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1. 무병장수와 부귀권세를 기원하는 돌빔
  • 여자아이의 돌빔
이은주

여자아이의 돌빔에 대한 자료는 남자아이의 것보다 찾아보기 어렵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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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상 받은 여자아이
돌상 받은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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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여자아이의 돌 사진에서 굴레를 쓰고 색동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77)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한국 전통 어린이 복식』, 단국대교 출판부, 2000, 52쪽. 그리고 궁중 여자아이의 돌 사진으로 1913년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의 것이 남아 있다. 고종이 애지중지했던 외동딸이었고 옹주라는 평범하지 않은 신분이었던 탓에 그나마 돌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 속 덕혜옹주는 화관을 쓰고 어깨와 가슴에 흉배를 단 수복(壽福) 글자 무늬의 금박 당의에 스란치마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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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돌 사진
덕혜옹주 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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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가 입었던 의복에 관한 유물로는 사도세자의 딸인 청연군주(淸衍君主, 1754∼1821) 묘에서 출토된 어린아이의 삼회장저고리나 당의가 있다. 그 밖에도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가 어렸을 때 입었던 것이라고 하는 자주 당의나 치마저고리가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도 돌날 한복을 입힐 때에는 당의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머리에 썼던 관모에는 굴레와 조바위가 있다. 여자아이의 굴레는 가장 앞부분의 앞다리와 댕기, 정수리의 복판을 자주색으로 하였으며 끈은 홍색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뒷다리에는 적색을, 누은다리에는 옅은 녹색을, 목다리에는 남색을 사용하였다.178)손정규, 『조선 재봉(朝鮮裁縫)』, 삼중당(三中堂), 1948, 88∼89쪽.

조바위는 대한제국 말에 선보인 여자용 방한모자이다.179)뿌리 깊은 나무, 『겨울 한복』, 대원사, 1989, 69쪽. 주로 겹으로 만들었는데 검은색이나 남색, 자주색, 홍색 등을 사용하였다. 정수리가 트이고 뒷부분은 목덜미에 이르며 양쪽 볼을 살짝 덮는 형태이다. 정수리에는 앞뒤를 연결하는 다회(多繪) 끈 양 끝에 술을 달았으며, 볼 부분에는 수를 놓거나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꾸몄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색동두루마기를 입었다. 여자가 두루마기를 입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이므로 그 전에는 장옷을 입었을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는 저고리와 마고자, 두루마기 등의 소매를 알록달록하게 하였는데 곧 여러 색상의 옷감 조각을 이어 만든 색동을 사용하였다. 남자아이의 두루마기에는 남색 고름을 사용한 것에 반해 여자아이는 주로 자주색이나 홍색 등 붉은 고름을 달았다. 그리고 오방장두루마기의 섶은 분홍색으로, 무와 소매는 홍색이나 자주색으로 장식하여 남자아이의 것과 구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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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아용 색동저고리
여아용 색동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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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후의 자료로 남아 있는 사대부가 여자아이의 옷에서는 성인 여성의 옷에서 보기 어려운 장식을 많이 볼 수 있다. 색동 소매는 물론 어깨의 색동 장식, 그리고 깃이나 섶 등에 곱게 장식된 잣물림 장식, 홍색의 돌띠 고름, 화려한 자수 장식, 고대 주변에 장식하는 앙증맞은 박쥐 장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색상이나 세부 형태에서 화사하고 장식적인 요소가 더 추가되는 것이 아이 옷의 특징이다.

색동은 주로 명절에 입는 어린이 옷을 비롯하여 활옷이나 원삼 등의 여성용 예복, 그리고 무당이 입는 무복(巫服)에 흔히 사용되었다. 색동은 쓰고 남은 옷감들을 버리지 않고 활용한다는 알뜰한 살림의 지혜를 통해 꿈과 기쁨을 주는 색상의 조화를 추구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활옷이나 원삼에 사용된 색동이 보통 사람들과 주인공을 차별화하여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면 돌빔 등 어린이 옷에 사용된 색동은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꿈과 즐거움, 사랑스러움을 연상시키려는 것이었다.

색동저고리와 홍색 치마를 입고 치마 안에는 속치마와 바지 종류를 입으며 앙증맞은 발에는 곱게 수놓은 타래버선을 신었다. 버선목에는 여자아이를 상징하는 홍색 끈을 달아 벗겨지지 않도록 마음을 썼으며 버선 위에 꽃신이나 비단신을 신겼다.

한편, 여자아이의 돌 때 남자아이의 옷을 입히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는 남아 선호 사상이 굳게 자리하고 있어서 딸을 잇따라 낳으면 아들을 낳기 위한 방편으로 돌쟁이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의 옷을 입혔던 것180)한상숙, 『밥해 먹으믄 바느질허랴, 바느질 아니믄 빨래허랴』, 뿌리 깊은 나무, 1992, 126쪽.이니 요즈음 사고방식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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