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2장 옷감과 바느질
  • 5. 바느질 풍속과 도구
  • 바느질법과 옷 손질하기
조효숙

조선 순조(재위 1800∼1834) 때에 쓰여진 『조침문』에는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봉미를 두르는 땀땀이 떠 갈 적에 수미가 상응하고 솔솔이 붙여 내매 조화가 무궁하다.”라고 하여 침선의 여러 가지 기법을 기록하고 있다.

1925년에 김숙당(金淑堂)이 지은 『조선 재봉 전서(朝鮮裁縫全書)』에도 성인 남녀와 어린아이의 옷 만드는 방법과 홈질, 박음질, 시침질, 감침질, 공그르기 등의 여러 가지 침선 기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132)김숙당, 『조선 재봉 전서』, 민속원, 1925, 201∼202쪽.

•홈질은 바느질 두 겹을 왼손으로 꼭 잡고 바른손 둘째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바늘을 잡고 가운뎃손가락은 호는 감 뒤로 내밀어서 바늘허리를 받쳐 가지고 골무 낀 손으로 내밀어 가면서 세 땀을 떠서 혼 것은 뒤로 밀면서 바늘을 앞으로 밀어 다시 세 땀을 뜨니 이와 같이 계속하면 올이 바르게 호아진다.

•박음질에는 온땀침과 반땀침 두 법이 있는데 온땀침은 뒤 땀을 뜨되 바늘 맨 밑을 또 뜨는 것인데 겉자락이 졸아들지 않도록 안팎 두 겹을 꼭 쥐고 바늘을 충분히 내밀어 올바르게 박는다. 반땀침이라는 것은 땀을 반씩 떠서 박는 것이니 모시, 삼베, 무명 등으로 옷을 지을 때 이 방법을 쓴다.

•시침은 옷을 지은 후에 안이 나오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또한 장식 효과도 있으므로 깊이와 땀이 곱고 고르게 한다. 시침은 대개 바늘 길이만큼씩 뜨면 알맞다.

•감침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꺾은 두 솔을 똑같이 잡고 두 올을 건너 한 올씩 떠서 바늘을 반듯이 꿰어 잡아당기는 법인데 실이 너무 바르도록 잡아당기지 말 것이오. 둘째는 적삼 단 같은 데 하는 것인데 손 앞은 높게 하고 뒤쪽은 얕게 하여 뒤는 한 올씩 뜨고 앞은 깊이 뜨는 법인데 자주 뜰수록 곱다.

•공그르는 것은 두 번 꺾어서 접어 가지고 감치는 것과 반대로 접은 안은 뒤로 두고 한 올씩 떠서 하는 것이니라.

•상침은 세 땀을 곱게 박고 세 땀 박은 사이만큼 건너서 또 세 번씩 박 는 것인데 세 땀을 박지 않고 두 번씩만 박는 법도 있으니 이것은 두 땀 상침이라 하니라.

•사뜨는 법은 바늘을 뒤로 꽂아 안으로 빼고 또 뒤로 서너 푼 띄어 앞으로 빼서 뒤로 그 실 다음을 뜨고 또 아래 실의 다음으로 뜨면 용마름이지면서 곱게 떠진다. 골무, 귀불, 오목다리 같은 데 장식 효과를 내면서 양면을 합칠 때도 쓴다.

•솔기를 꺾어 하는 것은 꺾은 금을 호지 말고 금에서 한 올만 밖으로 호아서 풀을 조금 칠하여 먼저 꺾은 금대로 꺾어서 인두를 치면 솔기가 곱게 된다.

•곱솔은 한 번 꺾어서 호고 그 뒤를 베 버리고 또 접어서 하는 것을 곱솔이라 하나니라.

•쌈솔하는 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두 겹으로 호아 가지고 또 꺾어서 한 번 호아서 얕게 베고 꺾어 박는 것. 둘째는 한편을 거죽으로 꺾고 한편을 안으로 꺾어 가지고 거죽으로 꺾은 데에 안으로 꺾은 것을 대고 얕게 호되 거죽으로 꺾은 것이 뒤로 가고 홀 때는 뒤쪽이 두 올을 내밀어서 혼 뒤에 인두를 치고 그 후에 거죽도 베어 버리고 안으로 꺾은 것도 베어 버리고 안쪽으로 접어서 박되 손으로 바깥으로 밀어 가면서 가늘게 박는다.

앞의 바느질법 외에도 겉감과 안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줄이 홈질하는 누비가 있다. 누비는 보통 바느질보다는 어렵지만 자수보다는 쉬워 학습 단계상 바느질과 자수의 중간으로 보인다. 누비는 피륙을 보강하거나 보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 외에 장식을 하기 위한 기법으로 사용하는데, 대부분 솜을 두고 누비지만 솜을 두지 않고 안팎만 누비기도 한다. 오목누비, 잔누비, 납작누비, 중(中)누비, 세(細)누비 등이 있다.

누비 바느질이 숙련되었으면 색실을 이용한 색채 누비 과정을 거쳐 색과 문양을 조화시켜 제작하는 자수를 배우게 된다. 바탕천에 수를 놓아 문 양을 꾸밀 때, 뒤에서 바늘을 꽂아 올려야 하는데, 이것이 익숙하지 않으면 원하는 위치로 올라오지 않아 바느질이 고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자수를 배우는 초보자는 누비 바느질을 통해 일직선으로 땀새가 고르도록 먼저 연습을 한다.

옷 손질 방법에는 빨래하는 것 외에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다듬이질하는 법은 도침법(搗砧法)이라고도 한다. 풀 먹이고 다듬이질하는 것은 예로부터 해왔던 옷감 다루는 방법 중의 하나로 옷감의 종류와 색상에 따라 달리하였다.

『규합총서』에는 옷감의 색상에 따라 손질법을 구분하였는데, “진홍은 백급에 아교풀을 섞어 먹이고 밟아 다듬을 것이며 방망이로 두드리면 빛이 상하니 밟아서 여러 번 다듬어 거의 마른 후 홍두깨로 다듬는다. 무명과 모시는 잇꽃 담갔던 진한 누런 물을 풀에 조금 섞어 개어 먹여야 푸른빛이 없고 당물(唐物)과 같다. 자주는 풀을 뜨물만치 개어 체에 받아 고루고루 쳐 짜내어 물기가 꾸덕꾸덕하거든 개켜 보에 싸 놓고 목화(木靴)나 신을 신고 많이 굴러 밟아서 자주 펴 가며 고쳐 개켜 밟아서 마르거든 홍두깨에 감아 밀어 가며 밟아 다듬으면 살이 올라 반반하고 곱다. 옥색은 백급으로 다듬되 풀을 먹이지 말고 이슬이나 서리를 흡족하게 받게 하여 젖은 김에 다듬으면 수결지고 고우니 다듬이질이 거의 되어 갈 때 서리나 이슬을 받아 다시 다듬으면 좋다. 보라는 생토란을 갈아 그 즙을 먹여 다듬으면 곱다. 야청은 아교풀을 먹여 다듬으면 좋다.”고 하였다.133)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156∼158쪽.

풀 먹이는 방법은 옷감에 따라 구분하였는데, “비단은 백급풀을 먹여 다듬어야 곱다. 흰 명주는 계란 흰자위를 수비한 무리에 섞어 먹이면 곱기가 달걀 껍질 같아진다. 모시를 뜯어서 다시 만드는 것은 활석이나 녹말을 먹여 다듬으면 윤이 나고 풀이 선다. 무명은 풀 먹일 때 메밀가루를 쑤어 섞어서 먹이면 풀이 세면서도 보드랍고 윤이 난다.”고 하였다.134)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156∼158쪽.

빨래하는 법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빨래는 빗물과 정한 풀 위가 아니면 깨끗하지 못한 고로 옛말에 이르기를 양자강 한수에 빨고 가을볕 바를 때 뉜다 하였다. 다홍은 신(酸) 국을 쳐 빨아야 곱고, 자주는 오줌에 빨면 상하지 않고, 쪽은 녹두물과 두부순물에 빨면 새롭다. …… 고약 묻은 데는 생무를 문질러 빨면 진다. 먹 묻은 것은 우슬(牛膝) 가루를 물에 개어 발라 마르거든 떨면 먹과 함께 떨어지고…… 피 묻은 것은 죽을 쑤어 더운 김을 쏘여 쇠뼈 탄 재를 놓아 빨면 진다. …… 여름옷에 곰팡 슨 것은 은행즙과 마늘즙에 지고 동과즙(冬瓜汁)에 빨면 없어진다. 옷의 때 안 지는 것은 토란 삶은 즙에 빨면 희어지고 정하기 옥 같아 진다.”135)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158∼159쪽.

또한, 『조선 재봉 전서』에서는 얼룩 제거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름때 빼는 법은 휘발유를 솜이나 붓에 칠하여 싹싹 문지른 뒤에 백지를 깔고 인두질을 해서 햇볕에 쬐면 좋으니라. 피 빼는 법은 피가 묻거든 속히 냉수로 빨아도 안 지면 한 번 입에 물었든 물로 빨고, 그래도 안 지거든 무를 갈아 즙을 내어 비벼 빨거나 생강즙을 발라 두었다가 빨면 다 진다. 젖 묻은 것 빼는 법은 엷은 암모니아 물이나 붕산 물을 솜에 칠하여 젖 묻은 데를 비벼 빨고 마른 뒤에 솔로 문대면 좋다.”136)김숙당, 앞의 책, 201∼202쪽.

『규합총서』에는 모피류 관리 방법도 기록되어 당시에 털옷도 중요한 옷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죽붙이(皮物)와 털옷(毛物)은 한식 전에 두면 좀이 안 나고 칠석날 볕에 쏘이면 좀이 없고 옷 갈피에 쑥이나 조피나무를 넣어도 벌레가 안 난다.” “담비털(貂皮)과 쥐털(鼠皮) 종류는 가는 대나무나 막대로 살살 두드려 자주 볕에 보여야 털이 빠지는 일이 없고 비록 자주 햇볕에 쏘이더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털이 빠진다.”137)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156∼158쪽.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요즈음 양피는 귀한 벼슬아치들이 입지 않고 가난한 선비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데 때가 탔을 때에는 돼지 발굽을 삶은 뜨거운 물로 씻으면 때가 말끔히 지워지고 붕사(硼砂) 달인 물로 씻으면 영원히 좀이 일지 않고 좋은 소주를 양털 위에다 뿜어 멥쌀가루로 닦아 내면 털빛이 새것처럼 하얗게 된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38)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수피수모변증설, 동국문화사 영인, 1959.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다른 어떤 문화 국가보다도 옷감을 일찍이 생산하였고, 옷감은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적 차원의 교역품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의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물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옷감을 생산하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행의 산물인 옷감은 중국과 같은 주변 국가와도 밀접한 교류가 있었으며 아시아권의 전반적인 유행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당시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유교의 영향으로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옷차림을 추구하게 되면서 고대부터 생산해 오던 다양하고 화려한 직물의 종류는 점차 사라졌다. 결국 생산할 수 있는 옷감은 명주와 모시와 같이 종류가 단순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강력한 사치 금지 속에서도 개인이 사사로이 아름다운 화문단을 짜서 판매하기도 하고, 중국산 비단을 수입하여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산을 수입한다 하더라도 주로 우리 민족이 선호하였던 종류의 옷감이 유통되었으므로 청나라의 옷감과는 차이를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비록 복식의 사치는 금지하였지만 단정하고 품격 있는 의생활을 위하여 옷감을 손질하고 가족의 옷을 만드는 일은 여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임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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