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3장 궁궐 안 특별한 사람들의 옷차림
  • 3. 궁궐 안의 특별한 옷차림
  • 활쏘기 행사, 대사례
임재영

조선시대에는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또 심신 수련의 상징적 의미로 왕과 신하들이 활쏘기를 행하는 의식인 대사례(大射禮)를 가졌다. 대사례는 단순히 선비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의 하나인 활쏘기 기량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활쏘는 사람의 덕을 엿보는 데 의미를 두었다. 또한, 국가의 태평함과 풍년을 드러내는 의식이기도 하였기에 비록 왕의 재위 때 매번 거행되지는 못하였지만 국가적인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대사례는 먼저 석전례(釋奠禮)를 행한 뒤 거행하는데, 국가의 경사스러운 행사인 만큼 주로 과거를 치른 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례에서 활쏘는 장소인 사단(射壇)이 차려지는 장소도 석전례와 과거가 행해지는 성균관이었다.

조선시대에 대사례는 여섯 차례 거행되었는데 1743년(영조 19)의 『대사례도권(大射禮圖卷)』이 유일한 시각 자료로 남아 있다. 먼저 영조가 새벽에 태학에 나아가 작헌례를 거행하고 이어 명륜당에 거둥하여 ‘희우관덕(喜雨觀德)’으로 글제를 내어 시사(試士)하라고 명한 후 하련대(下輦臺)에서 대사례를 거행하였다. 이때 왕은 네 발의 활(乘矢)을 쏘아 세 발을 맞혔다. 또 의식이 끝난 후 예문 제학(藝文提學) 원경하(元景夏)에게 그 사실을 기문(記文)으로 짓게 하여 명륜당에 걸고 사단도 헐지 말고 후세에 보여 주도록 명하였다. 또한, 육일각(六一閣)을 세워 대사례에 사용된 활과 화살을 비롯한 제구(諸具)를 간직하게 하였다.163)『영조실록』 권57, 영조 19년 윤4월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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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 중 시사도
대사례도 중 시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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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에는 대사례를 집행하는 집사자와 참가자인 신하, 악공, 의장대가 각자의 역할에 따른 위치에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궁중 행사도에서와 같이 왕은 자리로써 상징적으로 표현만 할 뿐 실제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 대사례는 크게 석전례와 활쏘기 대회인 사례(射禮), 사례 후 점수에 따라 시상하는 시상례(施賞禮)로 구성된다. 석전례를 행할 때 왕은 면복을 착용하며 제관도 제복을 입는다. 사례 때에는 왕과 신하, 집사자 모두 궁궐 내의 평상시 차림인 상복을 입는다. 다만, 석전례 후에 왕은 막차(幕次, 거둥 때 임금이 장막을 치고 임시로 머물던 곳)에서 익선관·곤룡포로 갈아입고 사단에 나가는데, 활쏘기를 위해 옷소매를 간편하게 하는 팔찌와 깍지를 낀다. 사례 후 시상례에도 모두 상복을 착용한다.

행사에 동원된 많은 사람들 중 눈에 띄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의장대이다. 대사례는 궁궐을 떠나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행하는 의식이기에 이에 따른 왕의 의장대가 따라서 거동한다. 왕의 의장대는 기본적으로 왕의 인(印)을 실은 말을 끄는 견마대(牽馬隊)와 궁궐 내에서 사용하는 가마인 여(轝)와 궐밖용 가마인 연(輦)을 드는 가마꾼이 있고 행사의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규모가 조절되는 의물을 드는 의장대원들이 있다. 여와 연을 든 의장대는 토황색으로 보이는 포와 동색 계열의 건을 쓴 모습으로 포의 형태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직령으로 생각된다.

대사례의 의장은 비교적 규모가 크며 의장대는 그림 양쪽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행사 전 장면에 변함없는 모습과 규모로 배열되어 있다. 우선 여와 연을 든 인물들이 왼쪽 상단에 배치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둑(纛, 대가(大駕) 앞에 세우는 깃발)과 기(旗)를 든 인물이 있으며, 월도(月刀) 두 명이 각각 양쪽 앞에 서 있다. 인마(人馬)를 끄는 견마대 두 명 역시 양쪽에 각각 있다. 그 뒤로 기와 의물을 든 의장대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인마를 끄는 네 명은 황초립을 쓰고 황직령을 입었으며, 의물을 든 의장대는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은 모습과 적갈색를 쓰고 토황의를 입은 모습이다. 양쪽 바깥쪽에 길게 늘어선 의장대는 적갈색모에 토황의 차림이고, 산(傘)을 드는 경우와 같이 왕의 측근에서 의물을 드는 의장대나 월도·둑을 들고 있는 경우에는 단령 차림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적갈색모의 형태는 모정이 둥글고 낮으며 모첨이 작은 벙거지 형태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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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의 의장대 모습
대사례도의 의장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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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에서 다음으로 눈에 띄는 인물은 악사(樂師)와 악공(樂工)으로, 동일한 색상의 옷을 입고 그림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왕조의 이상적인 정치는 ‘예(禮)로 민심을 절도 있게 하고, 악(樂)으로 민심을 화하게 하며, 정(政)으로 예악(禮樂)의 도를 행하게 하고, 형(刑)으로 예악의 도가 감히 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예기(禮記)』를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이는 예와 악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한 것이다. 성종 때에는 『국조오례의』와 『악학궤범(樂學軌範)』이 간행되어 예악 제도의 틀을 마련하였고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의례에 근거한 악이 연주되었다.164)이재숙, 『조선조 궁중 의례와 음악』,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1쪽.

『악학궤범』의 기록에 의하면 “대사례 악사 3인 중 전체 진행을 인도하는 협률랑(協律郞)165)나라의 제향 때 또는 진현 때에 풍악을 담당하는 임시 벼슬이다. 장악원 관원을 임명하였다.은 사모·각대·흑단령, 집박(執拍) 2인(헌가와 장전 뒤)은 공복을 입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 79인(이 중 18인은 장전 뒤의 고취차비)은 공복을 입는다.”라고 되어 있다.166)『국역 악학궤범』 제2권, 111∼112쪽. 그림에서는 편종과 편경 등의 악기 배열 뒤에 홍단령에 복두를 쓰고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악공 여러 명의 뒷모습이 보이며, 그 앞으로는 녹단령에 복두를 쓰고 손에는 박을 든 헌가(軒架, 궁중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의 집박 한 명이 보인다. 집박은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음악 진행을 맡는 지휘자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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