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4. 점점 단순해지는 조선시대의 옷감
  • 옷감의 종류와 명칭
  • 면직물
조효숙

면직물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대부분 목면(木棉), 목(木), 혹은 면포(綿布), 무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1567∼1577년까지 11년간에 걸쳐 쓴 『미암일기』에는 품질이 좋은 것은 선상목(選上木), 세목(細木)이라고 하였고, 생산 시기에 따라 춘등선상(春等選上), 추등선상(秋等選上)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실의 치밀한 정도에 따라 4승목, 5승목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인 옷감으로 8승목, 9승목이 쓰였고 가장 고운 것은 34승 목면이라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면포는 일반적으로 너비가 30∼33㎝ 정도이며 40자를 한 필(匹), 50필을 한 동(同)이라고 한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기계직에 의한 60㎝ 너비와 90㎝ 너비의 서양포 수입이 급증하여 새로운 변혁기를 맞이하였다. 개항 초기에는 광택이 있는 영국산 생금건(生金巾)이 내구력은 약하지만 사치품의 성격이 강하여 상류층에서 선호하였다. 그 후 정련하지 않고 두터운 광목과 정련 표백한 옥양목, 여름용으로 얇게 짠 한냉사, 아사 등 다양한 종류가 생산되었다.

면포는 세종대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에 수출하는 중요 품목이었으며 1470년(성종 1)에 5,000필을 보내는 것을 비롯하여 20여 차례에 걸쳐 수만 필의 면포를 수출하였다.119)『성종실록』 권120, 성종 11년 8월 기사. 중종대에는 감당하기 어려워 대일 무역 통제를 여러 차례 단행하였으나 일본은 유황, 소목, 금은 등을 바치고 끊임없이 면포를 요구하였다.120)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4, 1994, 288∼290쪽.

조선시대 출토 복식을 보면 임진왜란 중이나 직후에 사망한 사람의 옷에서 면포가 많이 나타난다. 이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실용적인 면포로 만든 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는 다시 면포의 사용이 감소하면서 견직물이 증가하였다. 특히, 착용자의 신분에 따라 옷감 사용에 차이가 있는데 당상관의 복식에는 견직물이 압도적으로 많으나 당하관의 복식에는 면포의 사용 비율이 증가하고 관직이 없는 자들의 복식에는 주로 면포나 베를 사용하였다.

대부분 겉옷보다는 속옷에, 겹옷인 경우에는 안감에 면포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말기에는 두루마기 겉감에 고운 면포를 쓰고 안감에 다듬은 명주를 넣어 멋을 부린 것도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9세기에 고운 무명의 특산지로는 경기도 고양과 충청도 논산, 강경이 유명하였다. 지금은 경상도에서 중요 무형 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조옥이와 전수자 백문기가 전통 베틀로 9∼10승의 무명을 짜고 있으나 섬세함에 있어 조선 전기의 34승 면포와는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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