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3. 남녀의 가약을 맺어 주는 혼례복
  • 초례청의 신랑복, 일생 최고의 관복
이은주

조선 전기의 신랑복은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일기류, 문집 등에서 단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혼례복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99)이덕무, 『청장관전서』 권20, 김신부부전.와 1841년(헌종 7)의 서문이 실려 있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그리고 조선 후기의 풍속화나 평생도병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흔히 신랑복을 사모관대라고 한다. 본디 사모관대는 관리들의 기본 관복으로, 사모와 단령, 품대, 흑화로 구성된다. 나이 어린 신랑이 관리일 가능성은 없지만 이날만은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관리의 사모관대를 입었던 것이다. 미래의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

1475년(성종 6)의 『국조오례의』200)『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권4, 가례(嘉禮) 종친문무관일품이하혼례의(宗親文武官一品以下昏禮儀), 45쪽.에 관직이 있는 사람은 공복을 입고 양반 자손이나 급제자, 생원 등은 사모에 각대를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서민은 갓(笠子)에 실띠(絛兒)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10년 후인 1485년(성종 16)에 완성된 『경국대전』201)『경국대전』 권3, 36쪽.에는 신랑이 공복을 착용한다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관직이 있는 사람은 사모와 품대를, 관직이 없는 사람은 갓에 실띠를 착용하라고 하였을 뿐이다. 물론 사모와 품대에도 단령을 착용하는 것이었지만 갓과 실띠에도 단령을 착용하였다.202)이이(李珥),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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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적단령을 입은 신랑
자적단령을 입은 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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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단령의 색상에는 제한이 없었으나 1446년(세종 28) 세종은 아침 조회 때 입는 관원들의 단령 색상을 검은색으로 통일하면서 흑단령이 단령 중의 예복으로 정착되었다. 흑단령은 국가의 크고 작은 의례203)이은주, 「조선시대 백관의 시복(時服)과 상복(常服) 제도 변천」, 『복식』 55권 6호, 2005, 38∼50쪽.에서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혼례, 개인적인 제사204)김성일(金誠一),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권6, 16쪽. 등에도 착용할 수 있었다. 관직이 없는 신랑도 혼례복으로 흑단령을 입었다.

임진왜란 전후 기록인 『미암일기』나 『쇄미록(瑣尾錄)』에서도 신랑의 흑단령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확인된다. 대체로 혼례에 사용하기 위해 흑단령과 금대를 빌렸다는 내용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직이 없는 경우 갓에 흑단령을 입고 실띠를 두르는 것이 규정이었지만 관직이 없어도 사모와 금대까지 착용하여 관리의 모습으로 혼례를 치렀다. 이것이 바로 혼례복 문화의 특징인 섭성 풍속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신랑의 단령으로 자적단령이 유행하였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 평생도병 중 신부 집에 가는 신랑 일행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이 일행에서 가장 앞서 가는 두 인물은 흑립(黑笠)에 홍단령(紅團領)을 입고 있는데 그들은 신부 집에서 마중 나온 집사(執事)들이다. 그 뒤로 두 쌍의 청사초롱을 따라 주립(朱 笠)에 흑단령을 입은 기럭아비가 붉은 보자기에 싼 기러기를 들고 앞장섰다. 신랑은 사모에 자색 단령, 그리고 흑화를 신고 백마에 올랐으며 그 앞에 말을 끄는 마부가 보인다. 신랑 뒤에는 녹색 장옷을 머리에 쓰고 말 탄 유모가 따르고 있으며 양옆으로 일산(日傘)을 들고 가는 시배(侍陪)들과 여하임(女下任)이, 그리고 맨 뒤에는 초립을 쓴 후행(後行)이 말을 타고 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18세기 후기의 『경도잡지(京都雜志)』205)유득공(柳得恭), 이석호(李錫浩) 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외』, 을유문화사, 1982, 205쪽.에도 신랑이 자적단령을 입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19세기 초 『거가잡복고』206)박규수(朴珪壽), 조효순 옮김,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석실, 2000, 159쪽.에는 신랑복으로 자색 단령(紫袍)에 서대(犀帶)를 두르는 것은 대군이나 왕자의 복장이라고 하였다. 신랑의 자적단령은 관복인 흑단령을 입는 문무관보다 더 높은 신분층인 대군이나 왕자, 공주의 남편인 의빈(儀賓) 등의 흑단령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들은 아청색 겉감에 홍색 안감을 댄 흑단령을 입었는데 아청색에 홍색 안감을 사용하는 경우, 겉감이 얇으면 안감의 붉은 색상이 겉감의 검정색과 합쳐져 자주색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신분 제도가 지속적으로 와해됨에 따라 서민층의 신랑도 사모관대를 빌려 입고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러 차례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풍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값싼 대여품이 남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이 점차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혼례복을 기대하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개화기에도 명문대가의 경우에는 전통과 격조를 잃지 않는 혼례복을 착용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서민층의 신랑은 여전히 대여업자에게서 싸고 조악한 혼례복을 빌려 입었을 것이다.

현재 박물관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서민용 혼례복의 수준이 낮은 이유 역시 마을에서 간단히 만들어 두고 돌려 가며 입었다든지, 전문적으로 대여해 주는 곳을 통해 빌려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혼 풍습이 일반화되면서 단령의 크기가 작아졌고, 가슴과 등에 달린 흉배나 품대, 목화 등 모든 부속품의 질도 떨어졌다.

단령의 색상은 아청색부터 남색, 녹색 계열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장식된 흉배는 대부분 쌍학흉배(雙鶴胸背)라고 할지라도 도안이나 자수의 품격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렇듯 조악해진 신랑복은 개화기에 전통문화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더욱이 1920년대 이후 신식 결혼식이 도입되면서 전통 혼례가 점점 더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도 혼례복의 격을 떨어뜨린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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