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풍속화나 평생도병에서는 대체로 신랑과 그 일행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 신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신부의 모습은 19세기 말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그렸다고 하는 풍속화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족두리에 녹원삼을 입고 있는 신부와 녹단령을 입은 신랑의 합근례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그림 속에는 이미 흐트러진 개화기의 혼례 풍속이 드러난다.
개화의 물결 속에서 궁중이나 반가에서는 여전히 활옷을 신부복으로 착용하였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한 서민층에서는 부인 예복과 신부 예복에 차이를 두고자 했던 과거의 예법과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갔다. 화려한 자 수 장식이 있는 활옷을 장만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마련하기 쉽거나 빌리기 쉬운 녹원삼을 신부복으로 입게 되었을 것이다. 서민들은 개개인이 원삼을 만들어 입기 어려웠던 까닭에 마을에서 만들어 놓은 원삼을 돌려 가며 입는다든지, 혼례용품을 빌려 주던 수모에게서 저가로 빌려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민간 혼례용 원삼에는 색동의 수가 상당히 많다. 녹원삼을 혼례복으로 입을 때 활옷의 화려함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은 색동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인 신부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주려는 마음에서 색동의 수를 늘려 화려함을 더하였다.
이렇듯 색동이 과장되게 장식된 녹색의 어설픈 원삼은 홍장삼이나 활옷, 개성 원삼보다 늦은 시기에 입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른 혼례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았던 색동 원삼이 아주 오래된 신부의 혼례복인 양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