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1.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기원하는 돌빔
  • 남자아이의 돌빔
이은주

돌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잔칫상의 ‘떡’이다. 오래전부터 무병장수하라고 돌상에는 수수경단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점쳐 보기 위한 ‘돌잡이’ 행사였다. 활을 집으면 장군감이요, 책을 집으면 선비로, 아니면 과거 급제하여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재미 삼아,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미래를 예측하였다.

돌쟁이가 입는 돌빔도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기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축복받은 주인공답게 잘 차려입었는데, 이를 ‘돌빔’, ‘돌치레’라고 하였다. ‘빔’은 ‘비음’이라고도 하는데 ‘비음’은 꾸민다는 뜻의 ‘비오다’라는 옛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명절이나 잔치 때 새 옷으로 치장하는 일을 말한다. ‘돌빔’은 첫돌을 맞아 좋은 옷으로 꾸며 아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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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상 받은 남자아이
돌상 받은 남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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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빔에 대한 기록은 사대부가의 경우에도 흔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다른 의례에 비해 비중이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돌빔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 자료는 대부분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의 것이다. 그 밖에는 19세기에 세간에서 유행했던 평생도병과 같은 회화 자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평생도병에 등장하는 주인공 돌쟁이는 바지와 색동저고리에 배자를 입었다. 그리고 염낭을 매단 돌띠를 배자 위에 두르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사한 굴레를 쓰고 있다. 돌빔으로 특별한 종류의 옷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고운 색의 좋은 옷감으로 정성스럽게 새로 지은 옷을 입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혀서 아기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고 지켜주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옅은 색 풍차바지에 옥색이나 분홍색 저고리를 입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그 위에 남색 조끼와 연두색 길에 색동 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다. 또 형편에 따라 까치두루마기나 오방장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전복을 입기도 하였다.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는 돌빔 양식은 1884년(고종 21) 갑신 의제 개혁 때 소매 넓은 도포 등의 옷을 없애는 대신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고 실띠를 두르도록 변경한 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이므로 사실 그리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10년 후인 1894년부터는 전복을 입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루마기에 전복을 입는 돌빔 양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돌빔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는 왕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791년(정조 15) 6월 18일이 원자의 첫돌이었는데 사유화양건(四斿華陽巾)을 쓰고 자라겹삼(紫羅裌衫)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 의젓하였다171)『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6월 신유.고 하였으니 18세기 왕실에서는 건(巾)과 삼(衫)을 돌빔으로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인 1898년(광무 2) 9월 영왕(英王, 영친왕)의 돌날에 올린 복식 중에는 옥판(玉板)과 석웅황(石雄黃)이 장식된 아청색 복건(幅巾)에 남송색 사규삼, 양남색 쾌자, 분홍색 두루마기, 분홍색 저고리, 양남색 배자, 흰색 바지, 오목버선 등이 포함되어 있다.172)이명은, 「궁중긔에 나타난 행사 및 복식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250∼251쪽. 그리고 그에 앞선 1897년 10월 15일 삼칠일에는 아청색 굴레에 양남색 배자, 분홍색·두록색·옥색 저고리에 흰색 바지, 오목버선 등이 마련되었다. 삼칠일에 입는 옷과 돌 때 입는 옷을 비교해 보면 삼칠일에는 굴레를 쓰고 짧은 옷을 입은 반면에 돌 때는 복건에 사규삼이나 쾌자, 두루마기 등과 같은 길이가 긴 옷이 마련된 것이 다른 점이다. 돌 때면 성인과 같은 포 종류의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 고궁 박물관에는 영왕의 돌빔은 아니지만 왕손인 그의 아들이 어렸을 적에 입었던 옷들이 소장되어 있어 당시 왕실 남자아이 옷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173)김영숙, 『조선조 말기 왕실 복식』, 민족 문화 문고 간행회, 1987, 101∼140쪽.

돌쟁이 머리에 쓰는 관모 중에는 검정 비단으로 만든 복건과 호건(虎巾), 굴레가 있다. 가장자리와 끈 부분에는 ‘수부귀(壽富貴)’, ‘다남자(多男子)’ 등의 좋은 의미를 지닌 글자나 무늬를 금박으로 찍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복건은 검은 색상의 옷감 한 폭을 길이로 반을 접어 만든 것인데 이마 부분에는 옥판이나 석웅황 등의 장식물을 달기도 하였다.

호건은 복건과 달리 정수리 부분이 트였으며 좌우에 귀를 달고 눈썹과 눈, 코, 입, 수염 등을 수놓아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을 나타냈다. 중국에서도 어린아이 모자에 호랑이 모양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악마를 쫓기 위함이었다고 한다.174)노자키 세이킨, 변영섭·안영길 옮김, 『중국 길상 도안』, 1992, 예경, 570쪽.

한편, 굴레는 남자아이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도 썼던 것으로, ‘다리’라고 하는 작은 조각 여러 개를 연결해 머리를 감쌀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앞다리와 끈, 댕기, 정수리 복판 부분의 색상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별하였다. 남자아이는 양쪽 볼에 해당되는 좌우 앞다리와 댕기, 정수리의 복판을 흑색으로 하였으며 끈은 남색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들을 볼 때 이러한 규정을 반드시 지킨 것은 아니었다.

남자아이의 겉옷에는 사규삼과 두루마기가 있다. 두루마기를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층에서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면 사규삼은 아이들이 관례 전까지만 입었던 옷이다. 특히, 예서(禮書)에는 관례를 치를 어린아이가 입는 초출복(初出服)이니, 어린아이로서의 마지막 옷인 셈이다. 두루마기는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서민들이 입었던 옷이라고 하는데 『가례(家禮)』를 통해 그 이름이 일찍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대부가에서 입기 시작한 것은 후대의 일로, 이 옷을 입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18세기 이후부터 볼 수 있다.

사규삼은 앞 중심에서 마주 닿는 대금형 옷으로 끝을 굴린 곧은 깃을 달았다. 깃 끝 아래로 두 쌍의 단추를 달아 여몄으며 소매는 넓고 무 없이 양옆이 트인 옷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의 유물 중에는 뒤가 트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 뒤트임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깃과 수구, 옷 가장자리를 따라 검정이나 붉은 선 장식을 둘렀는데 선 위에 금박을 찍어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초록색이나 남색, 분홍색 등 화사한 색상을 사용하였는데 아이들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허리에는 주로 붉은색의 세조대(細絛帶)나 돌띠, 전대(戰帶) 등을 둘렀다.

한편, 19세기 말에 흔히 입기 시작한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양옆이 트 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아이의 두루마기에는 어른의 두루마기와는 달리 다양한 색상의 옷감을 사용하였다. 특히, 색동 소매의 두루마기를 애용하였다. 색동두루마기는 까치두루마기라고도 하였는데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때때옷’이라고도 하고 ‘까치 까치 설날’ 같은 명절에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175)임재해, 「설 민속의 형성 근거와 ‘시작’의 시간 인식」, 『한국 민속학보』 7, 1996, 248∼249쪽.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색동 소매를 달지 않은 보통 두루마기일지라도 어른과 달리 색상은 선명하고 화려한 옷감을 사용하였다.

연두색 길에 노란 섶, 자주색이나 빨간색의 소매와 무, 그리고 남색의 깃과 고름의 오방색(五方色)으로 만든 오방장두루마기는 아이의 모습을 더욱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남자아이의 색동두루마기와 오방장두루마기에는 대체로 남색 고름을 달았다. 두루마기의 깃과 고름, 바지와 버선의 끈 등에 쓰는 남색은 여자아이의 옷과 구별하기 위한 색상으로, 마치 남자아이의 상징처럼 사용되었다. 두루마기에는 왼쪽 옷자락에 긴 고름을 달아 허리에 한 번 감아서 고름을 매는데 일명 ‘돌띠 고름’이라고 한다. 아동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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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장두루마기에 굴레를 쓴 남자아이
오방장두루마기에 굴레를 쓴 남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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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 위에는 남색 전복을 입고 붉은색 돌띠나 전대를 매었다. 전복은 등솔이 길게 트이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본래는 군복(軍服)의 한 종류였다. 어린아이의 전복에는 어른의 것과는 달리 깃과 섶, 밑단 등에 수복강녕(壽福康寧)이라는 글자나 꽃무늬 등의 금박을 장식하였다. 전복 위에는 붉은색 전대나 십장생 무늬를 수놓은 붉은색 돌띠를 매었는데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12개의 작은 염낭에 곡식을 담아 매달면서 부귀영화를 기원하기도 하였다.176)김영숙 편저, 『한국 복식 문화 사전』, 미술 문화, 1998, 135쪽.

그리고 두루마기 안에는 바지저고리를 입는데 두루마기 없이 저고리 만을 입을 때는 등에 닿는 저고리 고름 부분에 수놓은 장식 조각을 붙여서 저고리만 입을 때의 아름다움도 배려하였다.

바지는 용변을 처리하기 편하도록 뒤를 트고 밑을 판 풍차바지를 입혔다. 그리고 바짓부리에는 남색의 대님을 달아 부리를 묶기 편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오목이’라고 하는 누비 타래버선을 신겼는데 곱게 누비거나 솜을 둔 버선의 발등에 가득 찬 화려한 색상의 자수 장식과 버선코의 실 방울(絲花) 장식이 귀엽기 그지없다. 버선목에 역시 남색 버선 끈을 달아 벗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한제국 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서 서양 남자의 조끼가 우리 옷에 도입되었는데 아이들의 옷으로도 입혔다. 단추와 단춧구멍을 만든 남색 조끼에 금박을 찍어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또 조끼 위에는 색동마고자를 입기도 하였다. 이것 모두 만든 이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담긴 옷으로, 무병장수와 출세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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