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4. 점점 단순해지는 조선시대의 옷감
  • 옷감의 종류와 명칭
  • 모직물과 모피
조효숙

우리나라에서 모직물과 모피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일찍이 부족 국가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에서도 모전(毛典)을 두어 계, 구유, 탑등, 전 등 다양한 종류의 옷감을 생산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고려시대에도 중앙 관청에 계를 짜는 장인을 두어 계와 계금을 생산 하였고, 이는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중요한 특산품이었다.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의종대에는 금나라로부터 양 2,000마리를 들여왔으며, 1185년(명종 15)에는 왕의 지시로 단사(丹絲)를 수입하였는데123)『고려사』 권19, 명종 15년. 이는 고려의 수출품이었던 계금을 짜기 위한 모사(毛絲)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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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자 안쪽 펠트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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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자 안쪽 펠트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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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모직과 모피의 사용은 여전하였다. 상의원에 소속된 장인 중에 모의장(毛衣匠), 모관장(毛冠匠), 전장(氈匠)이 있음으로 미루어124)『경국대전』 공전(工典),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 모피물을 의복이나 관모에 즐겨 사용하였으며 모섬유를 축융시킨 전의 생산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의장은 구의·갓저고리·털배자와 같은 모피옷을, 모관장은 이엄이나 풍차와 같은 방한모를, 전장은 펠트 모직물인 전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 상의원에 소속된 장인 중에는 모직물을 생산하는 계장(罽匠)이 없어졌다. 그래도 선공감(繕工監)과 영조시(營造寺)에서 전과 계를 계속 공급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 당하관 이하의 혼인에 계와 담의 사용을 허용한 것을 보면 계와 담 종류도 여전히 생산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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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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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궁중에서 소용되는 물건을 기록한 『상방정례(尙方定例)』와 『만기요람』에도 홍색, 남색, 백색, 흑색의 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은 장수의 갑옷이나 투구에 중요하게 사용되었고 일반인의 구의, 모자, 신발에도 사용되었다. 실제로 15세기 출토 유물 중에는 양모 섬유의 전으로 만든 소모자, 양모 섬유와 면섬유가 혼합된 전으로 만든 소모자 등 다양한 종류의 전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홍색이나 청색 전으로 만든 갑옷이나 투구, 목화와 같은 유물도 남아 있다. 조선 말기 활옷 중에도 홍색 전에 십장생 수를 화려하게 놓은 것도 있으며 댕기 등의 장신구에도 전이 사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志勝覽)』에 의하면 청포전(靑布廛)에서는 3승포와 전으로 만든 모자를 팔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갖옷이나 털로 만든 방한구를 팔던 모의전(毛衣纏)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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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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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에도 담, 전, 그리고 모피류로 만든 방한용 옷이 자주 등장한다. 흑담(黑毯)으로 만든 단령을 입었고, 서피나 초피(貂皮)를 넣어 만든 사모이엄(紗帽耳掩)을 썼으며 사슴가죽, 물고기가죽, 노루가죽 등도 복식용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방한 목적 외에도 초피 갖저고리는 사치의 상징이었다. 중종대에는 “근래에 지나친 사치가 풍습이 되어 의구(衣裘)와 금석(衾席) 따위도 다 수달피 털(초피)로 만들며 향려(鄕閭)의 작은 모임에도 수달피 옷이 없는 부녀는 부끄러워 참석하지 않는데…….”125)『중종실록』 권29, 중종 12년 9월 을미.라고 하여 모피류가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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