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
  • 2. 왕실 혼례의 옷차림
  • 축하객의 예복
  • 내명부와 외명부의 예복
임재영

가례에 참석하는 비빈 및 의식의 진행을 돕는 상궁을 비롯한 내명부와 하객으로 참석하는 외명부는 예복으로 원삼을 입는다. 원삼은 삼국시대 중국의 소매 넓은 포가 전래된 이래로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예복이다. 『주례(周禮)』에 나오는 왕후의 육복(六服) 중 하나로 신분에 따라 색과 무늬를 달리한다. 소매는 넓고 길며 몸 판 길은 좁고 앞이 겹쳐 여며지지 않고 좌우 몸 판의 길이 앞 중심에서 마주 닿게 여며지며 양옆이 트인 직사각형으로 무릎 정도의 길이다. 뒤는 앞보다 30㎝ 정도 길고 소매에는 두 가지 색의 색동과 흰색의 한삼이 달린다.

황후는 옷감을 짤 때 직접 금사를 넣어 짠 직금(織金) 또는 금박을 하는 부금(付金)으로 용무늬를 넣은 황색의 원삼을 입었으며, 왕비는 다홍색 바탕에 봉황문을 금박한 홍원삼을 입었다. 빈궁은 자적 바탕에 봉황문을 금박한 자적원삼을 입었으며, 공주나 옹주는 녹색 바탕에 꽃무늬를 금박한 녹원삼을 입었다. 내·외명부 및 일반 부녀자들의 상복(上服)도 녹원삼이었는데 녹원삼은 일반인의 혼례복으로 허용되었다. 또 적의와 대례복으로 착용한 원삼, 당의의 가슴·등·양어깨에 용보를 달았는데 왕비와 왕세자빈의 용보 크기는 왕의 용보보다 작았다. 황후와 왕비는 오조원룡보, 황태자비는 사조원룡보를 달았다.

확대보기
영왕비의 홍원삼
영왕비의 홍원삼
팝업창 닫기

노의(露衣)는 중국 계통의 포제로 왕비의 상복이다. 금원문(金圓紋)의 흉배가 있고, 4품 이상인 사람의 정처(正妻)가 예복으로도 입었다.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원삼과 비슷하나 깃이 곧고 대홍색 화문(花紋)의 비단을 사용하여 앞은 다소 짧고 뒤는 길게 하였다. 또한, 수구(袖口, 소맷부리)에는 남색의 태수를 달고 전면에 부금을 하였다. 장삼(長衫)은 5품 이하인 사람의 정처가 예복으로 삼았는데 비빈을 위시하여 상궁, 나인까지 입었던 것으로 소매가 넓은 대수(大袖)로 되어 있는 긴 옷이다. 대홍색이고 겹으로 지었으며 흉배를 달고 수구에는 한삼이 있으며 대홍색의 대를 매었다. 활옷도 공주나 옹주의 예복이었으나 일반인의 혼례에 허용되었다. 형태는 원삼과 유사한데 대홍색에 장수와 길복을 의미하는 물결·바위·연꽃·모란꽃 등의 길상문(吉祥紋)을 옷 전체에 화려하게 수놓았다.

확대보기
녹원삼
녹원삼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큰머리
큰머리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어여머리
어여머리
팝업창 닫기

조선시대 궁중의 비빈이나 반가(班家)의 명부들이 예장할 때는 머리도 격식에 맞게 큰머리(巨頭味, 떠구지머리)와 어여머리(於由味·於汝美, 또야머리)를 하며, 장신구도 예장용으로 노리개 세 개를 모아 차는 삼작노리개를 하였다. 어여머리는 머리를 크게 부풀리기 위해 머리 앞부분에 밑받침의 어염족두리를 얹고 그 위로 머리를 크게 땋아 얹는 모양이다. 어염족두리는 여러 장의 검정색 공단 속에 목화솜을 넣어 중간 부분에 잔주름을 잡아 가운데를 잘록하게 실끈으로 묶어 양쪽을 둥글게 한 것이다. 중앙 부분에 자색 견사로 된 붉은 끈이 달려 있어 예장할 때 머리 앞부분에 얹고 잘록한 부분 위에 가체(加髢)를 얹었다. 큰머리는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를 올리는 머리로, 원래 떠구지는 가체였으나 정조대에 가체 얹는 것을 금하면서 나무로 대체되었다.

확대보기
족두리를 쓴 상궁의 예장
족두리를 쓴 상궁의 예장
팝업창 닫기

사치로 인한 폐단으로 금령이 내려지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왔던 얹은머리가 19세기 중엽부터 쪽진머리로 대체되면서, 예복을 입을 때의 머리 양식도 가체 대신 족두리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19세기 이후에는 궁중 행사도에 예장한 상궁 모습에도 족두리를 얹은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예복들은 조선 전기에는 중요한 의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원삼과 당의로 집약되면서 사라졌다. 원삼을 대례가 아닌 왕실의 경사에 소례복으로 착용하기도 하였다. 원삼을 대례복으로 사용할 때는 용무늬를 가슴·등·양어깨에 넣은 것과 달리 왕비·왕세자빈·공주·옹주가 소례복으로 원삼을 착용할 경우에는 봉황 흉배를 가슴과 등에만 새겼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