하여 은은하면서 여백이 강조된 화문주와 화문릉과 같은 옷감의 사용량이 증가하였다.

17세기 옷감 제직법이 단순하게 변화된 원인은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정부에서 화문단을 강력하게 금지하여 사대부들이 화문단 옷을 입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17세기 유교적 질서와 규율이 강조된 사회 분위기의 영향으로 사대부들은 화려한 문단보다는 절제되고 정갈한 느낌의 직물을 선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생산 기술면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관장제 수공업의 약화로 화문단을 제직할 기술이 전수되지 못하였고 민간의 장인들은 굳이 제직이 어려운 화문단을 연구해서 생산하기보다는 단순하고 빨리 짤 수 있는 옷감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반면, 조선 전기부터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의 중요한 옷감으로 자리 잡은 면포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더욱 확산되었다. 극심하게 피 폐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정부에서도 값싸고 실용적인 면포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중이나 직후에 사망한 사람의 분묘에서 출토된 옷감을 살펴보면, 견직물 사용이 줄어들고 견직물 중에서도 고가의 단 직물이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는 반면에 면포 사용은 증가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 후 10여 년 동안에는 면포로 만든 옷이 수자직으로 제직된 단보다 절대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정부의 징포 정책으로 인하여 면포 생산량은 증가하였으나 과중한 면포 납부에 시달리는 소규모 생산자들은 면포의 품질을 향상시키지 못하여 품질이 점차 나빠지는 추포화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제 면포는 상류층이 아닌 서민들만의 옷감으로 전락하여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는 무명옷을 즐겨 입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무렵 발굴된 상류층의 출토 복식 중 견직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서도 잘 나타난다.

네 번째 단계는 정조대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로 제직법이 단순한 명주나 무명, 베, 모시와 같은 옷감만이 지방의 특산품으로 정착되는 시기이다. 관장제 수공업에 의한 직물 생산은 사라지고 민간 수공업 분야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장시(場市)의 발달은 지방 유통 경제의 변화를 가져 왔다. 특히, 직물류는 장시의 중요한 유통 품목이었으므로, 직물을 생산하는 일은 단순히 중앙 정부에 세금으로 직물을 납부하는 목적을 떠나 농가에 이익을 주는 부업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초 전국 장시에서 거래된 물품의 종류를 살펴보면, 쌀을 거래하던 군현의 수는 253곳임에 비해 면포가 거래되던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고, 명주와 저포·마포를 거래하던 곳은 각각 73곳, 175곳으로 면포의 거래에 훨씬 못 미치고 있어 당시 면포의 상품성을 말해 주고 있다.105)권태억, 『한국 근대 면업사 연구』, 일조각, 1992, 35쪽.

이처럼 직물은 전업적(專業的) 상품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으며, 직물을 생산하는 농촌의 가내 수공업 지역이 새롭게 나타나고 직물 생산을 좀 더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운동도 전개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19세기에 직물 명산지가 형성되었는데 세면포의 산지는 경기도 고양, 충청도 논산·강경, 모시의 산지는 한산·서천·비인·남포·청양, 베의 산지는 함경도 회령·경원·온성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함경도 6진 지방에서 생산되는 베는 ‘동포’, ‘육진세포’, ‘바리내포’라 하여 바리에 들어갈 만큼 작은 실꾸리로 베 한 필을 짠 가늘고 섬세한 포를 의미하였다. 견직물도 종류별로 명산지가 있는데 평안도 영변은 합사주, 성천은 분주, 안주·개천·덕천은 항라, 전라도 강진은 영초가 유명하였다.106)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동국문화사 영인, 1959.

이처럼 지방의 전업적 상품으로 살아남은 옷감은 대부분 제직법이 단순한 명주 및 면포와 마포 정도였으며 조선 전기에 생산하였던 수자직의 화문단이나 중조직의 금선단, 익조직의 화문라, 화문사와 같은 고급 견직물의 명산지는 한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1829년(순조 29) 한양의 시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입전(立廛)이 공장(工匠)과 작당하고 상사(常絲)를 매점하여 중국의 옷감을 모방하여 직조·판매하고 있어 고발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고급 견직물을 전혀 생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이를 특수 견직물의 전업적 생산으로 볼 수는 없다. 이로써 200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생산하였던 다양한 종류의 옷감은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지 못하였고, 명주·무명·베·모시와 같은 단순한 옷감만 조선의 전통 직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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