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
  • 2. 왕실 혼례의 옷차림
  • 왕비의 혼례복
임재영

왕비의 혼례복인 적의는 왕비의 최고 예복이자 법복(法服)이며, 왕이 면복을 입을 때 왕비가 입는 면복과 격이 같은 의복이다. 적의도 면복과 같이 중국 제도를 수용한 것이며,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 고황제가 왕의 면복과 원유관을 하사하였고, 효자왕후가 왕비에게 관복을 사여한 데에서 비롯된다.157)『고려사』 권42, 공민왕5.

조선시대에 이르러 적의는 1394년(태조 3) 왕의 면복과 함께 중국으로부터 사여되었으며 이후 왕이 새로 즉위할 때 왕의 면복과 함께 왕비 관복도 사여되었다. 적의 제도는 관(冠)·적의·중단·폐슬·상(裳)·대대·패옥·수(綬)·청석(靑舃)·청말(靑襪)로 구성되어 있다. 관은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이며, 적의는 푸른 바탕에 꿩무늬를 9등으로 수놓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 명나라에서 사여한 왕비 대례복은 명나라의 황후 대례복인 적의가 아닌 상복인 대삼(大衫)이었다. 이는 명나라보다 등급이 낮은 품목을 사여하는 일반적인 복식 제도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대삼 제도는 칠적관(七翟冠)을 쓰고 하피(霞帔)와 배자(背子)가 있는 대삼을 입었다. 대삼은 대홍색으로 그 위에 적계문(翟鷄紋)을 수놓은 배자를 입었고 짙은 청색의 하피를 둘렀다. 뒤에는 수를 늘이고 옥패를 양옆에 차고 옥규를 들었는데, 이러한 대삼 제도는 인조대까지 시행되었다.158)유희경·김문자, 앞의 책, 267∼268쪽.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제도에 관한 기록과 실물이 소실되었고 이후 새로이 제도를 정비하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기에 조선 초기와 후기의 제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양대 전란 이후 명나라 복식의 영향에서 벗어나면서 자체 제작한 조선 후기의 적의 제도는 초기의 대삼과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의거하면서도 우리 의복의 독자성을 가미하였는데, 색은 대삼과 같고 꿩무늬도 장문에 맞도록 하였으며 하피는 긴 한 폭으로 늘리고 목 부분에 단추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적의를 입을 때 쓰는 적관(翟冠)은 실물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록만을 참고하여 복원할 수 없었으므로 나름대로의 제도를 만들어 창작한 대수(大首)로 하였다.

확대보기
영왕비의 적의
영왕비의 적의
팝업창 닫기

이와 같은 적의 제도는 영조대에 와서 『국혼정례(國婚定例)』로 제도화되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를 치적의(雉翟衣) 제도라 하는데 왕비의 치적의는 원형상의 꿩무늬 원적문(圓翟紋)을 51개 배치하였으며 하피를 두르고 보(補)를 달고 대수를 썼다. 꿩무늬 51개는 이전의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에 제시된 36개의 무늬보다 많은 수이다.

적의는 왕의 면복 제도와 마찬가지로 부속품과 일습을 이루는데 겉옷인 적의 외에 중단·폐슬·규·혁대·대대·수·옥패·하피·보·말·석과 병용한다.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명나라 황후의 적의 제도를 따랐는데 12등의 꿩무늬 사이에 조선 왕실의 상징인 이화(梨花)를 배치하였고 색상도 본디 적의의 색인 심청색이다.

현재까지 실물로 전하는 것은 세종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순종황제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입었던 적의와 국립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왕비(英王妃)의 적의가 있다. 적의 착용 모습에서 보이는 머리 양식은 적의를 입을 때의 머리 양식인 대수인데, 이는 원래 적관이었으나 양대 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된 관을 복원하지 못해 대신한 머리 양식이 다. 대수를 만드는 데에는 머리카락이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이를 고정하기 위한 비녀도 적게는 27개에서 많게는 47개까지 필요로 하는 매우 규모가 큰 머리 양식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