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3. 남녀의 가약을 맺어 주는 혼례복
  • 신부의 치장
이은주

초례 때의 신부는 혼례복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도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치장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신부의 머리 손질과 화장은 치장을 잘하는 재주가 있는 수모에게 부탁하였다. 수모는 치장을 직접 해주는 것 외에도 치장에 필요한 물품을 대여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신부의 머리치장은 혼례복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의 머리 모양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는 반면에 조선 후기에는 좀 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여성의 머리치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체였다. 평상시에도 남의 머리카락까지 보태어 크고 높게 올리는 머리 모양이 유행하였는데 그에 따른 경제적·윤리적·신체적 폐단이 자주 언급되는 사회적 병폐 중의 하나였다. 아주 특별한 날인 혼인날 신부의 머리치장은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영조 초기에 쓰여진 『병와집』에는 신부가 섭성으로 내명부의 큰머리(巨頭味)를 한다고 하였는데 정조 때에도 혼인에는 어여머리(於由味)나 큰머리의 사용을 허락하였다.227)『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신묘. 19세기 초의 『거가잡복고』에도 신부의 머리 모양으로 어여머리나 큰머리를 돈을 주고 세내어 모두 머리카락을 묶어 만드는데 높다랗게 겹으로 올리고 많은 종류의 용봉잠(龍鳳簪) 등을 사용하여 장식하고 금과 구슬이 번쩍인다고 하였다.

어여머리의 ‘어여’는 ‘두른다’는 뜻이다.228)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15, 동국부녀수식변증설(東國婦女首飾辨證說). 어여머리는 어염족두리를 얹은 후 여러 개의 다리(月乃)를 두르는 것이다. 큰머리는 현재 떠구지를 사용하여 장식한 머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세기 기록에 의하면 수파(首把)와 체발(髢髮), 각종 비녀를 사용한 머리 모양이다.229)『중궁전책례(中宮殿冊禮)』 (1651), 27. 수파는 가리마(加里麻)이므로 적어도 17세기의 큰머리는 많은 양의 가체, 비녀 장식을 하고 가리마를 쓴 커다란 형태의 머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1809년(순조 9)에 편찬한 『규합총서』에는 긴 머리를 좌우로 묶어 동심대를 만들어 두 어깨에 드리우고 장식을 하는 머리 모양을 당시 신부들이 하는 가래머리라고 하였다.230)빙허각 이씨, 정양완 역주, 앞의 책, 237쪽. 가래머리에도 다리가 사용되었으니231)『헌종비 경빈 김씨 순화궁 가례시 절차(憲宗妃慶嬪金氏順和宮嘉禮時節次)』(1848), 규장각 27008. 떠구지머리처럼 과장된 머리 형태가 19세기에 신부의 머리 모양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가체 금지령이 정조대에 실효를 거두면서 궁양(宮樣)이었던 족두리가 반가 여성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아 갔다. 하지만 족두리에 갖은 패물을 장식하면서 그 폐단 역시 문제가 되었다. 그 때문에 1788년(정조 12)에 정조는 혼례용 칠보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을 강력하게 금하였으나 19세기 초의 『여유당전서』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신부가 족두리를 사용하 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전통 혼례복에는 원삼에 보석과 칠보 등으로 장식한 족두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신부의 칠보족두리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사가 오래된 화장법 중의 하나인 연지와 곤지가 신부 화장으로 지속되었으며 그 밖에 귀고리 장식, 노리개 장식도 빼놓을 수 없는 신부의 치장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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